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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9세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사이비 사적 계시 Ⅱ제1차 바티칸 공의회 사적 계시, 성인 비안네 신부 라 살레뜨 사이비 발현 반대
이용섭  |  lys9791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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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1월 18일 (토) 00:00:00 [조회수 :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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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9세 사적 계시 쫓다 자기가 판 구덩이에 빠져

천주교회는 자신들의 불리한 증거들을 잘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가끔 공개하기도 한다. 사적 계시를 좋아했던 교황 비오 9세가 라 살레뜨 동정녀 마리아(?) 발현이라는 ‘사이비 사적 계시’에 힘입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의 교리를 선포했었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세상 종말 때까지 온 천하에 웃음거리가 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비오 9세는 자신의 교황재임 중인 1847년에 소위 ‘기적의 메달’ 동정녀 마리아 발현(1830년)을 인준했고(성모님께서 기적의 메달을 보여주신 침묵의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 54쪽), 1862년에는 루르드 동정녀 마리아 발현(1858년)을 인준했다(한국가톨릭대사전, 루르드의 성모). 이 두 발현은 모두 다 무염시태의 교리를 가지고 나타났다.

비오 9세는 1854년 12월8일에 공의회의 의견을 거치지 않고 교황 개인 자격으로 무염시태의 교리(교의)를 교황청에서 선포했다. 물론 당시 거기에는 들러리 노릇을 한 54명의 추기경들과 140명의 주교들이 있었다.

이 무염시태 교리 선포 전에 비오 9세는 전세계 주교들에게 이것에 대한 의견을 서면으로 물었는데, 찬성자는 536명, 반대자는 4명, 조건부 찬성자는 36명이었다.

<필자도 이 교리에 대한 입장이 조건부 찬성이고 이 두 발현이 사이비 사적 계시라고 단정할 자신이 없다.>

동정녀 마리아 발현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전설(구전)로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것은 주후 40년 경의 스페인 사라고사(zaragoza) 동정녀 마리아 발현이고 정통고대교부가 기록으로 남긴 가장 오래된 것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332-395)가 쓴 ‘기적행사자 그레고리(우스)의 생애’라는 책이다. 이 기적행사자(thaumaturgus) 그레고리(우스. 213-270)는 유세비우스(에우세비오)의 교회사에도 여러 번 등장하고 정통고대교부들의 범주에 들어가는 분이다(예, 죤 캘빈).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분과 동시대인이었고 또한 그를 잘 알았던 자신의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책을 남겼는데, 거기에서 이 정통 고대교부가 굉장한 기적을 무수히 행했었고 심지어 사도 요한과 함께 나타난 동정녀 마리아의 발현도 체험했다고 쓰고 있다<(필자 영역본 소장)>.

그러므로 동정녀 마리아 발현이라고 해서 함부로 사이비 사적 계시라고 치부하거나 매도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발현의 진위여부를 판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과 정통 고대교부에 의해서 이다.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의 교리는 이것들에는 결코 없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을 정죄한 천주교회의 트렌트 공의회(1545-1563)는 공적 계시, 즉 반드시 믿어야 할 교리(교의)가 성경(성서)과 성전(전승. 정통고대교부)에서만 나온다고 선포했다. 그렇다면 트렌트 공의회에 반대되는 교리를 선언했던 비오 9세를 천주교회의 성인 반열에 올리기 위해 끈질긴 시도를 해 오고 있는 자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세기의 승리자-교회의 어머니’ 52쪽에는 “교황 비오 9세는 라 살레트의 성모님 발현을 인정했으며, 그의 후계자 레오 13세는 성모님이 발현하신 산 위에 대성당을 건립하였다. 발현하신 지 5년이 지난 후 교황 비오 9세는 성모님이 그 두 어린이에게 따로따로 말씀하신 비밀을 알고자 했다. 어린이들은 자기들은 자기들의 편지가 봉인된 채 직접 교황에게 전달될 것을 조건으로 비밀을 써 보내겠다고 말했다. 막시맹(막시민)은 간단하게 썼기 때문에 금방 다 써 버렸다. 멜라니는 좀 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쓰는 도중 멜라니는 ‘무류권’(무류성)이 무슨 뜻이며 ‘그리스도의 반대자’(적그리스도)의 철자는 어떻게 하느냐는 등의 질문을 했다. 두 통의 편지는 그르노불 교구의 루셀로 신부와 게랭 신부에 의해 교황청으로 전달되었다.
1851년 7월15일 이 두 신부는 교황 비오 9세를 알현했다. 교황은 책상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손을 내밀어 두 신부로 하여금 자기의 반지에 입맞추게 했다. 교황은 두 신부의 손에서 봉인된 편지를 받아 연 후 막시맹의 편지를 뜯었다. 읽으면서 교황은 미소를 지었다.”라고 쓰여져 있다.

또한 이 책 54쪽에는 “교황의 무류권(멜라니가 몰라 물어 보았던 말)에 관한 교의는 1870년에 선포되었다.”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 책 55쪽에는 “1946년은 라 살레트의 성모 발현 1백주년이었다. 그 날을 일컬어 교황 비오 12세는 눈물의 마돈나(마리아)께서 우리 인류에게 하느님이신 당신의 아들께 향한 회두의 길로, 그리고 엄위하시고 영원하신 군주를 거역하는 허다한 죄인들을 위한 보속의 길로 분연히 접어들라고 간청하시기 위해 1846년 9월19일 그 축복받은 오후에 발현하신 1백주년이라 불렀다.”라고 기재되어져 있다.

이 비오 12세(교황 재임기간. 1939-1958)가 1950년에 몽소승천(성모승천)을 천주교회의 믿을 교리(교의)로 선포한 인물이다.

‘나는 거룩한 어머니이다 - 성모 마리아 발현 순례지를 찾아서’(성바오로출판사) 45쪽에는 천주교회의 성인 반열에 오른 비안네(1786-1859) 신부가 라 살레뜨 동정녀 마리아(?) 발현을 반대했다고 나와 있다. 이 비안네 신부는 프랑스인이고 기적행사자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 발현의 환시자(체험자)들 중 하나인 막시맹(막시민)이 알콜 중독자로 생을 마쳤다는 설도 있지만 현재로써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19세기와 20세기는 천주교회에게 불행하고도 비극적인 시기였다. 왜냐하면 사적 계시를 애호하는 교황들이 적지 않게 출현했었기 때문이다. 예수회 신부인 클라우스 샤츠 교수는 자신의 ‘보편공의회사’(분도출판사) 265쪽에서 “그러나 300년 뒤에야 주교들의 공의회가 열렸고, 공의회(제1차 바티칸)는 트렌토에서는 생각도 못했던 방식으로 교황의 특별한 권한(수위권과 무류성)을 교의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즉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16세기 트렌트 공의회에도 어긋나는 교리를 선포한 것이다.]

필자 주, 위 글 중 <...>는 교회연합신문 발행인 강춘오가 제 멋대로 내 원고를 삭제시킨 부분이고 [...]는 강춘오가 자기 마음대로 내 원고에 만들어 넣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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