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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세상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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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5월 09일 (일) 12:23:39
최종편집 : 2021년 05월 09일 (일) 12:24:29 [조회수 :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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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세상의 기초
창 2:4b-9
(2021/05/09, 부활절 제6주)

음성으로 듣기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품이 사라진 시대
사랑과 은혜로 세상을 돌보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가정의 달인 5월, 교우들의 가정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시기를 빕니다. 제게는 아름다운 가정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이미지 혹은 언어가 있습니다. 둥지, 보금자리, 품 등이 그것입니다. 새들은 알을 낳고 부화시킬 둥지를 짓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여러 가지 재료를 물어다가 얼기설기 엮어 생명의 보금자리를 짓습니다. 둥지의 바깥은 더러 투박해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안쪽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새들은 그 곡선을 만들기 위해 수 천 번이나 턱으로 문지른다고 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키우기 위한 사랑의 수고입니다.

우리 시대를 가리켜 품이 사라진 시대라 말합니다. ‘품’은 웃옷을 입었을 때 가슴과 옷과의 틈을 이르는 말이지만, 안거나 안기는 것으로서의 가슴을 뜻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 자주 보았던 광경이 떠오릅니다. 마당에서 놀다가 솔개 그림자가 휙 지나가면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구우~구구’ 입소리를 내 닭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병아리들을 데리고 마당가 도랑이나 밭을 뒤지던 암탉들도 그 소리에 반응하여 황급히 닭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날개를 벌려 병아리들을 품었습니다. 그 작아 보이는 날개 아래 10여 마리가 넘는 새끼들이 다 안겼습니다. 남극의 펭귄들도 알이나 새끼를 제 발 위에 올려놓고 배의 깃털로 덮어줌으로 혹독한 추위로부터 여린 생명들을 지킵니다. 생명의 기초가 돌봄임을 그 광경들은 보여줍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은 ‘어머님의 품’을 늘 그리워합니다. 사방에서 우리를 벼랑으로 밀어대는 것 같은 세상,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다가 힘에 부칠 때마다 우리는 따뜻한 품을 그리워합니다. 이원수 선생님이 가사를 쓴 ‘고향의 봄’에 담긴 정서를 요즘 젊은 세대가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고향 혹은 품은 언제나 그리움의 저편에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너무나 많은 가정이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가정을 더 이상 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위기 청소년들이 늘고 있고, 학대받거나 방치된 아이들도 많습니다. 가정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속에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 고단한 세상을 이길 힘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성경에 길을 물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의 기초로 세우신 기둥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서로-함께 공동체
창세기 1장과 2장은 인간 창조 이야기를 각기 다르게 전합니다. 먼저 1장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1:27).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 인간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켜 보이는 일종의 텍스트라는 말입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사람들은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세계관을 반영한 말입니다. 자연을 닦달한 결과 인간은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정신은 점점 빈곤하게 되었습니다. 경탄과 경외심, 공경의 마음, 신성한 것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창조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 땅 위에 비가 내리지 않아 나무도 풀도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그가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토기를 만들며 생활하던 신석기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느샤마(neshamah) 곧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숨 쉬는 인간인 네페쉬(nephesh)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숨을 쉬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 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장에서 창세기 기자는 창조 이전의 상황을 황무지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번째 생명으로 소개합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인간이 모든 피조물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산을 맡아서 돌보는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시고는, 먼저 흙으로 각종 동물을 빚어 만드신 후 그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 사람이 이르는 것이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담의 쓸쓸함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것으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담이 부른 사랑 노래가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2:23)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다는 말을 시간의 선후로 이해하여 계급 관계로 치환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진실은 사람은 서로에게 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나의 있음은 그대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되겠습니다. 이게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이고, 그 핵심은 사랑입니다. 인간이 돌멩이와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돌멩이는 자기 충족적입니다. 존재하기 위해 다른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늘 다른 이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사랑은 자기를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가정은 바로 이런 무제약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훈련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물론 그 사랑은 더 큰 세계에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일하라고 요청받은 인간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에 두신 것은 동산을 맡아서 돌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은 인간의 꿈이 반영된 곳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삶은 힘겹습니다. 안팎으로 다가오는 도전에 맞서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들은 사나운 짐승들이나 자연재해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습니다. 우리 사정도 다를 바 없습니다. 자연재해는 여전히 우리 삶을 위협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역사의 부정성이 다 사라진 곳에 대한 꿈은 유사 이래 계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 샹그릴라, 무릉도원 등은 에덴 동산과 더불어 인류의 꿈이 녹아든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이미지로 말하자면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입니다. 에스겔의 이미지로 말하자면 강 이쪽과 저쪽에 온갖 종류의 과일이 자라고, 그 잎도 시들지 않고 열매도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에덴 동산을 그렇게 그리지 않습니다. 에덴 동산이 아름다운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는 풍요로운 장소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접속을 유지하며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본연의 사명은 가꾸고 돌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힘겨운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일‘ 하면 지긋지긋하게 느끼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도 일을 많이 해서 손가락이 휘어진 농부들이나 목수의 손을 볼 때마다 안쓰럽습니다.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이 일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일에서 해방되어 느긋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싶은 인간의 염원을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본래 일은 저주가 아니라 복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일하라고 요청받은 것은 사람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성을 선물로 주셨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창조 행위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작동합니다. 하나는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이 없다면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상상한 것을 현실로 만들려는 의지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인간도 상상력과 의지를 통해 세상을 돌보아야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로 여길 때 직업은 소명이 됩니다. 진부한 말로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의 동산을 돌보고 가꾸는 마음으로 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아름다운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한 의지를 발휘해야 합니다.

