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를 찾아가는 절기이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3). 사도 바울의 말처럼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전 12:1). 성경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불렀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유대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지혜를 가리켜 ‘하나님의 맏아들’, ‘하나님의 형상’, ‘창조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첫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지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엄성을 이해하고 고백하였다. 철학의 언어를 빌려야 할 만큼 여전히 주현절의 개념은 낯설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 정착하지 못한 교회력이 있다면 교회력에 따라 생활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성탄일과 부활일조차 그날 하루를 축하하는 데 그친다.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절기나, 부활을 예비하는 사순절기와도 신앙의 의미를 연결 짓는 일은 버겁다. 개신교회가 가톨릭이나 정교회와 공통의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 아주 낯설게 느끼는 원인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리스도교 문화권 밖에서 살아온 우리나라의 경우, 교회력은 생각과 생활이 분리 되어 따로 존재하기 십상이다. 당연한 현상이다. 탈농경시대인 요즘 24절기가 달력 속에만 존재하고, 심지어 추석과 설날조차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빛이 바래는 것은 오늘 마주하는 현실이다. 그러니 교회력을 일용할 양식처럼 일용할 생활에서 적용하는 일은 웬만한 훈련 없이 가능하지 않을 듯하다.  

  한마디로 교회력은 하나님의 구원드라마를 구체적인 시간 속에서 재 체험 하는 일이다. 단순한 기억과 기념이 아닌, 사건화 함으로써 내 인생을 하나님 사건의 일부분이 되게 하는 것이다. 더글라스 밀즈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시간에 참여함으로서 우리가 하나님 이야기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날들(년, 월, 주, 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게 된다”고 말한 배경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대체로 1582년에 정한 그레고리력을 사용한다. 이 달력에 따라 새해를 맞이하고 생일을 기념하며, 개인이든 국가든 서로 약속을 한다. 교회 역시 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대림절부터 시작하여 다시 대림절로 순환하는 달력체계를 만들었다. 마디를 정하고 의미를 채색하여 시간 속에서 신앙고백을, 공간 안에서 신앙생활을 연출한 셈이다. 이를 교회력, 예전력 혹은 ‘하나님의 달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현재의 교회력은 초대교회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확장하고, 보완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근래에 신정절, 왕국절, 창조절 등 새로운 절기들은 보편성을 얻는 과정 중에 있다. 앞으로도 주현절이 우리 곁에 친밀하게 정착하려면 더 많은 상징 언어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 수고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내 안에서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셨는지 살펴보는 수고로부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의 시간은 맴돌고 도는 원의 형태로 순환하지 않는다. 목적론적 역사관을 지닌 교회의 시간이해는 미래지향적이어서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있다. 반복되나 나선형으로 전진해 나가는 동안 분명한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기억은 우리를 내일로 인도해 주고, 미래로 들어가게 한다.” 하나님의 달력과 함께 내 삶의 시계와 역사의 나침반을 확인한다면 내 삶과 신앙에 남다른 무늬를 새겨줄 것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력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그리고 섭리를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달력에 진지하게 참여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이 이루시는 사건 그 자체로 만들어 나간다. 교회력을 사랑해야 할 진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