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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각
이정배  |  현장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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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2월 22일 (화) 18:19:04
최종편집 : 2020년 12월 29일 (화) 19:21:16 [조회수 : 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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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각

 

이정배(현장아카데미)

 

성탄절을 기다리며 ‘혐오’를 주제로 글을 부탁 받았다. 이 절기에 걸맞지 않는 글감이었기에 내키지 않았으나 혐오를 생각할 때마다 기독교를 떠올리게 되었으니 받아들여야 했다. 주지하듯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혐오를 부추겨 세상의 지탄대상을 넘어 기피종교가 되었는지 필자 역시 많이 궁금했었다. 크게 보아 ‘자기부정’을 통해 세상을 구해야 할 종교가 ‘타자부정’을 앞세워 자신을 강변했던 탓이겠다. 자기부정과 타자부정은 동이 서에서 멀 듯 함께할 수 없는 가치겠으나 이 둘이 너무 쉽게 넘나들며 종교, 특히 기독교를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이런 모습 보려고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자조 섞인 한탄도 곳곳에서 들린다. 물론 기독교만의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속의 정치, 경제 그리고 기술 등이 불평등한 세상을 만든 것이 원죄였다. 이에 편승하며 배제와 혐오를 가중시키는 기독교로 인해 세상은 더욱 살맛을 잃게 되었다. 이하에서 필자는 종(기독)교계 안팎에서 생각할 수 있는 혐오의 이유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짧게 서술할 것이다.

 

1.

코비드 19로 인해 신자유주의 한계를 여실히 경험 중이다. 주지하듯 평등이념을 삼켜버린 이 이념은 인간 및 노동 가치를 차등 화시켰다. 자유를 앞세운 경쟁체제하에서 차등은 차별이었고 차별은 곧 혐오로 이어졌다. 세계적 현상이었던 IMF위기 극복의 미명하에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노동자들 다수가 차별의 대상이었다. 은행은 이들을 신용분량자로 평가했으며 신용에 있어 7등급 이하의 경우 회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우리 사회는 돈(경제)이 척도가 되었고 가난은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유/무전의 차이로 사회적 계급을 형성시킨 탓이다. 지금 한국시회에서 게급의 벽에 막힌 20대 여성들의 자살 율이 급격하게 높아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허리우드가 주목한 <기생충>영화는 이런 현실을 옳게 반영했다. 익히 알 듯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세상은 가난과 부, 빈자와 부자가 서로 선을 지킬 때만 공존할 수 있다. 후자가 이 선을 넘고자 할 때 전자의 혐오와 부정이 시작된다. 혐오의 뒷면에 감춰진 감정이 두려움과 공포인 탓이다. 선을 넘어 자신들 존재(기득권)를 위협 할 경우 가차 없이 후자의 사람들을 내치곤 했다. 이 영화의 묘미는 사람(존재)이 넘을 수 없는 선을 냄새가 넘어섰다는 발상에 있다. 행주 삶은 물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 그 냄새가 선을 넘어선 삶의 실상을 기생충이란 말로 풍자한 것이다. 선을 넘을 수 있는 은밀한 방식은 ‘기생’하는 일이었다. 공존이 아니라 기생 관계를 불쾌한 냄새로 상상한 발상이 놀라왔다. 하지만 본 영화가 결말에서 보여주듯 기생은 일방적인 관계로서 결국 숙주까지 파멸로 이끌 수밖에 없다. 동시에 빈자가 기생충으로 일컬어지는 풍자적 현실은 혐오의 단면을 잘 드러냈다. 하지만 기생충이 아니라 정작 기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을 혐오해야 옳을 듯싶다. 여기서 욥기의 서막에 언급된 욥에 대한 사탄의 인간 이해를 소환해 본다. ‘인간은 물질로 물질을 바꾸나 이후에는 자기 생명으로 물질을 바꾼다’란 말이다. 소유 유무를 갖고 인간을 혐오하고 선을 긋고자 한다면 그는 사탄의 사람, 세상을 공멸시키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기독교마저 가난한 이들에게 교회 문턱을 높여왔고 자본주의적 욕망을 축복이라 가르쳤으니 이런 비난을 피할 길 없다. 지금도 교회는 부자들 마음을 얻고자 애쓸 것이며 자신들 비어진 곳간만을 염려할 것이다. ‘목사의 크기는 교회의 크기에 있다’고 말하면서 뭇 ‘작은교회’를 자신들을 축내는 기생충처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코비드 19는 인간 멸종을 경고하며 혐오적 기생이 아니라 공감적 인간성(Homo Empatipicus)을 요구한다. 인간/인간뿐 아니라 인간/자연 관계에 있어 혐오가 아닌 상생의 길을 가라 명할 것이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피조물 어느 것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라는 말이다.

