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마지막 날

진정한 은자는

황야로 갑니다.

스스로를 잃어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을 찾기 위해서.

-칼릴 지브란-

새해 첫날 비가 내리고 있다.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고 한다.

변덕스런 날씨를 내가 어찌 감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젖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지.

아침에 깨어나서 카카오톡을 열었다. 어제부터 보낸 벗들의

신년인사 전자카드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해르만 헤세는 "노년기는 감사의 마음으로 과거의 책장을 뒤적이는축복의 시기다." 라고 예찬했었다.

한국가수 '태진아' 가 불렀던 유행가 '옥경이' 에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대답없은 옥경이" 라는 노랫말이 있다.

비록 머릿속에 가물가물하게 떠오르는 얼굴들이지만 카드들에 담긴 추억들이 옛 고향동산처럼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하다.

난 이제,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하는 바램같은 건 하지

않는다.  '시간이 되면 만나요.' 하는 약속들도 믿지 않는다.

나는 미래를 믿지 않는다.  과거도 믿지 않는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시간은 현재밖에 없다. 나는 현재의 유일한

주인이고, 현재를 호령할 수 있는 황제다.

어제 2020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VA 에 있는 Shenandoah National Park, The Whiteoak Canyon Trail 9 마일을 산책했다.

'내일 Shenandoah Whiteoak Canyon 이나 West Virginia Harpers

Ferry 로 산행을 떠날 생각인데 시간이 있으면  함께 가자.' 는

메시지를 일본 친구 Y 에게 셀류어폰을 통해 띄웠다.

두 산책로는 내가 즐겨 찾는 산책로이다. 

당장, "Yes, How about Whiteoak Cayon ? " 하는 답신이

날라왔다. 'OK' .

"그런데 일기예보를 보니까 비가 올 확률이 높다고 하던데?"

"50%? 그래도 난 걸꺼야."

 "OK!  What Time? Where? 에서 만나지?"

"9 AM, At Korean Grocery Store, Hanarum Parking Lot in Centreville."

"OK!"

30일 오후 Y 와 내가 주고받았던 대화의 전부다.

가슴이 통하는 친구들 사이에 무슨 'But, If, Because' 같은 변명이니 익스큐스가 필요하겠는가.

Yes 면 'Yes ' 이고 'No' 면 'No' 이지.

나는 머리가 복잡한 사람들을 싫어한다. 단순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전날 몸살끼가 있다며 예정된 코로바바이러스 Vaccine 까지

다음 주로 미루고 일찍 퇴근, 침대에 누워있던 케롤이 새벽 4시에

일어나 분주하게 김밥과 미소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말 그럴 필요가 없는데.... 내가 미리 알리지 않는 이유는 그런

번거로움이 싫어서 그런거야. 가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IHop 이나 Denny 에 들려 식사하는 것이 훨씬 내 마음이 편해.  제발 앞으로는 나를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하지 마. "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신경쓰지 마.

그대신 만약 사고라도 나서 당신이 죽으면 내가 재혼을 할꺼라는

사실을 잊지말아줘.  조심해야 해."

"재혼을 해도 선더는 대리고 가겠지?"

"미안하지만 선더는 봐두고 혼자 갈꺼야."

일기예보와는 달리 날씨가 좋았다. 구름이 약간 끼기는 했어도

50도가 웃도는 이른 봄날씨 였다.  5마일 정도를 걷기로 예정을 하고

떠났었는데 계곡을 흐르는 물길, 물소리에 빠져,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수많은 폭포들이 애애한 암벽들 사이로 꿈처럼

이어져 갔다. 비록 많은 여행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미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절경들이었다. 산은 역시 벌거벗은 겨울에

제 참모습을  드러낸다. 근처에 살고 있어 자주 들린다는

 한 산책객이 "이렇게 아름다운 절경을 본 적이 없다." 며 감탄을

했다.

몇 년전 가을  테네시주 The Great Smoky Mountain 에

5일간 머물며 걸었던, 계곡물 소리들 들으며 넋을 잃었던

산책로가 연상되었다. 그 산책로에는 폭포가 없었다.

"일본 사람들이 폭포가 있는 산 중턱에 불교 사찰을 짓는

이유를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Y 는 그 말을 하며

몇차례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경에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는다." 고 했다.

여행객들에게는  '욕심이 사고를 낳고, 사고가 사망을 불러온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왜 이렇게 내 욕심을 통제할 수 없는지....

정상에 오르자 이미 산속에 어둠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밤이 되기 전에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나의

독백에,  '푸레시를 가지고 왔어." 하며 Y 나를 안심시켰다.

6시쯤 산자락에 당도하니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파킹장에 달랑 내 차만 외로히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Bill, 네가 2020년도 Whiteoak Cayon 의 마지막 등산객이자,

최고령 등산객 기록을 남기고 간거야." 하며 Y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피웠다.

"고맙다. Y 이, 너 같은 친구를 둔 나는 참 행운아야. 행복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어. 가슴이 통하는 친구와 함께

산책을 즐기는 것...."

01/01/2021 신년 첫날 아침에

버지니아 숲 속에서

박평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