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소문없이 스며들었던 봄은 이제 눈에 띄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흰색에 초록빛을 살짝 띄는 매실나무 꽃은 봄햇살이 가득했을 때 더더욱 눈부신 자태를 뽐낸다. 작년에 만개했던 앵두꽃은 4월의 잔인한 날씨에 냉해를 입고 열매 하나 맺지 못하고 스러졌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붉은 기운을 띄는 꽃눈을 가지마다 쪼로록 틔우고 있다. 향기 가득한 히야신스와 라일락도 제법 굵은 새순을 맺었고, 마을의 목련은 탐스럽게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있다. 지천에 깔린 달래는 이미 캐어 간장에 송송 썰어 넣고 김에 싸서 먹으니 그 맛이 진정 봄내음이었다. 하나 둘씩 피어오르는 생명들의 가락은 곧 사월이 오면 더더욱 4부 혼성 합창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파고 들 것이다. 

이제 나도 슬슬 올 한해의 농사를 위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우내 웅크렸던 몸을 펴고 뒤안의 작은 텃밭을 매만졌다. 두어평 되는 공간이지만 그동안 닭들과 고양이들의 화장실로 방치하였다가 올해는 기어이 호미를 들어 정리했다. 한두 해 거름으로 묵힌 밭이라 흙이 곱고 포실하고 기름졌다. 뒤안의 텃밭은 집에 가까운 곳이니 상추나 파와 같이 음식에 요긴하게 쓰이는 작은 작물을 심을 예정이다. 이제 거의 9년 차로 접어든 농부인지라 내가 한철 먹을 양을 가늠할 수 있기에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 한다. 혼자 생활하다 보니 그날 식탁에 오르는 것은 제한되어 있고 먹는 양도 극히 소량이라 이전처럼 무지막지하게 쌓아놓지 않으려 한다. 이웃들도 거의 집에서 나처럼 소량으로 밥상의 반찬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이웃에 나눠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런 경험으로 올해부터는 내가 즐겨먹는 것을 위주로 심기로 했고, 또 내가 심지 않은 작물은 로컬푸드에 가면 언제든지 소량으로 저렴하게 구입하기로 했다. 농사도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를 일찍 터득하면 몸도 마음도 여유로울 수 있다. 나는 드디어 올해 그 지혜를 깨닫고 그 지혜를 따라 지내려 한다. 

논농사 준비가 시작됐다. 작년 여름 내내 내린 비로 논둑이 많이 훼손됐다. 그리고 점차 농사를 짓는 손길이 줄어들면서 우리가 공동으로 짓는 논 주위의 논들도 경운을 멈추게 되면서 공교롭게 그 논의 물이 우리의 논으로 유입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 논이 곤죽이 되었다. 그래서 작년에 이앙기와 콤바인이 논에 빠져 사람이 직접 모를 심고, 벼를 베는 극한 경험을 해야 했다. 올해는 그 수고를 덜기 위해 일찌감치 몸을 움직였다. 먼저 포크레인으로 물길을 만들고, 논둑을 보강했다. 물길을 만들고 보니 논에 흘러들어온 물이 상당했다. 그동안 모를 심을 때마다 ‘쉬’가 지나가는 자리에 잘못 발을 디디면 허벅지까지 빠진 뒤에 간신히 풀을 잡고 올라와야 했다. 그러면 물장화 속으로 차가운 물이 스며들어 일의 속도는 더디고 몸은 천근만근이 되어 논일을 마칠 때까지 마음에 험한 소리를 담고 있어야 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나! 포크레인이 지나가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역시 자본을 투자하니 몸과 마음이 편하다. 비록 돈이 들기는 했지만 이 또한 농사를 위한 지혜다. 

포크레인이 지나가면 사람의 손길이 머물러야 할 곳이 있다. 돈을 주고 기계의 힘을 빌리는 것은 편리한 측면이 있지만, 소비자의 욕구를 100% 만족시켜주진 못한다. 포크레인으로 논둑과 논비탈, 물길을 큼직하게 보수를 했지만 논둑과 물길 사이의 흙을 다져주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이때 삽질의 위력이 발휘된다. 군대를 다녀온 목사님과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집사님 그리고 군대도 다녀오지 않았고 여자인 나. 이렇게 셋이서 작업을 했다. 차라리 밭이라면 삽질이 편했을까. 물을 잔뜩 머금은 뻘과 같은 흙을 퍼 나른다는 것은 마치 솜뭉치를 등에 메고 좀더 가볍게 만들려고 물에 빠지다 결국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된 당나귀 꼴과 같은 것이다. 대여섯번 삽질을 하고 나니 숨이 턱턱 막혔다. 삽자루도 곤죽에 휘말려 흙을 퍼 담을 때마다 손바닥이 미끈거렸고, 물을 잔뜩 먹은 흙은 팔목을 시큰거리게 했다. 물장화를 신은 발바닥은 삽날을 밟을 때마다 아팠다. 중간에 잠깐 쉬어 마시는 물이 어찌나 달달한가. 입에 문 초코파이와 믹스커피는 온몸 구석구석의 혈관을 통해 쏜살같이 달려가 힘을 보충해 주었다. 봄바람이 시원하게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몸의 피로가 극으로 향하여 헛삽질이 나타날 때 뒤를 돌아보니 아,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협력의 결과물이 눈에 나타났다. 비록 번듯한 구조물은 아니지만 우리의 극한 삽질로 올 한해 논농사도 거뜬히 해낼 수 있다는 기대와 기쁨이 솟아올랐다. 

이제 볍씨 소독과 파종을 하고 모자리를 내고 모를 심는 과정들이 있다. 식탁에 오르는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매년 무한반복 극한 일을 벌이고 있지만, 생명이 주는 기쁨과 감사로 우리의 노동의 댓가는 충분하다. 더불어 쉰내 나도록 땀을 흘리고 난 뒤 먹는 밥상과 밥상을 무르고 잠시 찾아오는 꿀잠으로도 고된 삽질의 보상은 충분하다. 이 맛에 나는 올해도 농사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