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크레센도》 (Crescendo, 2019)

1999년, 아르헨티나 태생의 유대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팔레스타인 태생으로 미국국적을 지닌 영문학자이자 문명비판론자인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대담한 프로젝트를 하나 기획하게 된다.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며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팔레스타인 땅으로부터 젊고 유망한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연주자를 발굴하여 그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기로 한 것이다. 스페인을 거점으로 한 이 청소년 관현악단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의 시를 읽고 감동하여 지었으며 그리하여 문화 간 존중과 화합의 상징이 된 『서동(西東)시집』(West-östlicher Divan)으로부터 그 이름을 빌려 <서동시집 관현악단>(West-Eastern Divan Orchestra)이라 불리게 되었다. 프로젝트의 내용으로 보나 관현악단 이름의 유래로 보나 스페인, 이스라엘, 아랍의 청소년들로 구성된 이 오케스트라가 평화의 모색을 그 의의로 두고 있다는 사실은 따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영화 《크레센도》는 바로 이 실화를 모티프로 삼아 만든 음악영화다. 세계적인 지휘자 에두아르트는 이스라엘 청년들과 팔레스타인 청년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결성의 제안을 받는다. 하지만 부친의 나치 전력으로 한사코 거절하려던 그는 결국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텔아비브에서 진행되는 공개 오디션을 통해 단원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스라엘인들에게야 아무 문제가 없는 오디션이겠지만 온갖 굴욕과 까다로운 검문을 거쳐야 겨우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올 수 있는 팔레스타인 청년들에게는 오디션장에 도달하는 것조차 수월한 일이 아니다. 계획보다 훨씬 적은 규모로 우여곡절 끝에 겨우 구성된 이 오케스트라는 과연 이 프로젝트를 계획했던 사람들이 의도했던 작은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을까?

명색이 음악영화라고는 하나 《크레센도》는 음악이 절대적으로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음악적인 성취보다 다른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지닌 채 서로를 향해 공개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는 두 그룹이 음악이라는 공통언어에, 음악이라는 절대적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더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영화는 이런 부류의 영화라면 으레 생각하게 되는, 여러 사건들과 갈등을 거쳐서 결국엔 어떻게든 행복한 평화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예상 가능하고 안이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게 쉽게 작은 평화 하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증오와 편견으로 인한 두 민족 간의 충돌과 갈등이 이 지경까지 다다를 리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는 골 깊은 적대감 사이의 평화란 얼마나 이룩하기 어려우며,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든 해내어 평화가 이룩되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이룩된 평화는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서 최근 벌어졌던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무력충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 군은 요격 미사일 아이언 돔을 자랑했고, 결국 대부분의 폭격 피해는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무방비의 가자지구 민간인들에게 돌아갔다. 대치하고 있는 증오와 분쟁의 피해는 언제나 최약자의 몫이라는 사실은 영화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로의 면전에 증오를 폭발시키고 모욕을 쏟아 붓는 일은 저 멀리 팔레스타인의 일만이 아니기에 영화는 우리 사회와 교회에 만연된 증오와 편견 역시 돌아보게 만든다. 절망적이게도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를 둘러싼 모든 증오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을 것처럼만 보인다. 적개심으로 쌓아놓은 벽은 너무나 높고 견고하여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만 보인다. 그러나 모든 파괴 불가능한 벽을 앞에 두고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 적이 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둘을 하나로 삼고 당신 몸으로 장벽인 적개심을 없애셨습니다.”(엡 2:14) 희망은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영화에 그렇게 많은 분량으로 음악이 할애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한 순간 합을 맞추어 들리는 음악은 깊은 여운과 감동을 준다. 비록 현실의 증오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고 평화의 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겠지만, 이 짧은 순간 울린 아름다운 평화의 소리는 앞으로의 지속적인 평화를 기대하며 그것을 위해 스스로 힘을 내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영화가 다 끝나고 복잡한 마음으로 스스로의 몸을 부딪쳐 장벽을 무너뜨린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희망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