 

2.

일찍이 다석 유영모는 ‘탐진치’를 인간의 원죄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를 물질을 탐하는 끝 모르는 욕망, 타자를 혐오하는 미움 그리고 무차별적인 성적 추구라 풀어 말할 수 있겠다. 달리 개념화 하자면 자본주의, 사이비 저널리즘 그리고 N번방 사건이 말하듯 가부장적 성적 착취라 할 것이다. 앞선 첫 내용이 ‘탐’과 관계된 것이라면 이 항목에서 말할 주제는 ‘진’과 ‘치’에 관해서이다. 우선 혐오를 부추기는 이 시대의 저널리즘의 행태를 살펴보겠다. 주지하듯 언론은 사실보도를 으뜸가치로 삼아야 옳다. 사실을 밝혀 사실에 입각하여 사실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 사명이다. 하지만 목하 언론은 거짓을 증거 하는 이념으로 전락했다. 이웃을 지지 혹은 혐오하며 거짓을 말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여기서 ‘거짓’이란 말이 적합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나 아렌트의 말로 부언해 보겠다. 그녀는 ‘사실(fact)’과 ‘의견(opinion)’ 그리고 ‘이념(ideology)’을 구분하여 사용했다. 무엇에 대한 사실이 애시 당초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하지만 언론 역시 이해관계 내지 진영논리로 사실을 ‘의견’으로 바꿔 전달해왔다. 이후 의견은 종종 정치적 이념이 되었고 상대를 혐오하는 이념 투쟁의 도구로 전락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란 말은 ‘사실’이 ‘사실’될 때 가능한 말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 역시도 사실을 의견으로 바꿔 전달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세상이 가짜 뉴스의 진원지로 교회를 일컬을 정도가 된 것이다. 급기야 교회마저 정치세력화 되었고 대형 교회들의 경우 사실을 실종시킨 채 거짓과 혐오의 공간으로 전락했다. 이웃을 해하는 거짓증거가 언론, 정치 영역을 거쳐 그리고 종교를 통해 확대 재생산된 결과였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할 경우, 정치가 시민을 편 가르기 할 때 종교는 사실에 좀 더 집중해야 옳았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을 걱정 않고 교회만 염려했기에 생각하는 공간이 되지 못했다. 정치적 혐오에 종교적 열정을 덧붙여 이념을 퍼 날랐을 뿐이다. 눈을 떠 사실을 밝혀야 할 종교가 언론의 노예 되었음을 반증한다. 플랫폼 언론 ‘네이버’와 ‘다움’이 J 신문을 비롯한 수구언론과 결탁하여 보수정치이념의 전달자가 되었다는 경악스런 소식도 최근에서야 접했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진리)애 둔감할 경우 종교가 너무도 쉽게 이념으로 쇄락한다. 이제 혐오의 종교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기독교는 시대징조를 읽지 못 하는 자신들 자폐적 성향과 결별할 때가 되었다. 세상을 위하지는 못할 지라도 최소한 시대정신과 호흡하는 종교로 재탄생되어야 옳다.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다시 찾을 일이다.

 

3.

