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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 그는 순교자일까요, 순국열사일까요― 그의 아내 오정모 사모를 아시나요? ―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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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2월 28일 (월) 18:53:10 [조회수 : 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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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 그는 순교자일까요, 순국열사일까요

― 그의 아내 오정모 사모를 아시나요? ―

 

 

1. 주기철 목사의 신앙행로

 

일제 강점기로부터 6.25한국전쟁에 걸친 동안 우리의 순교자라면 저에겐 손양원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제 청년기의 초신자 시절에는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설교의 예화로 등장하기도 했는데요, 주기철 목사님보다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게 좀 더 많은 편이었습니다. 아마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 전 두 아들을 죽인, 원수라 할 수 있는 청년을 아들로 삼았다고 하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소설화한 <사랑의 원자탄>이 교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영향도 컸지 않았을까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라면 저도 크게 감명을 받은 사람인지라,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실명소설 형식으로 쓴 적이 있습니다만, 아직 출판 전인데요, 그 집필을 위해 자료조사, 현지 취재 등을 한 덕택으로 그분에 관해서라면 조금은 아는 편입니다. 역시 위대한 분이지요. 순교도 그렇거니와 <사랑의 원자탄>의 내용이 된 사랑의 행위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기철 목사님 또한 손 목사님 못지않은 훌륭한 순교자이십니다. 손양원 목사님께는 <사랑의 원자탄>을 낳은 사랑의 행적이 있다면 주기철 목사님께는 신앙 투철한 사모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서 주 목사님과 사모님, 그 두 분에 대한 말씀을 두 번에 걸쳐 드려 보고자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에 관해서도 언젠가는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다.)

 

 

1897년 11월에 경남 창원군 웅천면에서 태어난 주기철 목사님은 아홉 살 때 웅천 개통학교 입학, 6년 후인 1912년에 졸업하고, 그 다음해 봄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 3개년의 과정을 마치고 1916년 봄에 졸업하였습니다.

이렇듯 비교적 일찍 신식 교육에 접하게 된 주기철 목사님은 민족의 현실에도 눈을 뜨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전국 순회강연을 다니던 소설가 이광수의 영향도 적잖이 받아 민족의식이 더욱 고취되었습니다. 당시의 평양과 정주·선천·안악 등은 민족교육의 중심지라 할 수 있었는데, 목사님이 다니던 오산학교는 그 대표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목사님은 민족의 지도자 조만식·이승훈 등으로부터 신앙을 배우고 민족의식도 강화해 갔습니다.

그런데 오산학교를 졸업한 목사님은 1916년 봄, 뜻을 좀 더 크게 이루겠다는 의지를 안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안질에 걸려 수학이 어려울 정도로 시력이 저하되자 중퇴하고 낙향하였습니다. 바라는 바가 컸던 만큼 좌절감 역시 클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4년 반 동안을 실의에 빠져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목사님은 만으로 스무 살이 되던 1917년 가을에 김해 출신의 세 살 연하인 안갑수(安甲守)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지요.

목사님은 결혼 후 얼마 안 있어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났고, 그 기운이 웅천에도 이르자 그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그로 인해 지명 수배를 받고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헌병에게 체포되어 경찰서에 1개월간 구류되었는데, 그게 목사님의 네 차례에 걸친 검속의 전초전이 아니었던가합니다. 1919년이라면 눈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실의에 빠져 있던 중에도 교회생활은 열심히 하여 웅천교회의 집사가 되고 장남 영진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지요.

집사가 되고 다음해인 1920년의 어느 날 목사님은 친구들과 함께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병 고침을 받았다며 소리치는 사람, 통곡하며 회개하는 사람, 방언이 터져 기도하는 사람 등등 성령의 역사로 인한 열기로 가득한데, 목사님은 아무런 은혜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답답게 시간이 흐르던 집회 사흘째 날 밤이었습니다. 강사 목사의 “장님이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요, 귀머거리가 귀가 뚫리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요,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목사님은 가슴이 뜨거워지며 무거운 죄들이 떠올랐습니다. 눈물과 통곡의 회개가 이어졌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상을 깨달았습니다. 어리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주제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 보겠다고 나서려 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목사님은 목사가 되리라 결심, 평양장로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1922년 3월의 일이지요. 1925년 2월에 졸업했는데요, 입학하던 해 겨울부터 졸업하던 해 9월까지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기도 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님은 부산으로 내려가 경남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26년 초에 부산초량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초량교회라면 그때 이미 33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였는데, 28세의 젊은 나이로는 힘이 부칠 법도 하지만, 목사님은 잘 준비된 사역자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확고한 신앙에 바탕을 둔 신념의 목사였던 것이지요.

