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1월 12일
남들이 휴일이라는 일요일이 내게는 空日
이 공일은 나에게 있어 가장 힘든 날이다.
딱히 어디를 가야할 곳도 없고
아무하고도 약속하지 않는 날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소복히 쌓였을
경복궁 돌담길을 걸어볼꺼나?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나뭇잎은 노랗게 물들었는데 
청와대 길이라서 거리는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어
황금의 융단을 밟을 기대를 접고
내 살던 그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걸었다.

창성동에서 살았던 베티하우스는 벌써 낯이 설고
오대산 약수로 밥을 짓는다는 '多井' 간판은 여전히 붙어있다.

내친 김에 덕수궁으로 갔더니
가을 시화전이 열리고 있어 다행, 운이 좋았다. 
詩心으로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니 오늘이 공일이 아니라
문학의 날....뜻있는 날이 되었다.

나뭇잎 종이에 편지를 써서 붙여놓은 곳이 있다.

덕수궁을 찾은 이들이 여기서 발을 멈추고
소원을 쓰고 사랑을 담아 편지를 써서 붙여놓았는데

한국을 찾은 관광객에게 잠시 가을 정취에 잠기게 했을
서울시의 행정이 문화적이라 호감이 갔다.

나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덕수궁은
원래 成宗의 형인 月山대군 후손의 집이었던 것을
임진왜란때 경복궁이 불타버려 
선조는 임시 이곳을 경운궁이라 하고 行宮으로 삼았다.

선조가 승하하면서 인목대비가 거처하는데
역사책에서 읽은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반목이 대단했다.

훗날, 이곳에서 고종이 승하하니 때는 1919년 1월 21일...
들어도 다 잊어먹는 기억력에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하는 게 있을라고?

분수대 옆에 있는 축 늘어진 벚나무
이름하여 '수양벚나무'라고 하는 이 나무
기이하게도 축 늘어져 있는 게 우스꽝스럽다.

덩치 큰 어른이 어리광 피우는 것 같고 옴살 부리는 것 같아서.

고궁의 뜰을 거니는 일도 오랜만이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혼자 걷는 것도 좋다.

방금 옮겨쓴 시 한 편을 읽는다.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터인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고종황제가 차를 즐기고 음악을 들었다는 靜觀軒
처음으로 전기를 시설했다는 곳이 여기가 아니었을까?

서울시청 마당에서는 노조(?)의 데모가 있어 떠들썩하고
여기 덕수궁에서는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있어
나팔소리 북소리가 지나가는 이를 불러 모은다.

타임머신을 타고 잠시 옛날로 돌아가 고궁을 거닐었더니
피로와 한기가 밀려와
덕수궁 옆 '던킨도너스' 에서 다리를 쉴 겸 허기를 채웠다.

이래서 오늘 6천 6백원의 경비로 하루를 보내
그래서 또 행복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