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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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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5월 30일 (일) 15:25:44
최종편집 : 2021년 06월 06일 (일) 12:23:21 [조회수 :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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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일5:1-8
(2021/05/30, 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 주일)

 

 

음성으로 듣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낳아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분이 낳으신 이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그는 물과 피를 거쳐서 오신 분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다만 물로써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셨습니다. 성령은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증언하시는 이가 셋인데, 곧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이 셋은 일치합니다.]

∙한 몸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리든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입니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찬양의 소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권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저절로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라, 애써 선택해야 할 삶의 지향입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무례한 사람, 제 욕심만 차리면서도 뻔뻔한 사람, 과도할 정도로 자기 감정에만 충실한 사람, 거칠고 난폭한 사람,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 이런 이들과는 거리를 두고 사는 게 지혜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 감정을 소진시킵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도 이런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반 사회에서라면 그런 이들과 굳이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교회는 한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가난한 사람과 부자, 건강한 사람과 병약한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과 지식인, 느긋한 사람과 성마른 사람, 이타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이 한 몸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질집단에 속한 이들을 만날 때 우리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반면 그렇지 않은 이들과의 만날 때는 긴장하게 마련입니다. 감정은 가급적 드러내지 말아야 하고, 행동도 조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이들이 어울려 꽃동산을 이루라고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다름을 받아들일 때, 더 나아가 차이를 존중할 때 우리 영혼이 확장됩니다. 용서와 용납, 그리고 사랑이야말로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끈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일4:20)

우리는 흔히 ‘사랑‘ 하면 고린도전서13장을 떠올리지만 요한1서 3장과 4장은 사랑에 바치는 송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중가요나 드라마는 만남과 사랑과 이별 그리고 아픔을 노래하지만 자기애에 충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감상성과는 많이 다릅니다. 형제자매 사랑의 근거는 그들의 사랑스러움이나 덕성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의지적인 선택
사도는 그 사랑의 신비를 정교한 논리로 설명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입니다. 낳아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이 낳으신 이도 사랑합니다. 그분이 낳으신 이는 믿음 가운데 형제와 자매로 맺어진 이들입니다. 하나님이 낳으신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속량하신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 안에 있는 사랑은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선택입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향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존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본능적으로 반감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반감을 넘어 사랑을 선택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럴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나를 귀히 여기는 사람과 만난 적이 있으신지요? 그 사랑 혹은 받아들여짐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빚어줍니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일이고, 잊고 있었던 자기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창문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 죄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서로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다리입니다.

참 믿음은 사랑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어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바울 사도가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빌3:18)라고 말했겠습니까. 앎이 사랑과 함께 가지 않을 때 그 앎은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합니다. 안타깝지만 그리스도를 들먹이면서도 실상은 그리스도를 밀쳐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지만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사랑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온통 관심은 자기 이익에 붙박여 있는 이들은 십자가의 원수일 뿐입니다. 그들은 사랑과 일치가 아니라, 증오와 분열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자기애와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사랑에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인력을 넘어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코스모스)은 경건하지 않은 세태 혹은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그런 세태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길들이려 합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부추기기에 달콤하고, 거기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세상이 미워하기에 두렵습니다.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타협하여 살다보면 욕망의 쳇바퀴를 돌리기 위해 끊임없이 질주해야 하고, 그래서 숨이 넘어갈 정도로 분주하게 살게 됩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벗어나는 순간 영원한 루저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입니다. 소비사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두려움을 숙주로 하여 번성합니다. 사람들이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기뻐한다면 소비의 경제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 그래서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사는 이들이 느끼는 만족감이 의외로 큽니다. 인디언 혈통을 타고난 미국 생태학자 로빈 월 키머러의 책을 읽다가 만난 구절이 떠오릅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혁명적 개념이기도 하다. 소비 사회에서 만족은 급진적 태도다.“(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노승영 역, 에이도스, p.169)

감사가 혁명적 태도라는 표현과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소비 사회는 늘 새로운 욕망을 창조함으로 번성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그런 경제 논리에 타격을 가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우정과 사랑, 나눔과 돌봄, 자족과 절제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를 길들이려는 세상에 맞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겪어온 경험을 토대로 하여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고, 아무도 신뢰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정말 세상이 그렇게 악하기만 할까요? 우리는 나쁜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났을 텐데도, 나쁜 기억들이 우리 삶을 장악할 때가 많습니다. 나쁜 기억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 속의 선한 생명력은 줄어듭니다. 하지만 마음을 열면 보이는 세상이 있습니다.

