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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비유적 의미를 외면하는 목사들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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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1월 26일 (목) 13:02:39
최종편집 : 2020년 12월 10일 (목) 00:58:53 [조회수 :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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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서 목사를 찾으면, ‘기독교의 교직(교회와 교구를 관리하며, 예배를 이끌어가며 종교적 임무를 책임지는 전문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목자는 ‘1. 양을 치는 사람. 2. 신자의 신앙생활을 보살피는 성직자를 일컫는 말(교인을 양에 비유한 말)’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교회의 전문직인 목사를 목자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목사를 흔히 ‘pastor’라고 부른다. 영한사전에서 ‘pastor’는 ‘(목양자(牧羊者)라는 말에서 바뀌어) 목사(주로 교구민을 돌보는 면에 대해서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pastoral’이라는 형용사는 ‘양치기의‘와 ‘목사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특히 ‘pastoral epistles’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도 목사는 목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말 사전과 영한사전에서 목사를 목자로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요즘 교회에는 목사는 목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반복해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양은 예수님의 양을 말하는 것이지 베드로의 양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그분의 양이지만, 베드로는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양 무리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는 양의 우두머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목사를 목자라고, 그리고 교인들을 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사전에서 목사를 목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성경에서도 사전에서처럼 말한다면, 그들은 왜 베드로나 목사를 목자로 보지 않고 양 무리의 하나로 보려고 할까?


구약과 신약에서의 목자

구약에서 하나님은 목자에 비유되고 있다. 에스겔 34장 15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셨다. 시편 23장 1절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고 있고, 이사야 40장 11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비유적으로 목자라고 부른다. 사무엘하에는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면서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5:2)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레미야 23장 4절에서 보면 여호와께서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외에 시편 78장 71절, 이사야 44장 28절, 예레미야 3장 15절, 에스겔 34장 23절 등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세우시며 목자라고 언급하신 기록이 나온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모두 목자에 비유되고 있다. 베드로전서 기록자는 5장 2절에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라고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3장 20절에는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라고, 그리고 베드로전서 5장 4절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언급하면서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예수님을 “큰 목자”나 “목자장”이라고 일컫는 것은 예수님을 도와서 일하는 작은 목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0:28)에서 교인들을 양 떼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감독자를 목자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5장 2절의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에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는 말을 NIV에서는 “Be shepherd of God’s flocks”라고 번역하고 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21장에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내 양을 돌보는 목자가 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예수님은 “큰 목자” 혹은 “목자장”이고 베드로는 큰 목자 밑에서 그를 돕는 목자이다. 


목자의 비유적 의미

단어에는 흔히 과학책에서 사용되는 외연적 의미와 주로 시에서 사용되는 내포적 의미가 있다. 단어가 지닌 외연적 의미는 사전적 의미나 사실적 의미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내포적 의미는 비유적 의미 혹은 상징적 의미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외연적 의미나 내포적 의미 대신 사전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라는 말을 사용하겠다. 

장미를 예로 들면, 장미의 사전적 의미는, 사전에 나와 있는 대로, ‘장미과의 낙엽 관목으로 높이는 2-3m, 가시가 많으며, 오뉴월에 여러 색깔의 고운 꽃이 핀다.’이다. 그리고 비유적 의미는 장미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당신은 장미이다.’라고 하면, 당신은 장미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말한다.

목자에도 사전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가 있다. 목자의 사전적 의미는 ‘양을 치는 사람’이다. 그런데 목자의 비유적 의미는 목자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헌신적인 돌봄’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비유적으로 말했을 때, 여호와는 목자처럼 나를 돌보아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당신은 장미이다.’에서 장미의 사전적 의미만을 생각한다면, 당신은 장미라는 식물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에서도 목자의 사전적 의미만을 생각한다면, 여호와는 양을 키우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목사가 교인들을 양이라고 부를 때 그 말을 비유적으로 이해하면, 교인은 목사가 희생적으로 돌보아야 할 사람이 되지만, 사전적 의미만을 생각하면 목사는 사람이고 교인은 짐승이 된다. 그래서 각 단어가 지닌 비유적 의미를 중시하느냐 사전적 의미를 중시하느냐에 따라서 뚯이 아주 달라진다. 성경에 나오는 목자라는 말은 목자의 비유적 의미를 담고 있다.

