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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까?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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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12월 12일 (일) 22:41:42 [조회수 : 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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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고향에 가서 아들의 며느릿감을 찾아보라는 주인의 부탁을 받고 늙은 종은 낙타를 끌고 먼 길을 떠났다. 참으로 막연한 요청이었다. 자기를 신뢰해준 주인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사람을 찾아야 했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보아야 할까? 생각은 많았지만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긴 여정 끝에 마침내 주인의 고향 어귀에 도착한 그는 잠시 성 바깥에 있는 우물 곁에서 다리쉼을 하며 이 궁리 저 궁리를 하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때였다. 그는 마침내 한 가지 기준을 세웠다. ‘물동이를 기울여서, 물을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부탁했을 때, 자신은 물론 낙타에게도 물을 주겠다고 말하는 소녀라면 하나님이 정해준 여인으로 여기겠다는 것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일부이다. 종이 분별의 기준으로 택한 것은 종교도 가문도 경제력도 아닌 ‘인애의 행동‘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그를 돕기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지금 이 천 년 전에 이미 오셨지만,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를 기다린다. 그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일까? 성경은 그분이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꺼림칙하게 생각하거나, 쾌적한 일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이들로 여겨 멀리하고 싶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기독교인들이 기다리는 분이 바로 그런 사람들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고 있다는 이 급진적 메시지를 사람들은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분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해도 과연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일찍이 시인 정호승은 ‘서울의 예수‘라는 시에서 “인간이 아름다와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고 노래했다. 예수가 구치소 담벼락 안쪽에 있는지 바깥에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는 엄혹했던 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가 갇힌 이들과 함께 울고 있다. 서울의 예수는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시에서 서울은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과 모순이 집적된 삶의 은유일 것이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는 존재는 우리 그리움의 대상일 뿐 아니라 스스로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시인 도종환은 ‘흐느끼는 예수‘라는 시에서 “만일 예수가 눈발 풀풀 날리는 철거 지역에 와서/꺼멓게 타버린 슬픔의 시신을 안고 몸부림치는/늙은 여인 곁에 앉아 울고 있었다면/우리는 예수를 알아보았을까“라고 묻고 있다. 이 시는 매우 처절한 현실을 보여준다. 시인은 예수가 오시는 자리가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아픔의 자리라고 말하고 있다.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는 이들이 원본의 이미지를 가공하여 뿌옇게 될 정도로 편집하는 것을 일러 ‘야시피케이션’(yassification)이라고 한다. 낯설기 이를 데 없는 신조어이다.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이기에 일어나는 웃지 못할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기억의 미화 혹은 수정도 그 중의 하나이다. 

여러 해 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표지에 예수의 초상화를 실었다. 그 얼굴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우리가 흔히 성화에서 보아온 금발의 백인 남성이 아니라 이 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평균적 남성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피부색은 조금 어둡고 코는 뭉툭하고 머리카락은 검은 갈색이었다. 그렇게 보면 예수의 이미지도 아주 오랫동안 야시피케이션 과정을 거쳐 우리 속에 주입되었던 셈이다. 그 이미지는 은연중에 백인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종주의를 부추기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신학자는 예수가 흑인이었다고 말한다. 이때 흑인이란 단어가 지시하는 것은 그의 피부색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들의 고통 혹은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된 이들의 경험이라 말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기 삶이 진리를 피하면서 찾는 모순 속에 있었다고 말한다. 남의 일이 아니다. 푸접없는 세상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듯 삶이 위태로운 이들이 있다. 참된 기다림이란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2021/12/11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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