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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뷰엘에서 조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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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11월 28일 (일) 18:24:57
최종편집 : 2021년 11월 28일 (일) 19:51:43 [조회수 :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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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제임스  홀  내한  130주년  기념 심포지움  – 강연  Ⅰ

 

-  글렌뷰엘에서  조선까지-

-  From  Glen  Buell  To  Korea  -

강경신  목사  (로제타홀  기념관  관장,  인천기독병원  원목실장)

   
▲ 강경신 목사

Preface

우리나라 근대의료역사는 미국교회 선교사 매클레이가 1884년 6월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의 허락을 받은 일에서 시작한다. 고종의 윤허를 받은 미국교회는 서둘러 Dr. William B. Scranton에게 목사 안수를 주어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한다. 이일 후, Dr. Scranton에 의해 세워진 병원이 정동 "시병원"이었고 이 시병원에서 시작된 최초의 여성병원이 "보구녀관"이었다.

당시 고종으로부터 이름을 하사 받은 병원은 "보구녀관”과 "시병원” 뿐이었는데, 이는 Dr. Scranton 으로 시작된 감리교회의 의료사업이 일반 백성들 뿐만 아니라 황실의 인정을 받은 증거라 볼 수 있다. "보구녀관"의 의료사업은 나날이 성장하였고, 이 보구녀관의 3대 원장으로 조선에 와서 근무를 시작한 이가 Dr. Rosetta Sherwood 이다. 그리고 Dr. Rosetta Sherwood와 함께 사역하려고 1891년 12월 조선에 오게 된 캐나다 출신 닥터가 William James Hall 이다.

특별히 제물포에는 조선인들을 치료했던 서양 의료인이 입국하는 통로였던 개항장이 있었다. 이 곳을 통하여 모든 의료인이 조선에 도착하였고 서울, 평양, 원주, 공주, 대구, 등의 모든 주요 도시로 흩어져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이들로부터 의료혜택을 입은 사람들의 수는 헤아리기 어렵고, 또한 이들의 의료 사업은 개화기를 거쳐 조선 사회가 근대화로 나아가는데 매우 큰 기여를 하였다.

이에 "로제타홀 기념관”은 이들, 개화기로부터 근대화, 그리고 20세기 초까지 한국근대의료역사를 형성해간, 의료인들의 삶, 그들의 의료 흔적과 정신을 담아 기릴 수 있는 근대의료역사박물관이 인천에 건립되기를 소망한다. 더불어 "Dr. Rosetta Sherwood”의 남편이었던      "Dr. William James Hall” 의 내한 130주년을 맞아 심포지엄을 열어 자신의 건강까지 잃어가며 조선과 조선사람을 사랑했던 그의 삶과 사역을 기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Dr. William James Hall 의 소년시절, 다시 학교로, 의과대학 입학, 선교사로 헌신하기까지의 신앙여정, 그리고 닥터가 된 후 조선에 오기까지의 그의 의사로서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1. The Childhood of Dr. William James Hall


William James Hall이 태어난 곳은 Glen Buell, Ontario, Canada 이다. Toronto에서 북동쪽으로 차로 3-4 시간을 운전하면 도착할 수 있다. Glen Buell은 현재 인구가 10,000명 미만인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제임스 홀이 태어나고 자랐던 1800년대, 주민의 수는 1,000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학교는 Glen Buell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1-8학년까지 한 교실에서 수업하는 초등학교가 유일하였다. Dr. William James Hall은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예였다. 그의 할아버지 제임스 홀이 아일랜드에서 1831년 캐나다 글렌뷰엘로 이주하였고, 그의 아버지 조오지 홀은 마가렛  볼톤과  1859년  결혼하였다.  이들  사이에서  1860년  1월  태어난  아기가  William James Hall이다.