여호와를 목자에 비유하는 시편 23편에서 우리는 목자의 비유적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는 양을 풀밭으로 그리고 물가로 인도하는 사람,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양을 어려움에서 지켜주는 사람, 한 마디로 양이 평안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목자라는 단어에서 연상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시 95:7)이라고 노래했다.

신약의 히브리서 13장에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상한 자를 싸매어주시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분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신약에서의 ‘목자’에는 단순히 양을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양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셨을 때, 단지 양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좋은 꼴을 먹이는 것을 뛰어넘어서 양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명을 받은 베드로는 순교함으로써 목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했다.


마치면서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우리의 큰 목자이시고 베드로나 목사는 예수님을 돕는 목자들이다. 그리고 베드로나 목사는 교인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교인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양 떼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목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호되게 질책하셨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겔 34:4) 

신약시대에도 예수님은 목자들 가운데에 삯꾼들이 있다고 지적하셨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만, 삯꾼 목자는 양을 돌보지 않고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해치느니라”(요 10:12)고 말씀하셨다. 구약과 신약시대에 목자직을 맡은 사람들 가운데에 무책임한 삯꾼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한국교회에도 삯꾼 목사가 많다. 그런데 그런 목사들이 흔히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을 먹이라고 명하신 것을 언급하면서 베드로는 목자였고 자기도 양을 치는 목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실상 그들은 교인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교인들을 위해서 희생하려고 하기보다는 교인들 위에 군림하면서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한다. 이런 삯꾼들이 한국교회에는 아주 많다.

그런 삯꾼 목사들에게 실망한 교인들은 목사가 교인들을 자기의 양이라고 부르는 데에 역겨움을 느끼면서 목사 역시 주님의 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양을 치라는 명을 받은 베드로 역시 주님의 양 떼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왜 삯꾼 목사들이 양산되고 있는가? 양을 키우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유대인들은 ‘목자’의 비유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목자이거나 날마다 목자의 삶을 지켜보며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즐겨 노래하고, 예수는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양을 먹이라”라고 말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에게 사랑, 돌봄,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장미를 손수 키우거나 주변에서 흔히 보기 때문에, ‘장미’에서 아름다움을 곧바로 연상한다. 그래서 ‘당신은 붉은 장미’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이미지가 생생하게 드러나며 가슴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양을 키우는 민족이 아니어서 목자가 우리에게 생소하기 때문에 목자라는 단어를 통해서 연상되는 것이 별로 없다. ‘목자’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남에게서 빌려온 단어니다.그래서 목자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이미지가 구체적이거나 생생하지 못하고 가슴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목자’는 단지 책을 통해서 알게 된, 머리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그런데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오래 가지만, 머리로 기억하는 것은 쉽게 잊는다. 이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어느 한국 목사가 교인들을 ‘나의 양’이라고 말할 때, 그는 목자의 사전적 의미만을 생각하기 쉽다. 다시 말하면, 목사가 교인들을 자기의 지배를 받는 열등한 존재로 생각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목양이라는 말이 성경에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쓰였지만, 한국교회에서는 그 말이 사전적 의미로 바뀌게 된다.

목자의 비유적 의미를 잘 알고 있던 유대 사회에서도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에 자기가 맡은 양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삯꾼들이 있었다면, 목자의 삶을 잘 알지 못하는 한국교회에서는 목자라는 단어를 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삯꾼들이 양산될 가능성이 아주 많다.

지금 목사들이 권위의식에 사로잡혀서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사제들의 교권주의로 인해서 중세 교회가 부패했던 것처럼, 한국교회는 목사들의 권위의식 때문에 부패해가고 있다고 본다. 이 말이 옳다면,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사들이 목자의 비유적 의미를 외면하는 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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