‘치’는 치정, 곧 성적 방종을 일컫는다. 남성의 잣대로 여성을 혐오했던 실상이 금번 N번방 사건에서 폭로되었다. 하지만 정도 차는 있었으나 무수한 동류 사건이 이전부터 존재했었다. 지금은 사라진 신림동 고시촌, 그곳에 거주하며 자신들 미래를 준비하던 법조인 지망생들, 그들 책상 밑이 야동 비디오들로 가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따라서 N번방 사건은 여성 몸을 스트레스 해소 수단 쯤 생각하며 탈인격화 시킨 행태의 정점이었을 뿐 결코 새롭지 않았다. 한국의 경우 성 욕망 지수가 OECD국가 중에서 으뜸이라 하니 이런 문화가 쉽게 뿌리 뽑혀질 것 같지 않다. 문제점도 야기 시켰으나 미투(Me too)운동을 통해 은폐, 억압된 가부장적 혐오의 실상을 들어낸 것은 역사의 진일보라 할 것이다. 주지하듯 가부장제문화는 지금껏 권력에 의해 후견되어져 왔다. 권력관계가 여성혐오에 있어 상수처럼 존재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회 및 산업여건의 변화 속에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종전과 달라졌다. 여성 능력이 출중해졌고 경쟁을 통해 사회진출에 막힘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자보다 우월한 경험을 축적하며 살았던 여성들 숫자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교사, 의사, 공무원, 나아가 법조계에 까지 여성인력이 절반을 넘어섰다. 그럴수록 대다수 남성들 경우 여성을 하대하는 인습적 가치와 자신보다 우월한 여성들의 능력 사이에서 갈등하며 혼동을 겪어야 했다. 인정할 수도 없고 과거로 회귀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복잡한 감정을 들어낸 것이다. 약한 자존감의 표현인 열등감, 모멸감, 박탈감 등이 이들 내면적 실상이 되었다. 그렇기에 최근 곳곳서 발생한 여성 살해사건은 이전 성폭력과 변별되는 혐오의 또 다른 양상일 수밖에 없다. 과거 성 폭력적인 혐오가 여성 인격의 상품(대상)화였다면 여성 살해에 까지 이른 작금의 혐오는 남성 스스로의 병리적 현상 탓이다. 어쩌면 N번방 사건은 자기 분열적 심리를 가진 남성들의 해방구로 작동했을 개연성이 높다. 이런 연유로 여성들은 종래보다 더 위태롭게 혐오대상이 되었다. 가부장제의 희생양,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상품화를 넘어 급기야는 못난 남성들에 의한 제거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복합적 양상을 지닌 혐오는 앞으로도 심화, 지속될 수 있다. 교회 내 성폭력의 빈도와 강도가 이런 밖의 현실과 견줄 때 결코 약하지 않다는 사실도 절망스럽다. 로마서가 강조하는 ‘그리스도 안의 존재’(Sein in Christo)는 단지 신앙적 언술이 아니라 남녀 성관계를 포함하여 삶 자체를 달리 하겠다는 의지(실천)의 표현이었다. 그럴수록 한 여성신학자처럼 ‘남성의 그리스도가 여성을 구원할 수 있는가?’를 심각하게 물어야 옳다. 아우구스티누스 식의 원죄이해가 더 이상 반복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타자성의 철학이 말하듯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범접할 수 없는 초월의 다른 이름 인 것을 학습할 때가 되었다. 물론 그 역도 동일하겠으나 지금껏 그리 살았기에 속죄의 차원에서라도 먼저 그 ‘다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길 일이다.

 

4.