제임스 홀은 1867년 가을 Elementary School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학교 가기를 꺼려했지만, 곧 학교를 좋아하였다. 뛰어난 재능은 없었지만 독서를 좋아하였고, 성품이 좋았던 제임스 홀은 급우들과 싸울 줄을 몰랐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를 "Good-natured Jim”마음씨 착한 짐이라 불렀다. 또한 사려 깊은 마음을 가졌던 어린 제임스 홀에 관하여, " 친절한 행동을 베풀 기회를 찾는 소년, 만약 교실에 연필이 떨어지면 나가서 줍는 첫 번 째 사람, 불을 지피고 양동이를 가져오는 첫 번째 사람, 하찮은 일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소년” 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제임스 홀은 놀라운 천재이거나 혹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종교의 거룩한 영향에 의해 부드럽고 원만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농부가 될 마음이 없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아니 농부가 될 마음은 없어, 글쎄! 목사 아니면 의사? 둘 중에 하나라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나 나는 그렇게 될 만큼 선하거나 현명하기를 감히 바랄수 없어" 라고 답하기도 하였다. 1876년 제임스 홀은 그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떠났다. 장사를 배우려 하였으나 1877년 1월 목공을 배우기 위해 아덴으로 갔다. 아덴은 당시 글렌뷰엘 보다 인구도 많고, High School도 있는 시골의 작은 도시였다. 그러나 아덴에서 장사를 배우며 목공 일을 하는 1년 반 동안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결핵으로 거의 죽게  될 형편에 이르자 자신의 집이 있는 글렌뷰엘로 돌아왔다.

 

2. 다시 학교로 (Re-entering School)


William James Hall의 교육적 배경을 이해할 때, 그의 신앙을 제외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그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거나 열심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년기에 독서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는 1876년 학교를 떠날 때에도 8학년의 초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을 위해 더 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신앙적인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덴에서 장사를 배우며 목공 일을 하는 동안 결핵을 걸려 사망선고를 받게 된 제임스 홀의 마음은 심히 곤고하였다. 당시 그는 "자신이 죽는다면 빈손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몹시 괴로워하였다. 이때 심정을 그는 자신이 들었던 찬송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가야만 하는가 빈 손으로/ 나의 주님을 그렇게 만나야 하는가?/ 한 날의 봉사도 그에게 하지 못해/ 트로피를 그의 발 앞에 / 내려놓지 못하네...

그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기도하며 만일 "하나님이 내게 건강과 힘을 회복시켜 주신다면 자신의 생명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약속하였다.”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순회 설교자였던 윈터 목사(Rev.Winter)가 글렌뷰엘 감리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였을 때, 예배 중인 제임스 홀은 "거룩함”에 관한 설교 듣게 되었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치료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건강을 되찾은 제임스 홀은 "무식하면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자신의 교육이 부족하기에 할 수 있는 있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후, 그는 공부를 계속할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고등학교 입학에 필요한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전에 다닌 초등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에게 자신을 받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글렌뷰엘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선생님, Miss Karley(현재 Mrs. Kendrick)는 자신의 교실로 찾아 왔던 제임스 홀의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홀을 처음 만난 것은 글렌뷰엘에서 가르친 지 2년 되는 해였어요. 어느 날 아침 교실문을 열고 들어온 제임스 홀은 자기의 건강이 나빠지고 결핵에 걸리기까지 장사를 배우려고 어떻게 일했는지를 내게 말했어요. 그는 자신을 상급반에 넣어 준다면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 때 나는 그가 19살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문법, 역사, 또는 지리에 대해 거의 지식이 없었어요.” 제임스 홀의 실력은 상급반에 부적합 했지만, 제임스 홀은 열심히 공부하였고, 다음 해 1880년 크리스마스에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Miss Karley는 제임스 홀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대학을 진학할 수 있도록 공부할 기회를 주었고, 열심히 가르쳐 주었으며, 후에도 연락을 취하며 계속적인 도움을 주었던 스승이었다. 그러했기에, 후에 제임스 홀은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 벤쿠버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 On board Empress of Japan,”VANCOUVER, B. C., November 18, 1891.
친애하는 캔드릭 부인

저는 결코 당신이 제게 주신 친절과 깊은 관심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나의 생을 만드는 데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마지막으로 뵌 이래 하나님께서 놀랍게 저를 사용하였고, 저의 미약한 수고들을 축복해 주셔서 지금 제 생의  큰 목적과 포부가 실현 되려 합니다. 저는 지금 구세주의 사랑에 대해서 들어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의료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 일본의 여객선 "황후”선상에 있습니다. 배는 내일 새벽 동양을 향해 출항합니다.  .....

