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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자존심의 나라다. 이런 시가 있다.
이성으로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척도로도 잴 수 없다.
러시아는 비교할 수 없으니,
오직 믿어야 할 뿐.
츄체프(Fyodor Tyutchev, 1803-1873)의 시인데, 러시아인들이 자주 인용한다. 처음 들었을 때, 뭐 이런 시가 다 있나 싶었다. 러시아인들이 이 시를 읊으면 나는 대꾸했다. “땅덩어리가 커서 이해 못한다는 것인가? 복잡해서 이해 못한다는 것인가? 이해 못하니 참고 살라는 것인가?” 그러면 응답이 없다. 민망한 것은 러시아인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고 질문한 나 자신이다.
2000년에 대통령이 된 푸틴은 임기를 마치고 잠시 국무총리로 물어났다가 다시 대통령이 된지 20년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미국에 맞서서 ‘러시아의 자존심을 잃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러시아인에게는 실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목이 중요하다. 자존심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스탈린 평가에서도 드러난다. 스탈린이 독재자라는 말을 러시아 사람에게서 듣기 힘들다. 우선, 러시아 통치자였던 스탈린이 독재자였다는 표현 자체가 달갑지 않다. 그것보다는 히틀러 군대를 막아냈고, 소련의 공업화를 이루어 미국과 견준 지도자였음이 더 중요하다. 스탈린이 소련 인민 천만을 죽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그가 표트르 1세처럼 러시아를 드높인 지도자였다는 자랑에 묻힌다.
러시아 자존심의 반대편에는 ‘유럽의 합리주의’가 있다. 유럽의 합리주의는 개인주의이고, ‘따지는’ 부정적인 태도로 규정된다. 정이 많고 따지지 않는 러시아인은 합리주의자가 아니다. 러시아에서 존경 받는 사람은 의리가 있고 화끈한 사람이지, 개인주의적이고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 자연히 인간관계가 일보다 중요하다. 실수하는 화끈한 인간이 일 잘하는 비열한 인간보다 낫다. 일이란 되면 좋고 안 되어도 좋은 것이다. “일은 그냥 하는 것이지, 한국인처럼 조바심을 내며 해야 하나?” 러시아인은 이런 태도다.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의 자존심을 높인 황제로 기억된다. 예카테리나 2세가 독일 출신이었다고 해서, 남편을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고 해서, 농노제를 심화시켰다고 해서, 많은 정부(情夫)를 둔 황제였다고 해서 비판 받지 않는다. 반대로 그녀는, 표트르 1세와 더불어 대제(大帝, the Great)로 불린다. 영토를 최대로 넓혔기 때문이라기보다, 러시아 민족의 자존심을 높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2세 때부터 유럽 정치무대에서 앞에 서게 됐으니, 그녀는 러시아인의 자존심을 한껏 드높인 황제로 존경 받는다.
예카테리나 2세가 젊은 귀족들과 정을 통했다는 것도 문제되지 않는다. 황제의 정부(情夫)는 모든 귀족을 대신해서 봉사한 셈이고, 황제는 그를 통해서 권력을 나누어 준 셈이다. 귀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자신들을 존중한 황제다.
특히 포툠킨(Grigory Potyomkin, 1739~1791)이 그랬다. 그는 예카테리나의 남편을 처리한 오를로프의 근위대 소속 청년 장교였다. 오를로프가 황제에게서 멀어지자 포툠킨이 그를 대신해 황제의 정부가 됐다. 포툠킨은 유능한 사람이었다. 예카테리나도 그것을 알았다. 둘은 애정뿐 아니라 권력도 나누었다. 포툠킨은 황제와 같은 지위를 누렸고, 죽을 때까지 예카테리나에게 헌신했다.
두 사람은 이상이 같았는데, 오스만 터키를 정복하고 러시아를 과거 로마와 같이 만드는 것이었다. 정복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1783년 포툠킨은 터키 땅이었던 크림 반도와 흑해 연안을 점령해 황제에게 바쳤다. 1787년 황제를 함선에 태우고, 흑해를 건너 크림반도까지 항해하는 화려한 행사를 열었다. 그것은 마치 과거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행차 같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멀리 떨어진 가치나 성에 고립된 파벨은 정치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는 손자 알렉산드르에게 왕위를 물려주길 원했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들 파벨 1세(재위 1796-1801)가 황제에 올랐다. 황제가 되자마자, 표트르 1세부터 시행됐던 '군주가 후계를 선택하는 법'을 폐지하고 '장자 계승법'을 만든 것을 보면, 그를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알 수 있다.
