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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속박하는 편견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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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6월 19일 (토) 00:40:17 [조회수 : 2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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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흘러가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일들이 있다. 누구에게나 결정적 시간이 있다. 만해 한용운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라고 노래하던 바로 그 순간 말이다. 그 순간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발생한다. 예측할 수 없기에 대비할 수도 없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런 시간을 가리켜 카이로스라 했다. 그것은 계측할 수 없는 시간, 우리 일상 속에 수직으로 파고드는 시간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일평생 몇 번은 그런 체험을 한다. 그 시간은 존재 전체를 뒤흔들어 다시는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만든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앞에서, 비겁과 안일의 유혹을 물리치고 기꺼이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오롯이 드러낸다.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지만 평생 성찰의 계기가 되는 일들도 더러 일어난다. 돌이켜 보니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들이 있다.

1980년대 초반, 내가 잠시 머물던 교회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던 많은 이들의 피난처였다. 일터에서 부당하게 쫓겨난 사람들, 수배자들, 정보기관의 눈길을 피해야 했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창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시간이었다. 교인들은 내게 명문대학을 다니다가 학교를 떠나 노동자로 변신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신화처럼 들려주었다. 그는 단순한 위장 취업자가 아니라 사상가처럼 여겨졌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옷차림은 허름했고, 내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말투와 표정 또한 숫접기 이를 데 없었다. 늘 단단하고 여문 표정의 사람들만 대하다보니 오히려 그가 낯설었다. 목회자의 의례적인 친절로 그를 대하기는 했지만 정성껏 그를 대하지는 않았다. 예배를 마친 후 교인들이 모여 담소하는 중에 그 신화적인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또 나왔다. 기회가 되면 그 분을 꼭 만나보고 싶다고 말하자 교인들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아까 왔던 그 사람’이라고 말했다. 충격이었다. 다음 주일에 그가 다시 왔을 때 그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사뭇 달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일은 내게 원형적인 부끄러움의 기억으로 남았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외모, 출신학교, 말투를 가지고 그 사람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길 때가 많다.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편견과 억측은 참다운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식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특정한 지역 혹은 직업군에 속한 이들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진리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단정적인 어투에는 듬쑥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생급스러운 말로 사람들을 오도하는 이들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국어 선생님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쯤은 한 달이면 쓸 수 있다고 장담했다.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더 좋아했던 그분의 과잉 수사임을 짐작하기는 했지만 그 말의 효력은 적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톨스토이는 내 독서 목록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편견 없이 살 수는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나의 견해가 편견 혹은 오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걸 인정할 때 참된 인식의 문이 열린다. 그 통로는 대화이다. 대화는 타인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의 견해를 수용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야 한다. 내 입장을 철회하고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아픔까지 감수해야 한다. 자기 편견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차라리 그런 아픔을 겪는 게 낫다. 아브라함 헤셀은 종교가 해야 할 일은 가치의 고착화에 도전하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편견에 사로잡힌 종교처럼 딱한 게 또 있을까?

(2021/06/05,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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