 

3. Queen's Medical College, Kingston


1883년 제임스 홀은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교사 자격증도 취득하여, 아덴을 떠나 글렌뷰엘 가까운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885년 가을 제임스 홀은 오래도록 마음에 담고 있었던 의사가 되기 위해 Queen’s Medical College, Kingston, Ontario에 입학한다. 의학공부를 하는 중에도 제임스 홀은 학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놓치지 않았다. 기도모임도 시작하였다. 퀸즈 대학에는 YMCA가 있고, 예술학부 한 강의실에서 모이기는 했지만 기도에 충실한 모임은 아니었다.

제임스 홀은 1885년 11월 초 의과대학 안에 YMCA 조직하여 첫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을 중심으로 제임스 홀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아덴에서 했던 것처럼 신입생 중 복음 전할 대상을 먼저 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필요한 도움을 베풀며 친해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도모임으로 인도하거나 구원에 대하여 진지하게 이야기 할 기회를 만들어 예수를 소개하였다. 킹스톤 의과대학 2년 동안 제임스 홀은 주변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로 인해 학생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회심을 경험한다.

1887년 2월, 제임스 홀은 다시 인생의 큰 변환기를 또 한 번 맞게 된다. 동료 학생들이 외국 선교사로 가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이야기할 때, 그는 그런 문제에 관심을 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선교사였던, Rev. John Forman이 퀸즈 대학을 방문하여 선교에 대한 헌신을 요청하였다. 이 일이 제임스 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장차 선교사로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이끌어 내었다.

존 포먼 선교사가 말씀을 전하였을 때 예술대, 의과대, 그리고 신학대학을 포함하여 21명의 학생들이 선교사 서약을 하였는데, 의과대 학생 중에 제일 먼저 선교사 서약에 서명한 학생이 제임스 홀이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7월 제임스 홀은 학생들을 위한 무디의 여름학교(Rev. D. L. Moody s annual summer school for students at Northfield, Mass)에 참석하였다. 이 일은 그로 하여금 Bellevue Medical College, New York 에서 의학공부를 하도록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고 의료선교사가 되는 과정을 밟게 하였다.

 

4. The Journey to Becoming a Missionary


제임스 홀의 부모의 신앙적인 배경은 장로교회였다. 아버지인 조오지 홀은 장로교회에 출석하였지만, 제임스 홀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제임스 홀은 감리교회가 신앙적인 배경이 되었다. 이유는 제임스 홀이 다닌 초등학교가 감리교회 안에 있었고, 그의 아버지가 아들이 감리교회도 출석하는 것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1874년 10월, 제임스 홀에게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신앙적 체험의 순간이 있었다. 글렌뷰엘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다. 그 집회에서 제임스 홀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다. 1874년 10월 23일, 제임스 홀은 용서하시는 구세주의 사랑 안에서 풍성한 충족감을 느꼈다. 당시를 회상하며 홀은 "나는 14세 때 하나님께 귀의하였다. 나의 회심은 대낮같이 분명하였다. 얼마 동안 나의 생명은 영속하는 하나님의 빛 속에 있었다. 한 개의 그늘도 나의 길을 막지 못했다.”라고 회상하였다.

그리고 5년 후, 제임스 홀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다. 당시 결핵은 사망에 이르는 심각한 질병이었는데 제임스 홀이 결핵에 걸린 것이다. 병으로 죽어가던 순간, 희망을 기대할 수 없었던 시간에 그에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자신을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것이다. 이 두 사건 모두 예배 드리던 제임스 홀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였다. Rev. Winter의 설교를 들으며 자신의 몸이 치유되는 은혜를 체험한 후부터는 제임스 홀은 ‘프란시스 R. 하버갈'의 헌신 찬양을 자주 불렀다.

"나의 생명을 취하소서./ 주님, 당신께 드리게 하소서/ 나의 손을 취하소, 당신의 사라의 충동에 따라 움직이게 하소서...” 또한 그는 자신의 희망이 "멸망해가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인생을 바치는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결핵이란 병에서 회복 된 후, 제임스 홀에게는 세 가지 삶의 변화가 있었다.