기독교와 혐오, 혹은 성서와 혐오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살필 차례가 되었다. 정치, 경제, 언론, 문화영역에서 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기독교 내부의 문제로서 혐오가 심각하다. 이하에서 교리적 차원과 현실적 맥락의 차원에서 이를 서술하겠다. 주로 앞의 것은 주로 종교개혁자들의 바울서신 오독에 관한 것이겠고 후자는 그런 오독을 확대 재생산시킨 한국 교회의 실상을 일컫는다. 주지하듯 바울사상은 영육대별의 문서로 읽혀졌다. 아담/그리스도, 율법/은총, 죄인/의인, 종의 영/하느님(생명)의 영 등이 육과 영의 다른 이름들이었다. 후일 이것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평신도/성직자, 세속/교회, 여자(하느님 흔적)/남자(하느님 형상)의 구도로까지 확장되어갔다. 근대이후 아시아의 등장이래로 이것은 동양/서양, 유색인/백인, 자연/인간, 타종교/그리스도교의 구별을 부추겼고 최근에 이르러 장애인(성수소자)/정상인의 차별도 낳았다. 바울 사상의 본뜻과 무관하게 루터의 종교개혁,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소급되는 오독의 역사는 이렇듯 이분법적 도식을 고착시켰다. 전자는 악이고 후자는 선이란 인식이 천년 이상의 기독교 역사를 지배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실상 죄인들을 사랑했던 예수와 달리 구원을 위해 오히려 혐오를 말한 종교였었다. 아리안 족의 로마 침탈 이후 하느님 도성과 세상을 구별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천년 가톨릭교회(자연신학)를 넘어서고자 유대인(율법)을 개돼지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루터는 모두 영/육의 오독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서구 기독교가 ‘프루테스크’ 침대가 되어 세상을 자기 식으로 재단, 평가하며 죄와 구원을 말하는 행위 자체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결코 긍정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반추하는 노력을 제대로 경험치 못한 것이 기독교에게 비극일 수 있겠다.

이런 기독교가 한국에 유입되었다. 물론 선교초기 제국에서 ‘민국’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선교사들, 그들 영향을 받았던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서 이 땅의 사람들, 이들의 역사, 문화를 존중했던 사람들은 정작 소수였다. 백 여 년이 지난 지금, 산업화의 덕으로 교회 성장을 이룬 개신교회들 역시 자신을 여럿 중 하나로 여기지 않고 신앙의 가치를 앞세운 오만과 방종 그리고 혐오의 종교가 되었다. 특히 코로나 19 상황에서의 기독교는 ‘절대’와 ‘다수’의 이름으로 시민 사회의 정서와 한없이 멀어진 것이다. 필자는 이를 자신의 처음을 망각한 ‘영적 치매’, 세상과 소통을 거부하는 ‘영적 자폐’ 그리고 자본주의적 자기 확신(영성)에 도취된 ‘영적 방종’의 결과라 칭한 바 있다. 코로나 정황에서 사람의 생명보다 예배가 중할 리 없고, 구약시대의 성서 한 구절로 성소수자를 정죄할 수 없으며 자신이 옳다는 신앙적 확신으로 불교 사찰에 방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독교 이후 시대에 살면서 종래처럼 영육 이분법 구도 하에 혐오를 가르친 교회의 잘못이 크다. 지금껏 이 땅의 기독교는 유독 한국문화를 혐오했고 한국전쟁의 결과로 공산, 사회주의 이념을 적대시 했으며 이슬람과 불화했고 최근에는 성소수자 문제로 세상 상식과 갈등 중이다. 모두가 본질에 있어 혐오와 차별의 사안이지만 각기 그 성격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배타적 절대성 차원에서 생각한 결과겠으나 기독교 세력의 강약, 대소 차이에 따라 그 현상이 달리 언표 되었다. 한국 종교문화에 대한 혐오와 폄하는 제국주의적 기독교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으로 영육 이원론의 종교문화사적 표현이다. 자기 절대화가 강력 할 때 이;런 경향이 더욱 도두라 진다. 