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키 감렛’이라는 현대 발레가 있다. 러시아 발음에는 ‘ㅎ’(H)이 없다. ‘ㅎ’은 목구멍 소리로, 모음이 붙으면 유성음이 된다. 러시아 자음 중 비슷한 것으로 ‘ㅎ’을 표시해야 하는데, ‘ㅎ’(Х) 발음은 무성음이므로 피하고, 목구멍 소리와 가장 가까운 유성음 ‘ㄱ’(Г)으로 표시한다. 그래서 홍콩은 ‘강콩’(Gang Kong)이 되고 햄릿은 ‘감릿’(Gamlet)이 된다.

‘루스키 감렛’은 ‘러시아 햄릿’ (The Russian Hamlet)이라는 뜻이다. 호르바토바(Elena Horvatova)가 쓴 글을 바탕으로, 러시아 발레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Boris Eifman, 1946- )이 1999년 무대에 올렸다. 음악은 베토벤과 말러의 곡을 사용한다.

‘러시아 햄릿’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 파벨(Pavel/Paul, 1754-1801) 1세를 가리킨다. 파벨 1세의 운명이 세익스피어의 햄릿의 운명과 닮은 데서 그런 제목을 붙였다.

표트르 1세부터 예카테리나 2세까지 러시아 황제의 계보는 복잡하다. 1682년부터 1762년까지 황제가 8명이었는데, 왕위가 친아들에게 이어진 경우는 없다. 8명 중 여자가 4명이고 재위 기간도 길지 않다.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졌던 황제는 엘리자베타(Elizabeth Petrovna, 1741-1762)다. 그녀는 표트르 1세의 딸이었는데, 쿠데타로 집권해 21년 동안 통치했다. 그녀 이전에도 황제가 4명이나 있었다.

엘리자베타는 혼인하지 않아 아들이 없었다. 독일로 시집간 언니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그가 표트르 3세이고 며느리가 예카테리나 2세다. 엘리자베타는 속히 아들을 보기 원했다. 파벨에게 시집온 예카테리나는 10년 만에 아들 파벨을 낳았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파벨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었고, 왕위를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할머니 엘리자베타는 손자가 젖도 떼기 전에 데리고 가서 손수 키웠다.

할머니 황제는 호화롭게 살았고 정부(情夫)도 많았다. 황태자비였던 어머니 예카테리나도 그랬다. 할머니 황제가 죽고 아버지 표트르 3세가 왕위에 오르자 곧 살해됐다. 그리고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 둘러싸인 어머니가 제위에 올랐다. 파벨의 나이 8세 때였다.

파벨은 사춘기가 되자 어머니 황제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왜 죽었고, 어머니는 왜 황제가 됐는가? 황제였던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파벨은 어머니의 정부(情夫) 오를로프(Grigory Orlov, 1734-1783)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소문을 들은 터였다. 어머니 입에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아들은 어머니를 의심했다.

파벨은 18살 성인이 됐다. 그리고 후계자로 수련 받기 위해 왕궁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자신이 표트르 3세의 유일한 혈육이므로, 마땅히 러시아의 차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후견인도, 통치는 남자가 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파벨이 성장했으니 어머니 예카테리나와 공동통치를 해야 한다는 소문까지 나왔다.

아들을 경쟁자로 의식한 예카테리나는, 자신이 누리는 황제의 권력에서 아들이 멀리 떨어지도록 했다. 그리고 빨리 아들을 혼인시키려 했다. 왕위를 자신이 누린 후에 손자에게 물려주려는 심사였다.

예카테리나는 독일 귀족 가문에서 나탈리아(처녀명 Wilhelmine, 1755-1776)라는 처녀를 찾아냈다. 19살 파벨은 18살 나탈리아와 혼인했다. 파벨은 그녀를 사랑했다. 나탈리아는 혼인한지 3년도 못 돼 첫 아이를 낳다가 아이와 함께 죽었다.

손자를 보지 못한 예카테리나는 다시 서둘러 독일 귀족 가문의 처녀를 찾았다. 아들 파벨은 첫 아내가 죽은 지 6개월도 안 돼서 마리아(처녀명 Sophie, 1759-1828)와 혼인했다. 혼인한지 1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원하던 손자 알렉산드르(Aleksandr 1, 1777-1825)를 얻었다. 할머니 예카테리나는 손자를 데려가서 직접 길렀다.

