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자산어보》 (2019)

《황산벌》, 《왕의 남자》, 《사도》, 《동주》, 《박열》. 특히나 역사물에 일가견이 있는 이준익 감독의 신작 《자산어보》가 마침내 공개되었다. 윤동주의 삶과 시를 그린 영화 《동주》처럼 과감하게 흑백의 미학을 택하였으며 그리하여 한 폭의 수묵화에 비견되기도 한는 이 영화는 많은 역사학자들과 영화인들로부터 상찬을 받고 있는 중이다.

영화는 조선말기 실학의 중심이었던 정약용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약용이 누구던가? 철학과 문학과 공학을 넘나들며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릴 만한 최고의 실학자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으로 마땅해 보이는 정약용을 비켜 그의 둘째 형이었던 정약전에게 시선을 던진다. 정약전이라니,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기에 감독은 그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정약용은 강진을 중심으로 한 18년의 유배생활 동안 교과서에서도 익히 들어온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무려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의 16년 유배생활 동안 고작 물고기 백과사전인 『자산어보』 한 권만 달랑 남겼을 뿐이었다. 도대체 한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을 만한 무슨 특별한 점이 이 사내에게 있을까?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가 왜 주인공이어야 했는가에 대한 이유들이 납득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먼저 정약전이 정약용에 준하는,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애초에 정적들은 정약용을 오지 중의 오지인 흑산도로 보내고 정약전은 강진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심문 과정에서 그들은 정약전이야말로 더 위험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귀양지를 바꿨다. 심지어 정조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도 있다. “정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 하지만 정약전의 뛰어남은 무엇보다 그에 대한 정약용의 태도로부터 분명하게 증명된다. 그는 자신이 쓰고 있는 저술들을 제자를 통해 형에게 보내며 일일이 감수를 받았다. 그리고 형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정약용은 자신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음을 한탄했다. 정약전은 정약용이 인정한, 자신의 사상을 검증해줄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정약전은 왜 16년 위배생활 중 달랑 한 권의 책을, 그것도 물고기 백과사전이나 썼을까? 이준익 감독은 ‘왜 정약전은 정약용이 500권을 썼을 동안 단 한 권밖에 못 썼나?’가 아니라, ‘왜 정약전은 충분히 쓸 수 있었던 500권을 안 쓰고 단 한 권만 썼을까?’로 생각의 방향을 돌린다. 영화 속에서 정약전은 세상을 개혁해보겠다는 흑산도의 제자 창대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긴다. 임금이 없는 세상, 서자가 없는 세상을 말하면서. 이 무서운 사상에 창대는 몸서리를 치며 스승과 거리를 둔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 어쩌면 정약전의 모든 것이 숨어 있다고 감독은 상상한다. 그는 창대나 자기 동생 정약용처럼 시스템의 개혁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전복과 파괴를 원했던 것이다. 지금의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세상이 완전히 사라진 새 세상을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것이 가망이 없기에 그는 개인적인 종말론적 실천과 함께 남은 평생을 보낸 것이리라.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물질의 세계에 주목하면서.

그 사상의 근원은 분명 서학, 즉 기독교의 사상이었다. 조선은 세계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실학자들을 통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들여온 나라였다. 그러나 주자의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대에 서양으로부터의 학문인 서학(西學) 기독교는 곧바로 사악한 학문인 사학(邪學)으로 정죄되었다.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약용 3형제는 세례를 받았고, 그들 중 정약종과 조카사위 황사영은 순교를 당했다. 비록 배교로 목숨을 건져 유배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약전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영화는 곳곳에 암시한다. 영화는 창대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알려주는 정약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썩어빠진 나라를 고쳐보리라던 조선 실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학의 중심사상은 아마도 갈라디아서 3:28절의 말씀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임금도 없고 상놈도 없는, 인간 사이의 계급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답게 정약전은 상놈인 창대와 스스럼없이 사귀었고 그를 자신의 책 자산어보 서문에 공동저자처럼 명기했다. “섬 안에 장덕순, 즉 창대라는 소년이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손님을 거절하면서까지 열심히 고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다만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못하였으므로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건만 보고 듣는 것은 넓지가 못했다. 그러나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물고기와 물새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드디어 이 소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 정약전은 상놈이었을 창대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칭한다. 그리고 자선어보에 ‘창대가 말하기를’이라는 구절을 넣는다. ‘공자 말하기를‘, ‘맹자 말하기를’에 익숙한 동시대인들을 향해 정약전은 당당하게 ‘창대가 말하기를’이라 외친다. 자신의 저서에 이런 식으로 타인을 언급한 사람은 일찍이 조선에 없었다.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눅 12:49)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 10:34) 영화는 기독교의 사상이 불온하고도 위험한 사상이었던 시대, 세상에 던져진 불과 칼이었던 시작의 시대를 눈앞에 그려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동시에 그렇지 못한 지금을 함께 돌아보게 해준다. 영화를 보았다면 역시나 정약용보다 정약전에 주목했던 김훈의 소설 『흑산』도 읽어보자. 지금의 한국 교회가 서 있는 자리를 보여주는 데 이 둘보다 더 좋은 참고서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