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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오르신 대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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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5월 16일 (일) 12:40:19
최종편집 : 2021년 05월 18일 (화) 01:23:59 [조회수 :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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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오르신 대제사장
히 4:14-16
(2021/05/16, 승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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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아픔의 땅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동시에 승천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상에 40일 동안 머무시다가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주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5월 중순, 만물이 싱스러운 계절입니다만 세상은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노동 현장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입법이 되었지만 아직 시행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평택항 컨테이너 해체 작업 중 사망한 고 이선호 씨의 빈소에 들러 유족들을 위로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억울한 죽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런 몸짓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금 누꿈해지는 것 같던 코로나19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백신 접종으로 거의 집단면역에 이르렀다며 마스크를 벗고 자축하던 이스라엘에서는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백신은 없는 것일까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이 격화되고 있고, 이스라엘 국적을 지닌 아랍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갈등이 도처에서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펠레스타인 평화협상이 또 다시 위기에 처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보며 탄식하시던 주님의 마음이 저절로 이해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마23:37)

혐오와 배제가 일상이 된 세계에서 진실의 불빛은 가물거리게 마련입니다.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한 이들은 상대방을 타격할 더 날카로운 무기를 마련할 뿐, 그들이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리저리 찢기고 저리 나뉜 세상이기에 장벽철폐자인 주님이 더욱 그리운 시절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주님이 아픔의 땅, 모순의 땅을 떠나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이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영원한 고요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말일까요? 주님은 매정하게 우리 곁을 떠나 하늘의 평화를 누리며 우리에게 그리로 오라고 손짓하고 계신 것일까요? 만약 그러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 고아처럼 버려진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늘에 오른다는 것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어를 통해 경험을 이해하고, 구별하고, 기억의 방에 배치합니다. 또한 자기 경험 혹은 이해를 너비, 높이, 깊이 등의 공간적 범주를 통해 분류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 할 때, 이 말은 하나님이 계신 공간에 대한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늘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창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선 세계를 지칭합니다. 땅은 사람들이 금을 그어 나누고 내 거니 네 거니 하고 싸우지만, 하늘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하늘은 여전히 하늘입니다. 우리가 사는 장소가 어디든 하늘은 언제나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세계에 돌입한 이들을 가리켜 하늘에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을 몇 알고 있습니다. 에녹은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습니다(창5:22).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왕하2:11). 이 이야기는 그들이 공간 이동을 통해 다른 장소로 갔다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크신 생명의 강에 합류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차원의 변화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기에 높이 혹은 오름이라는 이미지에 기대곤 합니다.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던 야곱은 꿈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늘에 닿는 계단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깊은 접촉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올라감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 뵙기 위해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제자들은 변화산에 올라 비로소 예수님의 신적 모습에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올라감‘의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육신 사건은 ‘내려옴’의 모티프를 사용합니다. 빌립보서는 자기를 비우고,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겸비한 모습에 주목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오심이야말로 구원의 신비입니다.

내려오신 분이 올리우신 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은 이 꼴 저 꼴 안 봐도 좋은 저 절대의 세계에 들어가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늘에 오르심으로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영고성쇠(榮枯盛衰)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꽃이 피고, 마르고, 채워 풍성하게 되고, 쇠해 줄어드는 일이 반복됩니다. 주님은 더 이상 그런 변화에 종속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공간의 제약조차 넘어섭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28:20b). 주님의 이 약속은 주님이 하늘에 오르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승천을 기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위대한 대제사장
히브리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을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제사장은 머리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릴 때 입는 옷은 그들의 직무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소를 떠나거나 더럽히지 말아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물을 바쳤습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들을 대변하고,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경계인입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분명히 대제사장의 직무를 떠올리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서러운 이들의 아픔을 온 몸으로 부둥켜안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백성들 앞에 여실히 드러내셨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취약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그들의 아픔은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기만 해도 위안을 받은 느낌이 드는데, 주님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시는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주님과 만난 이들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의 가없는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대제사장인 까닭은 동물을 희생시킴으로 우리 죄를 씻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제물로 삼아 우리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주님과 무관한 고통은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에 처하면 냉랭한 세상은 우리에게 등을 돌리거나 더 물어뜯으려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기에 지금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은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지만, 삶이 힘겹다, 절망스럽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쉽게 절망에 빠질 수 없는 법입니다.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라는 영화를 저는 잊기 어렵습니다. 영화는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마을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쿠르드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아윱은 소년 가장입니다. 어머니는 막내를 낳다 죽었고 아버지는 먹고 살기 위해 밀수에 나섰다가 지뢰를 밟고 죽었습니다. 그의 형 마디는 열다섯 살이지만 정신과 육체가 세 살 아기 상태에 머물고 있는 장애인입니다. 마디는 때마다 주사를 맞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아윱은 형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어른들을 따라 국경 밀수 행위에 가담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국경지대의 겨울 추위는 혹독해서 짐을 싣고 다니는 말들도 술에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밀수꾼들은 말에게 술을 먹여 추위를 견디도록 했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참혹한 상황을 보여주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 구석 따뜻함이 배어드는 것은 마디를 돌보기 위해 어린 가족들이 보여주는 훈훈한 사랑 때문입니다. 존재 자체가 거추장스러운 마디이지만 아윱과 여동생 아마네는 한 번도 그를 귀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아마네는 오빠에게 끝없이 입을 맞추고 말을 건넵니다. 오빠를 안고 다니며 시간에 맞춰 약을 먹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마디를 안고 부모의 무덤에 가서 비석을 붙잡고 신께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큰 누나 로진은 동생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나이 많은 남자에게 기꺼이 팔려갑니다.

이 영화는 절망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희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연약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절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이들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절망의 늪에 빠져들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아딧줄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대제사장인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올리우셨기에 주님은 더욱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그 사랑의 자장 안에 머물고 있는 한 우리는 외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식구입니다. 그렇기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우리 신분의 변화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엡3:12)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하여 함부로, 무례하게 처신해도 괜찮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우리의 무례함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거룩 앞에 나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16절은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 앞에 생략되었으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머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 우리 속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빚어지기 위함입니다. 그 뜻이 우리 속에 채워지면 우리가 구하는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뭔가를 채워달라고 하던 기도가 자기 비움을 위한 기도로 바뀌고, 사랑받기를 구하던 기도가 사랑에 무능력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로 바뀌고, 나의 영광을 구하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로 바뀌고, 평안을 구하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달라는 기도로 바뀌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던 기도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로 바뀝니다.

이런 기도를 바치며 살 때 우리는 영적인 자유함을 경험합니다. 우리를 휘몰아치던 세상의 서슬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이 우리 속에 들어섰음을 알 게 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것을 적절한 시간에 값없이 베푸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실감하게 됩니다. 고통과 슬픔은 쓰리고 아프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의 연민에 삼키워졌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 심장의 고동처럼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 바로 그곳이 주님의 은혜의 보좌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늘에 오르신 대제사장이 계시기에 우리는 지금 담대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식구가 되어 산다는 것처럼 마음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이 믿음으로 고통 많은 세상에 희망을 파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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