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최재석 칼럼
게으른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1년 04월 26일 (월) 18:10:57
최종편집 : 2021년 05월 26일 (수) 21:50:52 [조회수 : 1327]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오래전에 3년 코스 신학원을 다닌 권사 한 분이 신학 공부가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 오히려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앙이 퇴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전에는 어느 목사가 부인에게 신학대학 2학년을 마칠 즈음에 자퇴하는 학생들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는 말을 그 부인에게 들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교회에서 배운 것과 교수가 가르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더란다. 

내게 이 이야기를 한 두 사람은 교회에서 배운 것이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옳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면 신학대학은 유명무실하거나 아니면 백해무익하다는 말인가? 그리고 신학대학을 나오고 목사 안수를 받은 목사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교인들은 교회에서 배운 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축자영감설이나 창조과학을 배운 학생에게 신학대학에서 그것이 오류라고 가르치면 교수가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인들은 선교 초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교리나 성경에 관한 지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새로운 것을 거부한다.

한국에 건너와서 복음을 전한 초기 선교사들이 단기 한국어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고 당시 통역자들의 영어 실력도 변변치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의 수가 적어서 각 교회에 나가서 지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수나 장로들이 설교를 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영수는 장로가 되기 전의 임시 직분이었는데, 장로조차 없는 작은 교회에서는 영수를 지명해서 그에게 설교를 맡겼다.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영수나 장로들이 교인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성경 지식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어떻든 그들은 선교사들에게서 배운 대로 축자 영감설을 가르쳤고 성경의 기록을 과학적인 언어로 생각해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지금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축자 영감설에서 나온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경이 과학적인 기록이 아니고 믿음의 기록이라고 말하면서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요즘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사람과 성경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목사들을 비롯해서 교인들이 선배들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성경 읽기에 관해서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공중 나는 새와 길가의 백합화에 관한 비유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선배들에게 배운 대로 성경을 읽는 데서 생기는 오류를 살펴보겠다. 거기서 예수님은 공중 나는 새와 길가의 백합화가 일하지 않아도 그들을 길러주시는 하나님은 그들보다 귀한 우리를 더 잘 보살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비유 이야기는 재물만을 탐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법적 표현이다. 과장법적 이야기의 대표적인 예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비유이다. 이런 이야기에서는 그 이야기에 나오는 것들이 심하게 과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만약 문자대로 받아들이면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이야기가 된다. 낙타의 비유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부자들은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으니 돈을 벌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중 나는 새의 비유에서는 우리가 전혀 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장법적으로 표현된 이 비유에서는 우리가 돈을 벌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거나 일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표가 오직 물질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새는 벌레를 잡고 백합화는 수분과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힘써 일하는 데도, 이 비유 이야기에서는 새와 백합화가 전혀 일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이 일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전자가 오류이기 때문에 후자도 오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비유 이야기에서 말하는 것은 진실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유 이야기를 과장법적 이야기로 이해할 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과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주 심하게 과장된 이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청중은 물론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비유 이야기에 담긴 뜻을 부연해서 설명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런 부연 설명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배운 대로 이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신 후에 마귀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예수님이 답변하신 내용을 상기시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그때 예수님이 신명기를 인용해서 직설적으로 답변하신 것을 여기서는 과장법적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이 비유 이야기에 관련된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우리 교회에서 몽골에 파견한 선교사가 선교 보고를 하면서 이 비유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했다가 어려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다. 주일 예배에서 새와 백합화에 관한 비유 이야기를 본문으로 삼아서 설교했더니, 다음날 두 젊은이가 직장에 사표를 내고 왔더란다. 그들은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고 했으니 이제부터는 직장에 나가지 않고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당황한 그 선교사가 그들을 직장으로 돌려보내느라 이틀 동안 진땀을 뺐다고 했다. 

그 선교사는 그 난처한 일을 당하고 나서야 새와 백합화에 대한 비유적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 전에 아무도 그 과장된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교회에서 배운 대로 이 비유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 비유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와 다른 예수님의 부연 설명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선입견을 가지고 글을 읽으면,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여기서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선교 초기에 받아들인 근본주의적 신학이나 잘못된 성경 해석을 다음 세대가 무비판적으로 답습해 왔다는 점이다. 목사들을 비롯해서 교인들은 교회에서 배운 것이 진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한번 받아들인 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누가 심지어 신학대학의 교수까지도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말을 하면 무조건 거부한다.