공산,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는 해방 이후서부터 한국 전쟁을 걸쳐 그리고 미국을 추종하며 반공을 국시로 택한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체질(인습)화된 정서이겠다. 남북분단의 아픔을 세계 냉천체제의 산물 또는 브루스 커밍스가 말하듯 민족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의 공격 차원에서 보지 못하고 반기독교적으로 독해하는 단견의 산물이다. 민주/공산의 대별이 영육 이분법 구도로 고착화된 결과일 것이다. 한국전쟁의 피해를 오롯이 공산주의 탓으로 여겨 이들을 적대시했던 기독교가 역설적으로 이 땅 독재정권의 수호자가 된 것에 반성이 없다. 한국문화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혐오와 달리 이슬람의 경우 동일한 성격을 지닌 종교들 간의 가치투쟁으로서 기독교가 한국 사회 내에서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사실 초기 이슬람 종교는 이후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예수를 신이 아닌 그 하들로 여긴 유대교적 기독교 종파로부터 기원했다. 그렇기에 동일한 세계관에서 태동된 종교들 간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치열한 가치 투쟁이 필수적일 수 있다(R.Pannikar). 과거 중세시기 학습한대로 이곳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종교를 악마화시켜 이 땅에 발붙일 여지를 주지 않았다. 정작 이슬람 지역과의 교역을 통해 큰 경제적 혜택을 누리며 살면서 말이다. 이 같은 기독교 태도는 이슬람권과 관계(무역)해야 하는 정부에게 사실 큰 부담이었다. 이슬람교 역시 문제가 없지 않았다. 자신들 식습관을 비롯한 풍습 그대로를 이 땅에 정착시키려 했고 자신들 선교를 정부에 의존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예컨대 코란 번역을 불허하는 문자절대주의는 개신교 문자주의 수준을 훌쩍 뛰어 넘는다. 이 모두는 낯선 문화에 이식(선교)되기 위한 다차원적 노력과 전략이 부재한 소치였다. 그럼에도 이슬람교의 유입을 차단할 권한이 기독교에게 없다. 시간이 걸리겠으나 그 역시 우리 문화와 섞여 나름 역할 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최근 차별 금지법을 통해 불거진 성소수자의 혐오는 기독교가 수세에 몰린 자기 정체성을 타자부정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일종의 전략처럼 보인다. 이전과 달리 줄어든 자신들 입지를 성소수자를 희생양 삼아 확보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이다. 기독교 절대성 요구가 정부에게 이/저런 예외조항을 구걸하는 생존전략으로 바뀌고 있다. 말했듯이 자기부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자 부정으로 정체성을 지키려하는 것은 기독교 자체가 힘을 잃었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거듭 자기 절대성을 유지, 존속시키는 방식이 혐오로 나타났다. 예외 조항을 보장받아 세상으로부터 유리된 자신들 만의 공간을 만들겠다는 계산이다. 이는 자신들 기득권을 위한 이기적 발상으로 기독교 미래를 실종시킬 것이다. 그럴수록 기독교가 원죄의 종교가 아니라 원은총의 종교인 것을, 성소수자가 하느님의 ‘오발탄’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느님의 피조물인 것을 고백해야 옳다.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기독교가 혐오의 종교가 된 자신을 먼저 치유할 때가 된 것이다. 신명기 사관으로 자신들 역사를 납득하기 어려웠을 때 욥기라는 장르를 통해 죄와 고통을 달리 이해했던 성서기자들의 정신을 본받을 일이다. 신명기 사관의 눈으로 욥과 그의 고통이 혐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서가 확정된 교리를 모아 놓은 책이 아니라 인간 상상력을 계발시키는 은총의 보고인 것을 깨쳐 배워야 하겠다.