첫째, 가족 기도회가 그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기도회는 제임스 홀의 인도로 시작 되었는데 처음은 소수의 인원이 참석했지만 나중에는 아버지도 참석하였다. 그 후로 그의 가족 전부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둘째, 위에서 언급했지만 제임스 홀은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 본 일이 없었지만, 다시 초등학교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결과 졸업장을 받아 아덴의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마지막에는 의학공부를 할 기회를 얻어 의사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고등교육의 기회를 갖게 된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그에게 일어난 놀라운 인생의 변화였다.

셋째,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는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글렌뷰엘을 떠나 아덴에 있을 때 제임스 홀은 만나는 학생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양심적이었고, 행동은 규칙적이었으며, 조직을 신뢰 하였고, 시간표에 따라 행동하고, 최상으로 유익한 일에 자기의 시간을 할당하며 살았다. 그가 학생이었던 아덴의 고등학교에도 매주 모여 기도하는 모임이 조직되었고, 기도모임에 참석한 학생들은 회심을 경험하고, 간증하기 시작하였다. 제임스 홀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과 주변사람들에게 최상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1883년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할 때도 그는 주일학교 교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그의 주변에서는 "너 주일학교 다니니?” 라는 질문을 받지 않고 지나쳐 버린 어린이는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런 제임스 홀을 잘 알았고 제임스 홀 주변의 모든 이들은 그의 신앙적인 열심을 인정해 주었다. 쉴 줄 모르고 복음 전하는 일에 열심을 가진 제임스 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제임스 홀의 뼈 속에는 불이 있는 듯했다”고 표현하였다.

1885년 퀸즈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할 때에도 제임스 홀의 주일학교 사역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나는 소년들을 맞이하는 것을 좋아해요” 라고 말하며, 따뜻한 태도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아이들은 빠르게 제임스 홀을 좋아하였다 의학공부의 바쁜 생활에도 홀은 조카인 로우섬(Alice R. Rowsome)에게 편지로 “나는 밤낮 바쁘게 많은 일을 하였다. 일, 운동, 그리고 잠을 위하여 일정한 규칙을 정하였고, 그것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라고 써 보냈다. 아덴에서와 마찬가지로 킹스톤에서도 제임스 홀은 변함없이 감리교도의 삶을 살았음을 보여주었다.

1887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 의학공부를 할 때도 제임스 홀은 루즈벨트가에 있는 의료선교회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처음 시작할 때 아이들이 거칠어 두 명을 가르치기는 일도 힘들었지만, 2년 후에는 그 주일학교 전체를 운영하는 교장이 되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열심을 다해 학생들을 사랑하며 복음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인지를 설명해 주는 예가 될 것이다.

학교에서는 동급생이나 후배에게 기회를 만들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이었던 제임스 홀이 1889년 M.D가 되었다. 의사로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였지만, 그의 신분이 의사로 변하고 사는 장소가 새로운 곳으로 바뀌어도 그는 늘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 일에도 열심이었다. 가난한 환자에게 사랑을 베풀어 가며 진료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선교사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캐나다와 뉴욕에서 이미 복음 전하는 사역자의 삶을 보여주었다.


5. Life as a Doctor


제임스 홀은 무디의 여름학교에서 만난 도우콘트 박사(Dr. Dowkontt, director of the International Med ical Missionary Society of New York)의 도움으로 뉴욕으로 옮겨 의학공부와 의료선교사가 되는 준비를 한다. 2년 후, 1889년 4월 Bellevue Medical College에서 M.D 과정을 마치고 의사가 된다.

의사가 된 제임스 홀은 Dr. J. Summer Stone (The New York City Church Extension and Missionary Society)과 같이 일하였다. 1년 동안 제임스 홀은 닥터 스톤의 집에서 동거하며 사역한다. 1889년 11월 바쁜 어느 날 제임스 홀은 이력서를 들고 자신의 진료소를 찾은 Dr. Rosetta Sherwood을 처음 만난다. 그리고 선교사로 후보자로 선교지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로제타 셔우드를 사랑하게 된 제임스 홀은 12월 25일 로제타에게 청혼을 한다. 하지만 로제타 셔우드는 제임스 홀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된 제임스 홀의 청혼에 둘은 서로의 미래를 약속하게 되고 로제타 셔우드는 선교사가 되어 파송지인 조선을 향해 뉴욕을 떠났다.