독일 사람 하랄트 헤르메스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서 집시들을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집시들은 늘 그의 눈에 거슬렸습니다. 1950년대에는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집시들을 보았고, 1960년대에는 모퉁이 술집에서 싸움을 일삼던 집시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70세가 훌쩍 넘은 하랄트는 유럽에 난민들이 유입될 때 롬족들이 독일에 밀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골칫거리’가 들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함부르크 북쪽의 연립주택 단지에서 50년째 살고 있었고, 은퇴생활자로 비교적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웃이 세상을 떠나거나 이사해 빈집이 생기자 시 당국은 난민들을 그곳에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청에 항의 전화를 하고 의회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용했던 주택 단지는 시끄러워졌고, 베란다에는 낯선 빨래들이 널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거주 규정을 위반하는 사례들을 카메라로 찍어 관리사무소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위집에 외국인 가족이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이 뛰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렸고, 창문을 열고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어느 날 그의 집 베란다에 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하랄트의 아내 크리스타가 윗층으로 올라가 초인종 누르고 항의했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는 그 가족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다 보니, 그 집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크리스타는 한눈에 세르비아 출신의 그 가족에게 세탁기도, 건조기도, 빨래 건조대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손빨래가 얼마나 고단한지 알았기에 크리스타는 그 가족이 딱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지하창고에 있는 빨래 건조대를 그 가족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상한 첫 접촉 이후 두 가족의 왕래도 빈번해졌습니다. 크리스타는 그 가정에 필요한 식기, 포크, 이불, 베개, 냄비, 프라이팬, 전기포트, 커피머신을 가져다 주었고 커피도 함께 마셨습니다. 나중에는 함께 여행도 했습니다. 그 경험을 기자에게 들려주면서 하랄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낯선 사람들에게 그렇게 온전히 애정을 줄 수 있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 일은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냥 그렇게 된 거예요.“(바스티안 베르브너, <혐오 없는 삶>, 이승희 옮김, 판미동, p.23)

하랄트는 그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속에서 성령의 일하심을 봅니다. 성령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줍니다.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품게 하십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서만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사랑의 나눔이 일어난다’고 고쳐 부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경험은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베드로도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벧전4:8)고 말했습니다. 혐오와 정죄와 불평을 넘어 낯선 이들과 접촉할 용기를 내는 것, 그리고 그들의 무거운 짐을 나눠질 마음을 품는 것, 바로 그것이 평화를 파종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바로 그런 선택의 연속이었습니다.

∙물과 피로 오신 주님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요일5:5) 사도는 예수님을 가리켜 물과 피를 거쳐서 오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거쳐서 오다‘는 말은 헬라어 ‘에르코마이(erchomai)를 번역한 것입니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동이라는 뜻도 있지만 ‘모습을 드러내다‘라는 뜻을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물과 피를 통해 세상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학자들은 물은 세례를 뜻하고 피는 십자가 사건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물과 피는 요한공동체가 예수님이 참 사람이었음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등장시키는 두 요소입니다. 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옆구리를 병사가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증언했습니다(요19:34). 굳이 이런 표현을 반복한 것은 예수의 죽음이 가상의 죽음이었다고 말하는 이단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들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실제였습니다. 그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구원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물과 피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이고, 자기를 희생하여 다른 이를 살리려는 숭고한 삶을 가리킵니다.

성령께서도 예수님이 참 사람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깊은 사랑의 일치 속에 머무시면서 우리를 그 사랑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그 사랑에 접속될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길들여진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사랑으로 뒤흔드는 사람이 되십시오. 일상 속에서 늘 만나는 사람들을 귀히 여기는 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십시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그 사랑과 존중의 범위를 넓혀 가십시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사랑 안에 머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지속할 때 우리 영혼은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기뻐하는 한 주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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