목사님의 모든 일은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후진양성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도덕이나 윤리 교육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교육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길을 바르게 가는데 인성이 비뚤어질 리 없고, 애국의 길로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웃과 민족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신앙교육은 곧 인성교육이었고 민족교육이었던 것이지요. 참된 믿음이 참된 애국의 길이었습니다.

 

 

일제는 목사님이 초량교회에 부임하기 전해인 1925년에 식민지배의 상징 조선신궁을 서울 남산에 세우면서 신사참배를 본격적이면서도 전면적으로 확대하려 획책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이를 미리 예견하고 교회들과 노회에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고, 결국 경남노회에 ‘신사참배반대 결의안'을 제출하여 그 가결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제치하에서의 일이다보니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르겠다는 각오와 결단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목사님은 부산 구덕산 기슭에 기도처를 정해 놓고 때를 가리지 않고 올라가 밤을 새워 온몸이 땀으로 흠씬 젖을 정도로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하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초량교회 시무 5년여의 1931년 어느 날, 마산 문창교회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목사님을 초빙해 가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아니시면 우리 교회가 다시 세워지기 힘든 처지에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오셔서 교회를 안정시켜 주시고, 저희들을 먹여 주십시오.”

초량교회는 안정된 큰 교회일 뿐 아니라, 목사님도 대내외적으로 크게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의 뜻에 부합하는지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교인들은 울음으로 만류하였으나 그런다고 생각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7월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하였지요.

목사님은 문창교회에서 만5년을 사역하였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걸은 길은 민족의 횃불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그 행적을 여기에 다 열거할 수는 없고, 목사님의 대표적 설교 두 편만을 간단히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35년 5월 1일부터 5일까지 금강산 장로교 수양관에서 총회 산하의 목사, 선교사 등 200여명이 모여 조선 교회의 당면과제 신사참배를 놓고 수양회를 가졌는데, 이때 목사님은 마3:1-13을 본문으로 ‘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일경들도 자리를 차지한 채 도끼눈을 하고 트집 잡을 내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생사여탈의 대권을 잡은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요한도 일사각오였고, 나단이나 낙스, 루터 역시 일사각오가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하는 것이요, 그런 일사각오로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몰라서 말 못하는가? 왜, 벙어리 개가 되었는가? 오늘의 목사들도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하고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 순사 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여기까지 들은 일경은 노발대발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중지, 중지! 해산!’ 하며 호루라기를 불어댔습니다. 여기에서 목사님은 강대에서 끌려 내려왔습니다. 참석한 모두는 강제해산 당했지요.

또 한 번의 설교는 1935년 9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열린 선교 50주년기념 부흥사경회에서 했는데요, 요11:16을 본문으로 한 ‘일사각오’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무렵 목사님의 내면은 주님을 향한 일사각오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용 모두가 너무도 소중하여 생략하기 어려운 것들뿐이지만, 부득이 부분 부분만을 소개하려 합니다. 그리도 상당한 길이가 될 것인데, 그 점 양해를 구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여 죽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백 번의 죽음을 당한들 무슨 후회가 있으리오마는, 주님을 버리고 천 년 살고 만 년 산다한들 그 무슨 저주스런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을 욕되게 마옵소서! 주님은 영원토록 찬양 받으실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두 손과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올시다.”

“나는 내 주님 밖의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는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나의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저는 이 제목을 가지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고문이 끈질긴 만큼 나는 더욱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웬만한 믿음 가지고는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을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단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 데는 용감한 신자들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나의 세 번째 기원은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저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가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은 금지옥엽으로 키우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 맞아 상할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춘풍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에,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에 어머니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재차 요한에게 부탁하실 때의 심정 어떠하셨을까요? 십자가 밑에서 가슴 치며 애통하시는 마리아의 아프신 가슴 어떠하셨을까요?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 하신 주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어머님, 80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의 네 번째 기원은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정조가 있습니다.”

“나의 다섯 번째 기원은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혹여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가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목사님에게 있어 문창교회 시무 5년간은 문자 그대로 다사다난한 기간이었습니다.