 

5.

이제 마지막으로 생물학적, 과학적 차원에서 혐오의 주제를 살펴보겠다. 어쩌면 이 시대가 각 영역에서 혐오문화를 부추겨 적대하는 이유를 진화 생물학, 혹은 뇌 과학 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을 듯싶다. 공감의 시대, 공감하는 인간을 말하지만 여전히 혐오가 일상인 현실에 대한 과학적 견해 역시 필요하다. 진화론자들은 혐오를 자신에 대한 집중, 혹은 자기 중독의 다른 표현이라 여겼다. 중독과 혐오가 동전의 양면처럼 늘 상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독이 혐오의 내면적 상태라면 혐오는 중독의 외적 현상이겠다. 더 흥미로운 것은 중독과 혐오가 모두 파충류의 뇌의 상태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이다. 이성적 사고를 표출하는 전두엽이 생기기 전 파충류의 뇌, 그 실제 본질이 중독과 혐오라는 말이다. 최근 스마트 폰은 한두 살 어린아이들도 작동할 수 있을 만큼 보편, 상용화 되었다. 이 멋진 기계에 몰두하여 아이들은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부모 존재도 아랑곳하지 않고 몇 시간씩 시간을 죽이고 있다. 이런 집중은 쉽게 중독으로 이행될 수밖에 없다. 중독된 아이는 자신의 집중이 방해받을 시 쉽게 공격적으로 응대, 반응한다. 이런 모습은 아이들의 뇌가 파충류 형태로 퇴행하고 있다는 사실의 일면이다. 소통의 수단인 언어 사용 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언어치료를 받는 아이들이 수없이 많아졌다. 오로지 공격적 반응으로 의사소통을 간간이 잇고 있을 뿐이다. 생성중인 어린아이의 뇌이기에 일반화하기 어렵겠으나 성인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과도한 자기 집중(착)으로서의 중독, 그의 외적 표현이 혐오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이점에서 이 시대의 ‘죄’를 ‘중독’이라 일컬어도 결코 과하지 않겠다. 그럴수록 물질이 개벽했으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의 말이 참으로 적실하다. 진화상 파충류의 시기를 한번 생각, 상상해 보자. 그 시기 외부적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집요한 집중, 나아가 자기 중독의 형태를 띠었다. 자신을 집중시켜 단번에 상대를 공격하여 먹잇감 삼는 능력을 키워낸 것이다. 인간 뇌가 파충류의 상태를 닮았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이렇듯 야만적으로 퇴행했음을 적시한다. 언론, 법, 종교 나아가 과학 기술이 있다한들 퇴행된 뇌는 그것을 혐오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선후라 할 것 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상은 이처럼 퇴행 중이다. 종교조차도 이에 편승하고 있으니 정신혁명 없는 물질개벽이 세상을 결코 옳게 이끌고 갈 수 없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백신으로만 치유될 것을 기대하는 것도 오산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 혐오로 자연 보복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 프란시스처럼 그렇게, 우리들 어머니들이 살았던 방식처럼 자연과 하나(불이)될 때, 오독의 결과겠으나 여전히 통용되는 영육 이분법과 결별할 때 바이러스 공포로부터의 근원적 해방, 자유가 우리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된 구원은 혐오를 가르치는 교회 교리에 있지 않고 그와 맞서 싸우는 세상 속 투쟁에 있다. 교회와 세상의 이분법도 코로나 이후 더 이상 유효할 수 없게 되었다. 거룩을 빌미로 교회를 세상 내 업소 중 하나처럼 여긴 성직자들 탓에....

 

6.

이제 글을 줄여야 되겠다.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마지막 글감으로 <<호모 데우스>> 의 저자 유말 하라리의 말이 떠오른다. 유대인으로서 동성애자로 살아야 했던 그가 유대-기독교전통으로부터 받았던 혐오 탓에 그는 불교적 명상에 심취했고 위 책도 불교 명상을 권하며 마무리했다. 정보력의 홍수, ‘데이터교’의 출현으로 전지한 ‘호모 데우스’가 될 수 있겠으나 그런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결론 지웠다. 인간은 자신이 쌓은 지식으로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깊은 명상을 통해 자신에 대한 과도한 집중(착), 중독 증세를 치유하여 공격을 능력으로 아는 현실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성서 속 스토리텔링(Storytelling)에 의지해서는 혐오를 치유할 수 없다고 저자는 판단했다. 성서 전통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도 컸던 탓일 것이다. 그럴수록 성서의 사랑을 교리로서가 아니라 삶의 실재로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이 크다. 차제에 기독교계의 차별방지법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일소되기를 소망한다. 어떤 진리도 실체적으로 불변할 수 없다. 자신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키 위한 과정적 진리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인습적 방식대로 교회 안팎에 만연된 혐오를 치유할 수 없다. 여전히 예외적 존재로 여기면서 차신을 정당화할 경우 이 땅의 사람들은 기독교 가르침에 더 이상 목말라 하지 않을 것이다. 일체 혐오를 혐오하는 기독교로 재탄생될 때 사람들은 그를 사랑의 종교라 여기며 그가 주는 물에 목을 축이려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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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0-12-22 20:25:47
혐오에 관한 윗글에 대한 반론
1. 서론

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생선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이 아주머니는 생선냄새를 달고 산다. 본인은 그 냄새에 익숙해져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는 데 자식 중 어떤 아이는 이 냄새를 아주 부끄러워한다. 좌판 깔고 생선 장사하고 있는 어머니 앞을 지나치면서도 어머니를 모르는척한다. 어머니 앞을 지나치면서도 친구들에게 어머니를 소개시켜주지도 않는다.