그후 제임스 홀은 1890년 10월 메디슨가 사역의 총 책임자가 되어 Dr. Stone의 집을 떠나 메디슨가 209번지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그 곳에서도 제임스 홀의 사역은 변함이 없었다. 닥터로 환자를 치료하고, 어려운 환자들을 물질로 돕고, 또 기회를 만들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교회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가 하는 주된 일들이 었다. 당시 제임스 홀이 로제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메리트씨는 메디슨가 선교를 전적으로 나에게 넘겨주었소. 그것이 나의 의무인 듯이 보이오........첫 주일에는 주일학교에 36명의 학생이 모였고, 마지막 주에는 60명이 모였소. 나는 11월 말 이전에 100명이 모이길 기대하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이 사역에 부르셨음을 알아요    ”

제임스 홀은 교회학교 교사의 일을 하면서도 의사로서의 환자를 진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당시 그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는 이야기들 중 하나를 소개 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가난한 유대인의 가정에 들어가 병자와 가난한 가정을 그 의사(제임스 홀)가 아침에 방문했는지를 물었다. 예, 홀의사는 한동안 우리를 계속 방문했어요. 그는 훌륭한 분입니다. 그는 우리들을 무료로 치료해 줍니다 그는 우리에게 음식을 갖다 주고 우리 모두를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홀의사는 누구입니까? 우리 백성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다리는데 지쳤습니다. 그 메시야가 이 사람보다 더 친절할까요?”

가난한 유대인의 진지한 이 질문은 뉴욕 빈민가에서 그를 만났던 사람들이 Dr. 홀에게 보내는 최고로 존경하는 표시였다. 제임스 홀의 모습은 의사와 교회학교 교사로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신실한 사역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로제타를 사랑한 제임스 홀은 늘 로제타 셔우드 곁에서 함께 일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였다. 마침내, 1891년 9월 미국교회로부터 조선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당시 제임스 홀의 조선 파송을 결정한 미국 감리교회의 실행위원회는 제임스 홀에게 편지를 보내며, 제임스 홀이 뉴욕 선교회 소속 진료소에서 얼마나 열심히 사역했는지 실행위원회가 알고 있으며, 그 수고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조선에 선교사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고 표현 하였다. 또한 제임스 홀이 가진 경험, 능력, 순수한 열심과 열정, 그리고 헌신을 인정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선교회 회원들이 제임스 홀에게 보내는 신뢰와 칭찬, 또한 개인적인 친밀함을 느끼며 후원할 예정이라고 전해 주었다.

 

Afterword

제임스 홀은 유년시절부터 닥터가 된 후에도 변함없이 늘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였다. 제임스 홀은 연령과 계층의 벽을 넘어 사람들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제임스 홀을 친밀하게 생각하였다. 청년시절의 제임스 홀의 모습을 잘 표현해 주는  한 문장이 생각난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어요.”

닥터로서 적합한 제임스 홀의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도 있다. 제임스 홀은 오랫동안 병중에 있던 길로이 부인을 자주 방문하여 도와 주었다. 닥터가 되기 이전에도 그는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하였다. 이런 제임스 홀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제임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는데 목표를 두라고 권하였다. 홀의 어머니는 "너는 인류에게 커다란 유용함이 되기 위해 태어났어, 본성은 너를 의사로 만들 거야; 너는 육체와 영혼을 모두 돌보아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다시 제임스 홀의 삶을 살펴보면 그는 의사가 되기 전부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된 사람이었고, 늘 기회를 만들어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복음을 전하기 이전부터 온유한 성품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었다. 성장기의 가난한 환경,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해야 했던 대학시절, 많지 않았던 자신의 생활비도 어려운 환자들에게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의사가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명예와 부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사실에 늘 감사하였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교회는 그의 모습을 신뢰하였다. 부자는 그를 신실한 청지기요 현명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리고 곤궁한 사람들은 그를 사랑과 동정이 많은 친구라고 보았다.