성경 번역에 관해서

일전에 보수 교단의 은퇴 목사가 자기는 개역개정 성경에 있는 대로 “있을 지어다”라고 축도를 마친다고, 자기는 ‘성경대로’ 축도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표준새번역 성경에 있는 대로 “빕니다”라고 축도를 마치면 성경대로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번역은 원본의 글을 번역하려는 언어의 어법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의 문화에 맞게 바꾸어 놓는 일이다. 그래서 번역에서 어법과 문화는 아주 중요하다. 개역개정 성경의 ‘있을 지어다’라는 말은 옛날 권위적인 시대에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던 권위적인 어투이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적인 시대이고 특히 개신교에서는 만인제사장주의를 내세우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라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나 축도를 할 때 권위적인 어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어에는 권위적인 어투와 존대어의 구별이 없다. 따라서 성경을 권위적인 어투든 존대어든 해당 문화에 맞게 번역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문화에 맞게 번역하려면 존대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현대인의 언어 습관대로 번역한 새번역 성경이 나와 있는데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새번역 성경을 무시하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권위적인 어투로 번역된 개역개정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이 시대에 “있을 지어다”로 번역하는 것은 엄격히 말해서 틀린 것이다.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이기 때문에 성경 번역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기독교의 경전을 번역한 사람들이 번역의 기본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면 그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가 이 잘못된 번역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단어 선택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보겠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가 채택하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눅 22:19)라고 번역했다. 번역자는 우리가 빵을 먹지 않던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먹었던 빵은 우리의 떡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번역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떡보다는 오히려 빵을 더 많이 먹기 때문에, 이제는 달라진 우리의 문화에 맞게 그리고 원문의 의미와 동일하게 빵으로 바꾸어야 한다. 

‘떡’이라는 번역을 고수하다 보니 성찬식에서 코미디가 연출된다. 집례자는 떡을 나누겠다거나 분병하겠다고 말하면서 카스테라 조각을 나누어준다. 말과 다른 행동을 하면서도 목사의 표정이 자못 진지한 것을 보면 그는 자기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개콘에 나오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진지해야 할 성찬식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일을 보면 열 일을 안다는 속담이 있다.


마치면서

우리는 교수가 오래된 강의 노트를 가지고 강의를 하면 10년 전의 강의 노트를 가지고 가르친다고 그 교수의 게으름을 탓한다. 학문이 빠르게 변화 발전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지적이다. 옛날 것을 답습하는 교회의 성경 공부나 교리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일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옛날에 배운 것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5백 년 전에 개혁자들이 말한 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처럼 가르친다.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은 동일하지만, 과학이나 인문·사회학이 변화 발전함에 따라서 현대에 와서 성경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 우리는 전에 보던 것과는 달리 성경을 보게 되었다. 성경에서는 지구의 역사가 6천 년이라고 하지만, 과학자들이 지구의 역사가 약 45억 년이라는 것을 발견해낸 지금 성경에서 말하는 6천 년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고 신앙에 관한 책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 과학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한 자 한 자 기록한 책이 아니고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전해 내려오는 자료들을 모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간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는 문학을 외면하던 교회가 문학을 받아들여서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자존감이 높아짐에 따라서 전과는 달리 성경에 기록된 인간의 의지나 행위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신앙의 변증자 C. S. 루이스는 『스쿠르테이프의 편지』의 25번째 편지에서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사는 존재라서 변화를 경험하게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화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불변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어서 변화를 사랑하는 마음과 균형을 맞추어 놓았다.” 루이스는 성경에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은 성경에 담긴 불변하는 진리와 삶에서 경험하는 변화를 결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교학에서는 설교의 말미에서 성경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라고 말한다. 2천 년 전에 선포된 말씀이 현재에도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는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이나 신약의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오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신학자들이 5백 년 전에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성경을 이해한 것 혹은 150여 년 전에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에 관한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지 말고, 그것을 현대인의 안목에서 재고해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고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성경에 관한 새로운 견해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가운데에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배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그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지 않고 그것을 땅에 묻어놓았다가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이라고 질책당했다. 

논어에는 ‘학이불염 회인불권(學而不鹽 誨人不倦)’, 배움에 싫증 내지 말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게을리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배움을 게을리해서 우리의 가르침이 현대인의 지적 수준에 맞지 않으면, 현대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게 된다. 그러면 교인 수가 줄게 마련이다. 요즘 교인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주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 예수님께서 크게 노하실 일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듯이 게으른 자들을 질책하실 것이다. ‘게으른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구나.’ 

 

최재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158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