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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로마서를 올바로 읽었는가?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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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2월 24일 (수) 23:13:31
최종편집 : 2021년 04월 17일 (토) 04:32:44 [조회수 :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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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자 루터는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유의지를 내세우는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노예의지를 주장했다.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면 사탄에게 봉사할 의지 즉 죄를 지을 의지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을 인간의 전적 타락을 내세운 칼빈이 지지하고 나섰다.

그런데 영문학자이며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자인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그것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전적 타락의 교리를 믿지 않는다고, 인간의 본성에는 선한 것이 많다고 말했다. 그리고 『순전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선한 일을 할 수도 있고 악한 일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교리에 따르면 루이스의 이런 발언은 분명히 이단적이다. 많은 사람이 그를 기독교 신앙의 변증자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이단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을 그렇게 보는지 납득할 수 없다. 

그러면 루터가 큰 관심을 보인 바울의 로마서에서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율법과 인간의 죄성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다고,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의인은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신령한 율법을 주셨지만,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이 정한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다. 그중에 하나만 지키지 못해도 죄인이 된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려다 보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만 드러난다. 육에 속한 인간이 그 많은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로마서의 기록은 개혁자들이 내세운 인간의 노예 의지와 전적 타락을 뒷받침해준다. 개혁자들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린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서 루터는 인간이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고 노예 의지를 내세우면서, 선을 행하고 싶어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믿음과 새 생명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다고 말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사망에 이르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영을 따르는 자는 생명에 이른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롬 8:14)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양자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형상을 따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정죄할 사람이 없다고 믿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주를 믿지 않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자격과 사고와 능력을 지닌 거듭난 사람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주 안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말했고(11: 11-12), 갈라디아서에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고 말했다(3:28). 남녀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선언은 당시로서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선언에서 바울이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주를 믿지 않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신분의 사람이라고 믿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바울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5:14)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새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예수를 믿은 사람도 육신을 지녔기 때문에, 여전히 육의 유혹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성령의 인도와 자신의 결단으로 그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전형적인 예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본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육신의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피땀을 흘려 기도했지만, 결국 그는 육신의 유혹을 떨치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선한 길을 택했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노라”(14)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16장에 가면,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19)라고 말했다. 여기서 바울은 주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아직 육을 따라서 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롬 2:6-7)을 허락하신다고 말했다. 여기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주 안에 있는 사람이다. 육신에 속한 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이 요구하는 선을 온전히 행할 능력이 없지만, 주 안에서 영을 따르는 자가 “참고” 노력하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2장에 행함과 함께 ‘선’이 언급되어 있지만,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러나 12장에서는 “분별하도록 하라”,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등의 명령형이 띄엄띄엄 나오다가 14절 이하에서는 절마다 명령형이 나온다. 명령을 듣는 사람은 그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고 따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한다. 따라서 명령에서는 듣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전제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라고 권면했고, 13장에 가면 “선을 행하라”(3)라고 명령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면한 것은 그가 주 안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로마서 12-16장에서 명령형의 문장이 반복되고 행함과 선이 언급된 것은 그에 앞서서 강조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다르다. 이 점에 주목해서 12-16장은 바울의 글이 아니고 후대의 사람이 삽입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울이 선을 행하라고 권면한 것은 여기서만이 아니다. 그는 갈라디아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라고 했고, 이어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닌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9)라고 행함을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그 유명한 사랑 장을 써서 사랑하라고 권면했다. 

이렇게 바울이 여러 곳에서 선을 행라하고 권면한 것을 보면, 로마서 12-16장을 바울 자신의 글이라고 볼 만하다. 가톨릭에서는 행위에 치우치고 개혁자들은 믿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 1-11장에서는 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음을 강조하고, 12-16장에서는 믿는 사람은 모름지기 선을 행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믿음과 행함을 모두 받아들였다.


마치면서

개혁자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로마서를 읽으면서 인간이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말에 동감했다. 그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톨릭의 교리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데에 몰두한 나머지 로마서 2장과 12-16장에 기록된 행함을 무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육에 속한 사람에게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듭난 사람에게도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반면 바울은 토기장이를 언급하며(롬 9:21)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인정하면서도, 전도에 힘썼다. 예정론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외면한다. 그러나 전도하는 사람은 전도 대상자가 의지를 발휘해서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받아들이고 결단해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자유의지 면에서 예정과 전도가 상반되는데,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한 바울은 의지적 결단을 요구하는 전도에 더 역점을 두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의 뜻에 따라서 로마서 10장에서 전도하라고 권면했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여기서 예수님도 바울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예정과 전도를 모두 받아들인 것처럼 믿음과 행함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믿는 자는 서로 사랑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그리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기도 했다. 그리고 본인도 선한 싸움을 싸우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바울이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인문학자 루이스가 로마서를 올바로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그를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자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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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15.221.197)
2021-03-05 13:54:39
루터류의 종교개혁은 차라리 종교개악이었다!
헬라어에 능통하지 못한 어거스틴에 의하여
비뚤어지기 시작한 기독교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그 ‘비뚤어짐’이 심화되었다.

리처드 B. 헤이스의 문제작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성서 왜곡에 의하여 탄생된 종교이다.
그 열매를 보아라.
선한 나무가 어찌 악한 열매가 주렁주렁하겠는가?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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