1931. 경남노회 제31회 노회장으로 피선

1932. 03. 4남 광조 출생

1933. 05. 안갑수 사모 34세 젊은 나이에 소천

1934. 08. 부친 주현성 장로 향년 81세로 소천

1935. 가을 오정모 집사와 재혼

1936. 주목사 장모 안부인 향년 74세로 소천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많은 일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안갑수 사모가 세상을 뜬 것은 종기 수술의 후유증 때문이었습니다. 사모는 소천 직전 같은 교회의 교인 오정모를 불러 목사님과 아이들을 부탁하고 운명했습니다.

오정모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몸이 아파 초량교회에 머물렀는데, 그래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그 후 마산여고 교사가 되어 문창교회에 다녔는데, 어찌된 일인지 목사님이 문창교회로 부임해 왔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것일까요. 어떻든 오정모 선생은 안갑수 사모보다 세 살 아래로 두 사람은 언니 동생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안갑수 사모가 세상을 뜨고 1년여 만에 목사님은 오정모 선생과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스승 조만식 장로와 김동원 장로가 멀리 평양에서 찾아오셨습니다. 민족의 스승 고당 조만식은 목사님이 존경해 마지않은 스승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스승과 애제자의 해후, 감격의 순간이었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두 장로 방문목적은 목사님을 자신들의 교회로 초빙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목사님은 문창교회를 사임하고 산정현교회로 옮겨갑니다. 그때의 민족교육의 중심지 평양은 일제의 폭압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문창교회를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으나 순교가 예견되는 순교의 땅의 부름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36년 7월 산정현교회에 부임했지요.

그때 산정형교회에는 목사님의 스승 조만식을 비롯한 유계준, 오윤선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함께 하고 있었는데요, 이때부터 목사님은 본격적으로 형극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를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으로 교회를 굴복시키려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를 견디지 못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결국 38년 9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습니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의 한 형식일 뿐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조선 교회 치욕의 날을 만든 것이었지요.

그러나 물론 교계에는 그런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는 애국지사들이 많았는데, 목사님은 그 최 일선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저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결과 목사님은 순교 때까지 경찰서에 1개월간 구류되었던 것까지 합해서 모두 5차례에 걸쳐 5년 4개월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이때의 고통은 몽둥이타작, 채찍질, 쇠못 박힌 널판 위 걷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 뿌리기 등등으로 인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일제의 경찰들이 목사님의 의지를 꺾어 보려는 심산으로 목사님과 성도들을 감방에서 꺼내어 감옥 마당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그들 앞에는 널빤지에 못을 촘촘히 박아 놓고 그 위를 걷게 하는 고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너희가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면 주 목사가 더 이상 고문을 받지 않도록 해 주겠다. 그러나 반대로 계속 신사참배반대를 고집한다면 주 목사는 이 못 위로 걷게 될 것이다!”

이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과 여러분이 함께 다짐한 것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말을 마치자, 목사님은 스스로 널빤지의 못 위로 올라섰습니다. 성도들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지요.

결국 40년 7월에 다섯 번째 검속에 의해 영어의 몸이 되어 평양형무소에 갇힌 목사님은 심한 고문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식사로 인해 1944년 4월 13일 병감(病監)으로 옮겨진 뒤, 4월 21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둡니다. 기록에는 병사라고 되어 있지만, 주사에 의한 독살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어떻든 목사님의 목숨을 일제가 앗아간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원래의 이름 기복(基福)을 세례를 받은 후 철저한 신앙을 뜻하는 기철(基徹)로 바꾼 목사님은 이렇게 소천했는데요, 그때 목사님은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라 마지막 기도를 했다는군요. 그런데 저는 어쩐지 이때의 목사님에게서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마지막 말 “다 이루었다”가 연상되는데, 왜일까요.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나라 또한 애국자의 희생을 주축으로 홀로 서 가며 성장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목사님은 순교자일까요, 애국자일까요. 아니면 둘 다일까요.

그런데, 그런데요. 그 후 우리의 기독교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는데요, 지금은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일 뿐이라는 명분으로 신사참배를 찬성하고 나섰던 자들이 광복이 되자, 자기들도 신사참배 반대자들처럼 했다면 조선의 교회는 씨도 안 남고 문을 닫았을 것이라며, 자기네가 신사참배를 하여 교회를 지켜 왔기 때문에 조선의 교회는 이렇게 건재할 수가 있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나라는 어떻습니까. 지금 많은 분야에서 우리가 일본을 앞서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총체적인 면에서도 일본을 앞지를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어찌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발목을 잡으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나요. 그럼에도 일본에 양보하지 않은 우리가 잘못이라고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를 토왜근성이라 한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요.