생선 파는 아주머니(냄새나는 기독교인)를 부끄러워하는 어떤 아이(주위의 평판에 민감한 기독교인)가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번쩍번쩍 구두를 신었다고 하여 다른 아이(불교인, 이슬람교인, 냄새나는 기독교를 부끄러워하는 또 다른 기독교인 등)와 합세하여 자기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2. 언론에 관하여

<언론이 ‘사실(fact)’과 ‘의견(opinion)’ 그리고 ‘이념(ideology)’을 구분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희대의 괴물 코르시카 탈출!, 네이 장군 코르시카 괴물 제압하려 파리 출발!, 꼬마 장군 툴롱港에 입항!, 나폴레옹, 네이 장군 진압!, 나폴레옹 황제 파리로 진격 중!, 나폴레옹 황제 만세!... 나폴레옹 시절부터만 하여도 언제 언론이 정직했습니까? 時流에 따라 춤추는 게 언론입니다.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언론에만 기대는 사람은 빠돌이가 되기 마련입니다. 각자가 공부 하고 각자가 판단하지 않으면 언론의 농간에 놀아나기 십상입니다.

<플랫폼 언론 ‘네이버’와 ‘다움’이 J 신문을 비롯한 수구언론과 결탁하여 보수정치이념의 전달자가 되었다는 경악스런 소식도 최근에서야 접했으니 더더욱 그러하다는 데 대하여>

실시간 댓글 위주로 하다 보니 드루킹 사건이 터졌습니다. 네이버와 다음은 極左애들의 놀이터였습니다. 그 부작용을 해소하느라고 네이버와 다음이 내부규정을 손질하자 이번에는 極右애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자, 내부규정을 또 바꾸어야 하나요? 극좌가 춤추는 건 경악할 일이 아니고, 극우가 춤추는 건 경악할 일인가요? 극좌는 천사이고, 극우는 마귀입니까?

3. 동성애 옹호 또는 혐오에 관하여

<동성애 따위를 혐오하는 걸 왜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동성애는 옹호할 의무만 있습니까?>

글쓴이는 극우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동성애를 극도로 혐오합니다. 내가 동성애를 극도로 혐오하는 건 잘못되었고, 글쓴이가 극우를 극도로 혐오하는 건 잘하는 일입니까?

好, 不好는 인간의 속성입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이나 극우를 혐오하는 사람이나 간에 그 사람의 가치관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사회규범에 어긋나지 아니하는 한...

내가 동성애를 혐오한다고 하여 동성애 하는 사람들이 동성애하는 걸 막지는 않습니다. 동성애 원하는 사람의 권리도 존중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들이 남몰래 동성애하는 걸 말릴 능력도 없습니다.

동성애를 혐오하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동성애 관련 입법화를 반대합니다. 동성애 입법추진자들이 일부 정치권을 등에 업고 무턱대고 차별금지 운운하면서 입법화하려는 작태에 대해 반대합니다. 나는 정치적으로 극우이므로 극좌의 정치적 준동에 반대합니다.

동성애 혐오 또는 옹호와 동성애 입법화 반대 또는 찬성은 별개의 사안입니다. 여기에 종교를 끌어들여 입법시키려고 지랄발광 해대니 종교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도 好不好가 있으므로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하는 겁니다.

4. 결론

기독교는 기독교의 냄새가 나고, 불교는 불교의 냄새가 납니다. 이건 아주 당연한 겁니다. 장을 담그면 구더기가 발생합니다. 구더기만 바라보지 말고 장을 바라봅시다.

기독교의 권위가 아무리 땅에 떨어졌기로서니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볼까?”하는 세상기준에 입각해서 기독교를 심히 까는 데 대해선 별로 공감하지 않습니다. 생선가게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는 아이에게 무슨 자존심이 있겠습니까? 오로지 남의 평판에만 신경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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