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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선고 받은 이스라엘이 살길은?” 미가6장9절~16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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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11월 09일 (월) 20:36:48 [조회수 :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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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선고 받은 이스라엘이 살길은?” 미가6장9절~16절

 

1. 두 가지 죄악

 

① (9절)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 미가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심판대’다.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최종판결을 ‘선고(언도)’한다. (* 선고(宣告)-재판정에서 재판장이 판결을 공포하는 행위로써 재판의 효력이 생기며 판결문 원본을 낭독하고 판결사유에 대한 요지를 설명)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하듯이 이스라엘의 죄목을 두 가지로 열거한다.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이스라엘의 첫 번째 죄악은 ‘경외(존중)’해야 할 하나님을 ‘멸시(무시)’한 것이다. 요즘말로 바꾸면 하나님을 깔보고 우습게 여겼다.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 하느니라’ 하나님을 삶의 주관자로 경외하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써의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데 있다. 이것이 최고의 지혜이며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지켜야할 마땅한 도리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Free Will, 自由意志)’는, 최고의 사랑과 존중이기에 그 은혜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한다. (삼상2:31)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사랑과 존중으로 자발성을 허락하셨던 하나님께서 강제적인 조치를 취하시는 이유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의 ‘실낙원’과 일맥상통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전10: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에 보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도서가 전하는 균형 잡힌 인생의 지혜다. (고전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자유롭게 방종하기보다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지혜다.

 

② (10절~12절) “악인의 집에 오히려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거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궤사 하도다”

▶ 첫 번째 죄목은 하나님과의 관계였고 이어지는 두 번째 죄목은 이웃과의 관계다. (메시지성경) ‘너희는 내가, 속이고 빼앗아 부자가 된 너희를 그냥 좌시하리라고 생각했느냐?’ 가증한 ‘에바’(바구니라는 뜻의 곡물을 측정하는 단위), ‘부정한 저울과 거짓 저울추’ 오경과 예언서에 누누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바다. ‘부자들의 강포’는 기득권으로 횡포를 저지르는 ‘갑질’이다. 더불어 간사한 속임수로 이웃을 속이는 거짓과 험담이다. 주목할 점은 심판의 기준이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경제생활’에 주목하신다. 물질이 신앙의 척도인 까닭이다. (마6:21)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를 살피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눅16:10~11)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전하는 바 ‘보이는 물질’에도 불의한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할 리 만무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격언대로 ‘온전하고 의로운 제사’가 아니라 ‘눈먼 것 저는 것’을 드린다. 내 손에 든 물질이 과연 누구의 소유인가! ‘하나님의 은혜냐, 나 자신의 공로냐!’ 만일 주의 은혜라고 여겼다면 주께 감사하며 기꺼이 선용했겠지만 이스라엘은 자신의 공덕이라 여겨 과시하고 악착같이 축적했다.

 

 

2. 하나님의 처벌

 

① (13절~14절)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중히 상하게 하였으며 네 죄를 인하여 너를 적막하게 하였나니 네가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속이 항상 빌 것이며 네가 감추나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 (메시지성경) ‘마지막 한 푼까지, 너희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리라. 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배고프고 허기지고, 마음도 허기질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결국 내세울 것 하나 없게 될 것이다. 삶도 파산하고 영혼도 황폐해지리라’ 마치 아담이 범죄 함으로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저주를 받은 것처럼 죄로 인해 삶에 내려지는 무서운 형벌이다. 지옥의 별칭인 ‘무저갱無低坑, Abyss)’은 채울 수 없는 인간의 탐욕을 상징한다. 탐욕에 는 만족이 없고 만족이 없기에 행복할 수 없다.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같은 좀비와 드라큘라처럼 갈증과 허기를 채우지 못한다.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 대표적인 거짓신화다. 광야에서 내린 ‘만나’는 ‘필요를 구하는 삶’의 방식을 증거 한다. 쌓아두면 벌레가 나고 썩어버리는 만나처럼 ‘필요이상의 것’을 구하고 축적하면 반드시 부패한다. 프랑스격언대로 ‘집을 두 채 가진 자 이성을 잃고 두 여인을 가진 자 영혼을 잃는다.’ 그래서 ‘과잉’은 축복이 아닌 저주다. ‘필요이상의 것’을 주시는 이유는 나눔과 섬김으로 선용하는 데 있다. 날마다 감사로 넘치는 삶의 비결이 필요를 추구하는 ‘아굴의 기도’다. (잠30:8~9) ‘나를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지 마시고 다만 나에게 매일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그렇치 않으면 내가 배가 불러서 주를 저버리고 여호와가 누구냐고 말하거나 아니면 내가 가난해서 남의 것을 도둑질하여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③ (15절) “네가 씨를 뿌리나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을 밟으나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 이토록 가혹한 처벌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진실을 체험학습을 통해 몸으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십일조의 정신은 ‘물질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에 있다. (말2:10~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 시대는 십일조를 안 드린 게 아니다. 문제는 ‘눈먼 것, 저는 것’으로 드린 것이다. 말라기의 핵심 메시지는 ‘온전한 십일조’다. ‘온전한’에 초점이 있다. ‘십일조’의 형식을 넘어 ‘온전한’이란 단어 속에 담겨진 정신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이 아니라 도리어 독이 된다.

 

 

3. 여로보암의 죽는 길’ VS 다윗의 살길

 

① (16절)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이는 나로 너희를 황무케 하며 그 거민으로 사람의 치솟 거리를 만들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

▶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오므리는 사마리아에 도읍을 세운 왕이고 아합은 오므리의 아들이다. 오므리와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패역한 왕가를 대표한다. (왕상16:25~26)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왕상16:30~33)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오므리와 아합의 공통점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함의 길’로 행했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의 왕들의 행보는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로 구분된다. ‘다윗의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삶의 방식을 일컫는다. 이와 달리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의 길’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여로보암의 길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왕상13:25~33’에 기록된 대로 금송아지우상으로 하나님을 대신했고, 자기 멋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했다. 중요한 점은 여로보암은 제사를 안 드린 게 아니라 잘못 드린 것이고, 하나님을 안 섬긴 게 아니라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겼다는 사실이다. 왕이라고 모두 똑같은 왕이 아니다. 지도자라고 모두 똑같은 지도자가 아니다. 거룩한 직분을 맡았다고 모두 똑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앞에 서 있다고 모두 선배가 아니다. 정면교사와 반면교사를 구별하는 ‘분별력’이 요구되는 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축복의 본보기 다윗이 아니라 저주의 본보기 여로보암을 좇았다.

▶ 미가는 피할 수 없는 준엄한 심판을 이스라엘에 선고한다.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은 법정최고형인 ‘사형선고’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멸망한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신다. 그 구원의 비전이 메시아(그리스도)왕국의 도래 곧 하나님의 통치다. 개인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이들에게도 ‘살길’을 열어주셨다. 다윗의 자손, 예수를 ‘그리스도(왕)’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약속이다. 미가서가 전하는 ‘기독교의 복음’(기독, 그리스도, 메시아)이다. (요1: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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