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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황광민  |  seokkyo@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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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년 01월 17일 (일) 14:32:59 [조회수 :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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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장 6-11절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가.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7절,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본문은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사람의 눈을 고쳐주신 기적사건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맹인의 눈을 고쳐주셨다. 그는 이 기적사건을(손가락) 통해서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달) 증명하셨다. “내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절).

* 이 기적사건은 보는 눈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주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라고 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8b)고 하신 말씀을 참조하라.

* 사람은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볼 것을 보지 못하면 실수를 하게 된다. 눈이 어두워져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면 쓸데없는 것에 매달리게 된다. 사람을 볼 때에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볼 때에도, 영적 세계에 관한 것에 대해서도 보는 눈이 있어야 참된 것을 얻을 수 있다.

 

나. 편견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6절,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치료하실 때에 먼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다. 주님은 말씀으로도 얼마든지 고쳐주실 수 있다. 이것은 민속치료법에 속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숨은 의도가 있다. 이는 주님이 벳세다에서 맹인을 고쳐주실 때에 두 번 안수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막8:22-26). 거기에는 어설프게 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의도가 있었다.

* 본문에서 주님이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발라주신 것에는 편견을 갖지 말라는 의도가 있다. 진흙(히, 아파르)은 ‘쓰레기’라는 뜻도 갖고 있다. 편견은 쓰레기일 뿐이다. 편견은 치워야 한다. 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맹인을 두고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던 제자들의 편견은 무익한 것이었다.

* 사람이나 어떤 사물을 볼 때에 편견을 가지면 제대로 볼 수 없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묻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볼 수 없었던 것은 좋은 예다. 세상은 어떤 색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다른 세상으로 보인다. 매사에 편견을 버리고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다. 예수님의 정신세계에 빠져라.

7절a,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 예수님은 맹인에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발라주시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여기서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실로암(히, 쉴로아흐)은 ‘보내다’에서 유래한 말이다. 실로암 못은 자연으로 생긴 연못이 아니다. 성 밖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의 시내에서 지하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여서 만든 연못이다. 이로 인하여 실로암 못은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 실로암 못은 비유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하였다. “때가 아지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여야 하리니”(4절a)라고 하신 말씀을 참조하라. 예수님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심으로서 그의 정신세계에 빠지라는 교훈을 주셨다.

* 지금 세계는 예수님의 정신과 사탄의 지배를 받는 유물론이 극한 대립을 하고 있다. 그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와 권력을 쟁취하고 윤리의식 없이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성도는 예수님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승리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영적전쟁이다.

 

라. 눈이 열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8절,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 그는 원래 앞을 보지 못하므로 거리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남의 도움에 의존하여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한 푼이 행복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는 앞을 보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 이제 그의 부모는 그의 장성함을 강조하였다. 상황을 묻는 사람들에게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하였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21절b)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눈이 열리면서 장성한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 눈이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대를 분별하고 세상을 바르게 살 수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아주 악하다. 선과 악이 혼돈 속에 갇혀 있다.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 눈이 열려야 유물론적 사고의 체계를 넘어 영적으로 깊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보는 눈이 진정한 보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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