파벨은 행정 기관을 중앙집권식으로 고쳐서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도록 했다. 러시아 권력은 본래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나, 1775년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가 폐지한 법을, 파벨이 다시 뒤집었다. 이것은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조치였다.
군대에는 프로이센식 규율을 도입했다. 프로이센 군대는 러시아 군인들이 오랫동안 대적해 싸운 상대인데, 그들의 규율을 따라 하라고 강요하니 분노했다. 게다가 왕궁 근위대보다 가치나에서 데리고 있던 친위대를 선호하자, 장교들은 황제에게서 돌아섰다.
파벨은 자신의 능력을 믿었지만 변덕스러웠고, 정책의 일관성이 없었다. 농민 정책도 일관성이 없었고, 외교도 일관성이 없었다. 계속되는 프랑스 혁명의 물결이 러시아 지식인에게 미치던 때였다. 파벨은 검열을 강화하고 외국에서 책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프랑스풍 옷도 입지 못하도록 했다.
1798년에는 프랑스와 맞서는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군대를 파견했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자, 이번에는 영국과 외교관계를 끊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1년도 안 돼 오락가락이었다.
파벨은 어머니와 얽힌 기억을 모두 지우려고 했다. 죽은 아버지 표트르 3세를 복위시키고, 어머니와 가까웠던 귀족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버지 표트르 3세를 죽인 불한당들이었지만, 어머니를 도와 나라를 일으킨 충신들이었다. 파벨이 이들을 처벌하자 측근들도 황제에게 등을 돌렸다. 귀족들이 참을 수 없었던 사건은, 중세 기사에게나 요구할 법한 ‘기사도 규범’(Code of Chivalry)을 들이대며 충성을 강요한 것이었다.
일찍부터 황제 암살음모 소리가 들리고,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이 커지면서 황제 파벨 1세는 몰렸다.
파벨은 가치나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지만 어머니와 귀족들이 살던 궁전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새 궁전 미하일롭스키(Mikhailovsky Castle)를 짓도록 했는데, 그것은 궁이라기보다 견고한 성이었다. 성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관통하는 두 강이 만나는 모서리에 있고, 정문에는 해자가 있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성의 마당은 사면을 막은 건물의 중앙에 있다. 성에는 암살에 대비해서 비밀 문과 통로를 만들었다.
파벨이 황제가 된 다음 짓기 시작한 미하일롭스키 성은 1801년 완성돼 가고 있었다. 파벨은 될수록 빨리 그 성에 가고 싶었다.
러시아 명장 중에 베니히센(Leonty von Bennigsen, 1745-1826)이라는 독일출신 장군이 있다. 그는 독일귀족 장교였는데 1773년 러시아로 와서 러시아군 장교가 됐다. 1798년 파벨은 베니히센 장군을 해임했다. 해임된 베니히센은 귀족들과 황제의 폐위를 모의하기 시작했다.
나폴리 태생 데리바스(Iosif Deribas, 1749-1800) 해군 제독도 계획에 참여했다. 그런데 거사일을 앞두고 심한 열병을 앓았다. 음모가 그를 통해 새어나갈 수 있었다. 독일계 백작이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이었던 팔렌(Peter von der Pahlen, 1745-1826)이 데리바스를 독살했다. 팔렌 역시 파벨이 해임한 귀족이었다. 거사는 미뤄졌다.
황제 파벨 1세는 쫓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파벨은 완성되지 않은 미하일롭스키 성으로 들어갔다. 성으로 들어간 지 40일이 되었을 때다. 1801년 3월 23일 밤, 해임된 귀족들이 성으로 들이닥쳤다. 마침 성의 경비대장은 외박 중이었다. 장군들이 성으로 들어왔으니 경비원이 제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에는 23세 맏아들 알렉산드르가 있었다. 거사자들은 아들에게 아버지 황제의 폐위 계획을 알렸다. 아들은 동의했지만 아버지를 죽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황제의 침실로 침입해 황제를 탁자에 앉힌 뒤, 퇴위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황제가 저항하자 주보브(Nokolay Zobov, 1763-1805)가 무거운 담뱃갑으로 황제를 내려쳤고, 다른 거사자들이 목을 졸랐다. 주보브는 장군이었고, 예카테리나 2세의 정부였던 포툠킨의 직속부하였다.
일을 끝낸 귀족들은 황제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 알렉산드르는 괴로움과 죄책감에 울기만 했다. 주보브는 우는 알렉산드르에게 말했다. “일어나요. 가서 통치해요!”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르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귀족들이 직책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거사자들은 다시 기용됐다. 알렉산드르는 1812년 나폴레옹과 대조국전쟁(大祖國戰爭)을 치른 황제였지만, 재위 내내 신비주의에 빠져 지냈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