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번 꼴로 오는 비로 가장 횡재를 맞는 것은 풀들이다. 여름날이 아무리 초록으로 눈을 시원하고 마음을 맑게 해준다 해도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 바쁜 농부에게는 지천에 깔린 초록 중에 풀들을 반겨 맞을 준비는 거의 없을 것이다. 생명농업을 하는 농부라면 좀 다르게 받아들일지 모르고, 나처럼 준농부에 가까운 사람도 작물 반 풀 반 한들 그다지 마음을 썩이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물보다 더 풍성하게 자라나는 풀들을 보면 한번 쯤은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면 슬슬 풀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지난주 모내기를 거뜬히 마치고 이번주는 물에 뜬 모자리에 보식을 하고 우렁이를 방생했다. 지난 겨울의 어느 TV에서는 우렁이가 토종이 아니라 외국산이라 생태 교란을 일으킨다 우려하는 보도를 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보도했던 지자체는 우렁이 농법을 줄일지 아니면 없앨지 고민을 한다고 하여 조금은 걱정을 했다. 왜냐하면 작년에 우렁이가 장마에 거의 휩쓸려 가서 수확 한 달 전에 벼와 비슷한 피를 뽑느라 엄청 고생을 했기 때문에 만약 우렁이가 없다면 논의 예초는 누가 할지 순간 아찔했다. 그러나 다행히 음성은 올해도 예년과 동일하게 우렁이를 지원해주어 오늘 더(?) 많은 양을 얻어 논에 우렁이들을 놓아주었다. 새로운 곳으로 서식지를 옮긴 탓인지 녀석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까만 더듬이가 올라오면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풀을 향한 집념일까? 풀을 향한 본능적 후각일까? 풀이 있는 곳이면 기가 막히게 찾아가 예초를 하는 것이 참 신기한 일이다. 친환경으로 논농사를 짓는 농부에게는 이보다 효자 노릇하는 예초 장인 우렁이는 없다. 우리에겐 더없이 고마운 생명이다. 

논에서 헤엄치는 뱀을 보았는가. 우렁이를 넣으려고 논둑에 무릎을 꿇는 순간 뭔가가 논으로 후다닥 달아나서 봤더니 누런 뱀이 맹렬한 속도로 헤엄치며 가는 것이었다. 나의 눈에서 멀지 않는 곳에 멈춰서서 머리를 물 밖으로 내밀고는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멈췄다. 도망가는 속도와 물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신기해서 그 모습을 다시 보려고 우렁이를 뱀에게 던졌지만 위험 지역에서 벗어났다는 안도였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살고자 도망간 생명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으랴.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거머리가 헤엄치는 모습도 참 귀여웠다. 속도도 무지 빨랐다. 이제 막 앞뒷다리가 다 나온 조그만 개구리도 유유히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논물 위에 비친 산그림자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다. 그 속에서 나도 평화롭게 그들과 함께 순간의 시간을 즐겼다. 멀리 사라지지 않고 가까이 있어준 것에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 순간들이 지속되기를 기도한다. 

이웃집 밭이나 논을 지나가면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다. 놀라울 정도로 말끔하다.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해도 그리 깨끗하지 못할진대, 논과 밭에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예초를 하였다는 것은 놀랍고 신기한 노릇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경외심을 품은 놀람과 신기함이 아니다. 웬지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내포된 놀람과 신기함이다.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는 비애처럼 풀이 있어야 할 곳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땅이 과연 살아있는 땅일까? 과연 숨을 쉬는 흙일까? 나만 불편한가?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그곳을 지날 때마다 품는 마음이다. 그런 불편한 마음을 품다가 우리 논으로, 내가 경작하는 밭으로 오는 순간 뭔가 안도감이 느껴진다. 남들이 보면 풀 반, 작물 반인 밭을 오히려 걱정하겠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초록 풀들에 그냥 그곳에 머물러도 괜찮다고 환대 아닌 환대를 한다. 

그래서 풀은 베되 죽이지 않는다는 정말 아무 쓰잘데기 없는 풀 예찬을 하며 수수방관하다 요 며칠 사이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 예초기를 돌렸다. 간만에 돌린 예초날이 시원스럽게 풀들을 베어낼 때 그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예초날에 돌도 튀기고 나무도 긁고 흙도 패고 종말에는 나의 눈앞에 펼쳐진 초록 풀들이 하염없이 쓰러져갈 때 의미심장한 미소가 내 입가를 맴돌았다. 하하하! 녀석들, 나의 풀 예찬에 넋을 놓고 있다가 제대로 당한 셈이리라. 이렇게 올해도 풀과의 1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참깨 북토를 하고, 콩세알을 심고 난 뒤엔 풀 예찬과는 거리가 먼 부직포를 두둑 사이사이마다 까맣게 덮으리라. 그러면 녀석들은 또 한번 낭패를 면치 못하리라. 하지만 사람이 어찌 풀을 이기리요. 풀과의 제2 서막은 곧 다가오리니 날선 예초기 병사여, 깨어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