예카테리나는 차르스코예실로 궁전에 올 때마다 남쪽에 있는 사냥터를 즐겨 찾았다. 1777년 예카테리나는 첫 손자를 본 선물로 사냥터를 파벨에게 주었다. 파벨은 이탈리아인 건축가를 불러 궁전 건축을 맡겼다. 사냥터는 파블롭스크(파벨의 거주지)가 됐고, 파벨의 아내는 그곳을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궁전으로 가꾸었다.

1783년 예카테리나는 다시 가치나(Gatchina) 성을 아들 내외에게 주었다. 가치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훨씬 더 떨어진 곳이다. 예카테리나가 파벨에게 성을 준 것은 아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떼어 놓으려는 의도였다.

파벨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이산, 正祖, 1752-1800)와 여러모로 닮았다. 10살 어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나, 조부 영조의 관심이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나, 죽은 연도까지도 비슷하다.

정조는 노론이 장악한 군영에 맞서 친위 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만들었다. 장용영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와 정조가 머무는 화성행궁(華城行宮)을 지키고 화성 행차를 호위했다. 장용영은 정조가 사대부들에게 왕의 힘을 보여주려고 의도한 군사조직이었다.

가치나 성은 본래 오를로프의 영지였는데, 그가 죽자 예카테리나가 파벨에게 준 것이다. 오를로프는 파벨의 아버지 표트르 3세를 암살했던 어머니의 정부(情夫)였으니, 어머니의 선물은 아들을 정신적으로 살해하려는 것과 다름 없었다. 파벨은 오를로프의 기억을 깡그리 없애기 위해 성을 대대적으로 고쳤다. 그리고 가치나 성 앞마당을 연병장으로 만들었다.

어머니 예카테리나가 황제로 34년을 다스리는 동안, 파벨의 소외감은 극에 달했다. 그는 어머니와 어머니를 에워싼 귀족들이 두려웠다. 자신의 두 아들도 예카테리나 손에 있었다. 어머니 예카테리나가 예순을 넘긴 즈음에 파벨은 가치나 성에서 사병들의 열병식을 갖기 시작했다. 죽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였다.

때는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다음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혁명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더 이상 계몽군주가 아니었다. 혁명의 영향으로 옆 나라 폴란드가 자유주의 헌법을 만들려고 하자 군대를 파견해 폴란드 동쪽을 합병하고, 1794년에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해 버렸다.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혁명을 꿈꾸는 자유주의자들이 러시아에도 생겼다. 예카테리나 2세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유럽 군주들에게는 서신을 보내 프랑스 왕정을 복구시키자고 호소했다. 1793년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시민들에게 처형되자 당황한 예카테리나는 프랑스와 단교했다. 이 즈음 자신의 건강도 나빠졌다.

이제는 후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왕정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들 파벨에게 물려줄 생각도 없었다. 손자 알렉산드르를 다음 황제에 올리려고 했지만, 아들 파벨은 건재했고 손자 알렉산드르는 사춘기 소년이었다.

1796년 후계를 정하지 못한 채, 예카테리나 2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보름을 못 넘기고 차르스코예셀로 궁에서 죽었다.

파벨은 42살에 갑자기 황제가 된 셈이었다.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는 35년 동안 자신의 경쟁자였고 감시자였다. 1797년 대관식을 마치자마자 파벨은 ‘장자가 제위를 계승한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한풀이 법령이었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르-넵스키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에 묻혀 있는 아버지 표트르 3세의 유해를 꺼냈다. 유해는 넵스키 대로를 가로질러 페트로파블롭스크(Peter and Paul Fortress)까지 운구됐다. 운구는 어머니가 총애했던 신하들이 맡도록 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에는 러시아 황제의 석관들만 놓인 교회가 있다. 거기서 파벨은 35년 전 치러야 했을 아버지 표트르 3세를 위한 황제 대관식을 거행한 다음, 유해를 어머니 석관 옆에 모셨다.

치욕을 겪은 귀족들이 새 황제 파벨 1세를 가만두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