위기 청소년들을 돌보는 분들을 보며 마음에 깊이 감동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이들은 일부 청소년들의 거칠고 무례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젓지만 그분들은 그런 모습 뒤에 숨겨진 아이들의 연약하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봅니다. 그리고 인내하는 사랑을 통해 그것이 발현될 수 있도록 돌보아줍니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고, 자기를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적인 일이 아닐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서 주신 땅’(시16:6), 하나님이 ‘머물러 있는 땅’(민35:34)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 말을 오해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나 주택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분은 안 계시겠지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생명을 풍부하게 하고, 평화의 기운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가정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 일에 충실할 때 가정은 건강해질 겁니다.

∙가정의 중심
이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에덴 동산 한 복판에 서 있던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는 물론 불멸성의 상징입니다.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하늘로 가지를 뻗은 나무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령스런 존재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단군 신화에서도 환웅이 환인의 허락을 받아 천부인 3개를 받아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내려온 곳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라고 합니다.

생명나무를 뭐라 딱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임은 분명합니다. 에덴 동산 한복판에 서 있는 생명나무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흙에서 온 존재임을 상기시킨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일 뿐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 한계를 지킬 때, 분수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인간은 자유롭고 안전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언제나 선한 충동과 악한 충동 사이에서 바장이다가 위험에 빠지곤 합니다. 끊임없이 경계하고, 안내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가끔 눈을 들어 생명나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에 따라 내 삶을 조절할 수 있을 때 삶은 든든해집니다.

가정의 중심에 생명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복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긋난 길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인내할 때 가정은 따뜻해집니다. 가족들로 인해 가슴앓이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족간 갈등의 상당수가 서로 바라는 바가 많기 때문에 빚어집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먼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지나치게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나무를 중심으로 가정이 일치를 도모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이런저런 계산을 앞세우다 보면 가정의 평화는 깨지게 마련입니다. 엊그제 양재성 목사님을 통해 알게 된 시가 있습니다. 진은영 시인의 ‘가족’입니다.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게 꽃이나 화분 이야기가 아닌 줄 다 아시지요? 밖에서는 나름대로 좋은 동료요 친구요 이웃인데, 집에만 들어가면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태도로 일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서로 바라는 바가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끼리라도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구하기보다는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고마워해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에 생명나무를 모셔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고, 각자에게 품부된 일들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로 여겨 성심껏 수행하고, 하나님을 모든 관계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가정은 사랑의 둥지, 품이 됩니다. 주님의 은총이 모든 교우들의 가정마다 넘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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