제임스 홀의 성장과정에서 그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모든 사건과 위에서 열거한 이야기와 환경들은, 다시 표현하자면 가난한 시골에서 성장한 삶의 배경,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했던 시절, 뉴욕의 가난한 환자를 치료했던 그의 모습, 그에게 있었던 신앙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 체험, 그리고 교회학교 교사의 오랜 경험은 제임스 홀이 의료선교사가 되는 일에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하였기에 은둔의 나라, 힘이 약하고 가난했던 나라, 문화와 언어가 전혀 달랐던 낯선 땅, 조선에서 의료인과 선교사의 일을 하면서 박해와 고난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불평하지 않았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늘 밝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그의 작은 마을에서의 성장배경과 오랜 교회학교 교사 경험이 조선의 어린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치료하는 일을 잘 할 수 있게 도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의 모습이 오랫동안 조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았기에 조선사회는 그를 기억하며 "성인 하락"이라고 칭송하였다.

                                                            
       

     

논찬 

 

강경신의 “글렌뷰엘에서 조선까지”에 대한 논찬

서영석교수(협성대학교)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내한하여 선교 활동을 펼친 선교사 중에 가장 주목받고 존경해야 할 인물 중 한 분을 꼽는다면 바로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홀선교사의 헌신과 한국인 사랑, 그리고 뜨거운 신앙 열정을 깊게 알고 기억하는 일반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적지 않은 수의 내한한 감리교 선교사들이 각자의 사역에 수고하고 업적을 남기면서 한국 땅에서 헌신하였지만 특히 홀 가족의 한국 사랑과 섬김의 활동은 참으로 두드러진 것이었다. 때문에 한국교회사에서 홀 가족의 사역과 헌신을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홀은 1891년 12월 캐나다 출신의 미국 북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한국선교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홀은 1892년 3월 존스(G. H. Jones) 선교사와 함께 고양, 개성, 서홍, 평양, 의주까지 의료 순회여행을 떠났다. 이때 홀은 자신의 선교구역을 평양으로 정할 것을 정하면서 1893년에는 노블(W. A .Noble) 선교사와 함께 함께 다시 평양지방을 순회하였고 이때 평양에 대지와 가옥을 구입하여 이곳을 병원과 선교센터로 삼았다. 결국  1894년 1월 홀은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병원, 학교, 교회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병원은 평양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고, 학교는 광성학교, 교회는 남산현교회의 전신이다. 당시 진료소의 설립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평양감사 민병석은 선교사 퇴거명령을 내리는 등, 기독교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당시에 홀의 조사 김창식도 잡아 옥에 가두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까지도 갔었다. 또한 처음에는 평양주민들의 외국인들에 대한 반발도 심했다. 그러나 홀은 끝까지 굽히지 않고 진료소 설립을 강행하였고, 주민들의 마음의 문도 점차 열리게 되었다.

홀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1894년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평양은 청일 양국 군대의 전쟁터가 되었는데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이때 홀은 악조건에 굴하지 않고 많은 부상자와 환자를 돌보면서 의료 선교를 하던 중 과로가 겹쳐 말라리아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병세가 심하여 서울로 가서 아내 로제타 홀의 극진한 치료와 간호를 받았지만 11월 24일 소천하였다. 안타깝게도 한국에 온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홀의 죽음은 조선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양인은 낯선 구경거리에 불과했던 외국인이었는데 조선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받는 동시에 외국인 선교사의 인식이 달라지게 된다. 이는 한국의 개신교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의 인식이 한국인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여기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홀의 사랑의 선교정신을 이어 받아 제임스홀의 부인인 로제타 셔우드 홀은 평양에 광혜여원, 평양맹아학교를 설립했고 1917년 서울로 자리를 옮겨 동대문부인병원 의학반을 조직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서울에서 출생한 아들 셔우드 홀은 토론토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해주에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을 세웠다. 셔우드 홀은 1934년 크리스마스 실을 처음으로 발행해 결핵퇴치운동에 큰 업적을 남겼다.

