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동주

<시인 동주> 안소영, 창비

시인은 지도 밖에서 태어났다. 1917년, 아직 대한독립선언이 울리기 이태 전 대한의 지도 밖 명동에서 윤동주가 태어났다. 명동은 동쪽(東)을 밝힌다(明)는 뜻으로 두만강 건너 간도에 윤동주 일가가 참여해 일군 마을이다. 명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명동교회에서 성경을 읽었다. 지도 밖에서 태어나 살고 지도 밖 사상을 흡수하며 윤동주는 자랐다. 

당시 대한 사람 중 누구도 지도 안에 살지 못했다. 나라의 주권을 일본 제국에 넘겨 버린 후, 어디라도 이전에 살던 땅이 아니어서, 고향도 낯설었다. 고향에서도 고향 말을 할 수 없었고 고향에서도 제 이름을 부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일본 말이 국어였고, 일본 역사가 국사였고,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해야 하는 세상이라 이전에 알던 대한의 지도는 땅 모양만 같을 뿐, 사실상 일본의 지도였다.

특히 윤동주가 십 대였던 1930년대는 일본 제국이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던 엄혹한 시절이라, 일제는 이전보다 더 대한 사람들을 괴롭혔다. "괴로웠던 사람 예수 그리스도"처럼 동주도 괴로웠다. 

괴롭고 슬펐다. 슬픈 자신을 위해, 또 모든 괴롭고 슬픈 사람들을 위해, 동주는 예수님이 하셨듯 복을 선포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슬픔이 복이라면, 영원히 슬퍼하는 거야말로 지극한 복인가. 

일본 제국이 깐 철로를 따라 빼앗긴 농부들의 땀 밴 쌀이 실려 나가니, 슬프다. 만주를 삼키고 중국 본토까지 침략한 일본 군대가 죽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슬프다. 군인들의 성노예가 되었던 여성들의 고통 때문에, 슬프다. 탄광에 배를 붙이고 들어가 석탄을 캤던 징용 노동자들의 처지가, 슬프다. 우리말을 쓰면 교사에게 뺨을 맞아야 했던 어린 학생들의 교실이, 슬프다. 본래 이름을 지우고 원치 않는 발음으로 내 이름을 쓰고 불러야 하니, 슬프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한 나를 부정하고 황국신민이 되기를 아침마다 다짐하는 건, 슬프다. 몸에 스민 모국어가 샘이 되어 솟아도 우리 말로 시를 발표할 수 없는 건, 슬프다. 

동주는, 동주가 살았던 시대는 슬펐다. 제국에 굴종하지 않으면, 슬펐다. 굴종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굴종하니, 슬펐다. 동주의 십 대는 슬펐고, 슬퍼야 했다. 일본 제국이 영원하다면, 영원히 슬퍼하는 게 복이었다. 동주는 기꺼이 슬퍼하기로 한 것이다. 슬프게도 동주는 일본군으로 징병되지 않으려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오던 중, 슬프게도 일본 특고 형사에게 체포돼 조선민족주의 학생동맹을 결성했다는 죄로 후쿠오카 감옥에 갇히고, 감옥에서 동주는 생체 실험의 제물이 된다.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시달리다가 해방되던 해, 1945년 2월 16일, 동주는 죽었다. 일본 제국 치하에서 영원히 슬펐던 동주는, 복 있는 사람이다. 

동주만큼 슬프지 않다면, 지도 안에 살기 때문이다. 지도 안에서 마냥 편안하다면 어떤 제국에 굴복한 까닭일 거다. 지도 너머에 가야 할 땅이 있다. 고향이 있다. 지도 안에서 슬프지 않다면, 다시 슬퍼하자. 시인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김영준 목사 (민들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