그렇다면 크리스천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올바른 가치관, 즉 성경적 가치관에 의한 바른 마음, 바른 생각으로 모든 것을 바로 보아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여, 그 길로 가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데, 아닐까요. 입으로는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순교자, 애국자를 존경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그분이 갔던 길과 역행한다면 어찌 되는 것일까요.

 

* 다음 글에서는 주기철 목사의 부인 오정모 사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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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봉성도 (122.101.20.169)
2020-12-29 10:08:55
객관적이지 않고 자기 주관이 강한 칼럼니스트
나 또한 그동안 임종석 목사가 써온 칼럼을 여태껏 쭉 봐왔지만 그다지 썩 객관적
이지 않고 주관적인 생각이 강한 사람임을 알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엄청나게 공격성 칼럼을 많이 써왔던 사람인데 문재인 정부 들어
이들을 비판하는 칼럼을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에 비해 그렇게 정치를 잘했고 국정운영을 잘했나.
문재인 정부도 박근혜 정부 못지않게 적폐와 국민적 갈등을 초래한 정부이다.
한 가지 예로 박근혜 정부 시절 추미애 장관과 윤석열 총장이 싸웠다면 아마 임종석
목사는 압력을 받고 있는 검찰 총장의 입장에서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을 비판하는
칼럼을 진작에 썼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장관이 검찰총장을 디스 하는 것은 자신들이 저지른 적폐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해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임종석 목사는 애써
이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즉 같은 사안이라도 문재인 정부가 하는 일은 관대하게 생각을 하는 것 같고 보수
정부가 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잘못 되면 서슴없는 비판 일색의 컬럼을 썼을
거란 얘기이다.
이번 글도 오묘하게 보수층을 비꼬는 듯한 글귀들이 일부 보인다.
따라서 이번 칼럼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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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0-12-28 20:01:31
주기철 목사를 핑계로 누군가를 공격하다니... 임종석 칼럼니스트의 글은 이런 경우가 많아서 나로부터 호되게 면박당하기 일쑤였다!
남에게 교훈을 주고 가르침을 주기위해 글을 쓰고자 했다면, 주기철 목사의 생애를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완전 바보나 철면피가 아닌 다음에야 뭔가 반성하고 회개할 것이다. 뭔가 배우기도 하면서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지기도 할 터인데 결론 부분에서 삼천포로 빠졌다. 결론 부분에서 글쓴이의 목적이 탄로 나고 말았다. 주기철 목사로부터의 뭔가의 교훈과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글을 쓴 것이 아니라 자기와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을 까고 공격하기 위해 주기철 목사를 이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나 역시 임종석 칼럼니스트의 글 중 결론 부분을 근거로 임종석 칼럼니스트를 까야겠다.

글쓴이 曰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일 뿐이라는 명분으로 신사참배를 찬성하고 나섰던 자들이 광복이 되자, 자기들도 신사참배 반대자들처럼 했다면 조선의 교회는 씨도 안 남고 문을 닫았을 것이라며, 자기네가 신사참배를 하여 교회를 지켜 왔기 때문에 조선의 교회는 이렇게 건재할 수가 있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글쓴이 曰 “나라는 어떻습니까. 지금 많은 분야에서 우리가 일본을 앞서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총체적인 면에서도 일본을 앞지를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어찌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발목을 잡으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나요. 그럼에도 일본에 양보하지 않은 우리가 잘못이라고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를 토왜근성이라 한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토왜근성이라 한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요?> 라고 입에 거품을 물었는데 과연 주기철 목사도 신사 참배한 교회나 교인들에게 입에 거품을 물었을까요? 일본에 유학한 後妻 오정모를 받아들인 주기철 목사는 토왜근성에 찌든 사람일까요?

偉人을 이리저리 이용하여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공격소재로 삼으면 곧 바로 반격 당한다. 임종석 칼럼니스트의 이글을 읽는 사람 중 大多數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少數까지는 속일 순 없다.

자,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일본에 대해 약간의 호의를 가진 사람조차 이를 가는 임종석 칼럼니스트의 견해에 따르면... 일본 유학까지 갔다 온 오정모를 후처로 받아들인 주기철 목사는 친일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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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봉성도 (122.101.20.169)
2020-12-29 10:24:16
아주 정확하게 팩트를 분석한 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김경환님의 질문에 임종석 칼럼니스트는 답을 해야 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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