오늘 발표한 강목사님의 “글렌뷰엘에서 조선까지”의 글은 닥터 제일스 홀 선교사가 내한해 선교사로서 활약하고 순직하기까지의 대단한 선교사역과 업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본다. 홀이 출생하여 성장하고 조선에 오기까지의 그의 의사로서의 삶을 살펴보려고 한 부분은 매우 뜻 깊다고 하겠다. 특히 홀의 가정환경과 신앙생활, 소년시절, 학창생활, 의과대학 입학과 신앙 경험, 선교사로 헌신하기까지의 신앙여정을 잘 설명해 주었다고 본다. 특히 그가 성장하면서 깊은 신앙체험을 하고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모습을 갖는 부분도 잘 정리해 주었다고 본다.

나아가 홀은 장차 선교사가 되겠다는 서약을 할 정도로 자기 비전이 분명하게 된다. 홀은 1887년 무디의 여름학교에도 참석해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가난하고 불행한 아시아인들을 위해 일하려는 소명을 받았다. 그후 뉴욕의 벨러뷰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졸업한후 빈민 의료선교활동을 하면서 신앙체험을 하는 여러 기회를 갖는다. 부흥집회를 통한 은혜 체험도 있었고, 결핵의 질병을 극복하면서 더 깊은 신앙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홀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빈민가에서 의료사역과 교회학교 교사사역을 하며 선교사로 자신의 삶을 드리며 신실한 사역자의 모습을 갖게 된다. 홀의 성장과정에서의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자로서 배우며 자라고, 타인에 대한 존중과 온유한 성품으로 타인들을 선대하는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홀은 육체와 영혼을 모두 돌보는 귀한 인물로 자라나 의료선교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즉, 홀은 의료선교사로 신앙과 인품이 준비된 사람이었다.

사실 홀과 같은 신앙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서 헌신하는 결단에 이르게 되는 것은 당시 부흥운동과 선교집회로 인해 수많은 미국의 기독청년들이 영적으로 각성하여 선교사로 자원하며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결국 제임스 홀은 빈민가 의료사역 중 만난 로 제타 셔우드와 약혼한 뒤 1891년 조선 땅에 도착했다. 그 후 홀의 부인이 된 로제타 홀은 남편보다 1년 앞서 내한해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 정신을 가진 홀 부부는 척박한 조선의 선교현장에서 선한 청지기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오늘 심포지움이 홀에 대한 연구와 홀의 업적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는 시간이라고 본다. 특히 강목사님은 선교지에 파송되기 전까지의 홀의 생애와 신앙을 다루었는데 조선에서의 활동의 근거를 밝혀주어서 의미있는 연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먼저, 오늘 연구에 주와 참고문헌을 밝혀주었다면 훨씬 이 연구가 의미 있었을 것이다. 어느 글에서 인용문이 나왔는지 편지와 글을 어디에서 찾아 소개하는지를 밝혀 주었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바와 같이 닥터 홀과 그의 부인과 자녀들까지 많은 활동을 펼쳤는데 이 내용을 담은 글이나 자료, 그리고 단행본 등 근거서류를 소개해주시는 것이 꼭 필요로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를 들면 미망인 로제타가 미국에서 평양의 홀 기념병원을 세우는데 보탤 기금을 만들려고 『윌리암 제임스 홀, 의료선교사의 생애(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1897)』를 편집하여 발행한 부분 등 홀에 관한 자료들이 언급되었으면 한다.

둘째로 홀이 1891년 9월 미국교회로부터 조선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는데 어떤 경로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는지에 대해 좀 더 소개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미국 감리교회의 실행위원회의 결정과 뉴욕선교회 소속 진료소에서의 홀의 사역에 대한 찬사와 그에 대한 신뢰가 컷지만 선교사로 선발된 홀의 조선에 대한 이해나 조선 주재 선교사로의 결정 과정에서의 태도와 비전을 언급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셋째로 홀의 사역과 그 업적이 미국 연합감리교의 해외선교부에서는 어느 정도 평가하고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 평가가 미흡하다면, 혹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감리교회가 더욱 홀 선교사 가족의 업적과 사랑의 정신을 기리는 작업을 하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의 사랑의 은혜를 입었기에 홀 선교사처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 사랑의 실천을 펼쳐나가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귀한 제임스 홀 선교사님의 생애를 연구하고 정리해 주신 강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논찬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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