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저고리(2020.11.1)

  52주 달력을 만들려는 생각은 꽤 오래되었다. 독일에서 ‘대림절부터 대림절까지’(vom Advent zum Advent)라는 달력을 본 후 부터이니 벌써 25쯤 된 듯하다. 이 달력은 52주 동안 독일의 유서 깊은 교회의 내부 장면을 주요 이미지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뒷면까지 활용해 교회의 역사와 교회력에 따른 의미를 깨알같이 담아냈다. 그만큼 독일교회가 지닌 콘덴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존(Amazon.com)에 들어가면 벌써부터 대림절이란 이름의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국제시장 시간의 기준은 정월 초하루에 한해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성탄일을 4주일 앞두고 이미 출발한다. 그러니 이즈음은 시간을 파는 사람들이 한 몫을 위해 달리는 대목인 셈이다. 여기에 달력 하나 달랑 만들어 장터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으니, ‘도서출판 하루의 산책’은 참 초라한 시간 행상(行商)처럼 여겨진다.  

  새해를 겨냥해 ‘날마다 십자가’란 캘린더를 선보인다. 11월의 문을 열기 전에 인쇄본을 마무리했으니, 지각출발은 아니다. 늦여름 내내 장맛비가 계속되어 십자가 촬영에 어려움이 많았고, 작가 두 사람이 시간을 맞추느라 더 늦어졌을 것이다. 캘린더는 사계(四季)를 담아야 한다는 고집도 가을 따라 지분지분 시간을 보냈을 듯하다. 도림교회 예빛갤러리에서 십자가를 실어온 것이 7월 말이니 꼭 세 달 걸렸다.

  두 작가는 평생 이런 작업으로 세월을 보냈지만, 역시 상대가 십자가이고 또 교회를 겨냥한 일인지라 전문성이전에 훨씬 마음고생을 했을 법하다. 그 증거는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캘린더에 얼굴을 비친 십자가 53점은 스튜디오에서 예쁘게 촬영한 것이 아니다. 우리 동네 재개발 지역인 내손동 옛 동네를 배경으로 삼았다. 재생이란 미명에 등이 떠밀린 사람들은 다시 그 동네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다만 주민들의 삶을 흔든 시간은 달력의 풍경으로 남게 되었다.

  이끼가 반들거리는 시멘트 담장, 그림자가 드린 누런 철 대문, 반짝이는 아스팔트 바닥, 길가에 버려진 녹슨 철물, 아무렇게난 색칠한 붉은 벽돌 담,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유리창 그리고 그곳에는 여전히 민들레가 피고, 유난히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 작가들의 안목으로 십자가는 그렇게 사람이 떠난 텅 빈 공간을 배경으로 삼았고, 허전한 뒤안길조차 따듯하게 감싸 안았다. 십자가가 어울린 그곳이 다시 주목을 받으니 그야말로 십자가와 더불어 부활한 셈이다.

  이제 겨우 단톡방 수준에서 홍보를 한 셈인데, 여러분으로부터 호평을 들었다. 마치 뜻밖의 전시장에 온 기분이라며, 작가들이 펼친 고졸한 아름다움과 52주로 짠 기획력을 칭찬하였다. 한바탕 십자가를 펼치면서 두 가지 메뉴를 곁들였다. 교회력과 톨레레게이다. 52주 달력의 장점은 주일부터 시작하는 주간 달력인 만큼 한 주 단위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하다. 일상의 시간은 마침내 하나님의 달력이 되었다. 

  무엇보다 톨레레게는 덤이다. 소주제를 붙여 365등분 한 성경을 365일 동안 읽는 톨레레게 성경통독 프로그램은 이미 바이블 25를 통해 매일 해설을 연재하면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번에 ‘날마다 십자가’와 연계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고마운 시간선물이다.

  겨우 달력 하나를 꾸미면서 자화자찬이 풍성하다. 중요한 것은 종이로 느끼는 달력 이전에 2021년에 내게 주어질 생생한 시간표이다. 매일 소비하는 하루짜리 일력이나, 혹은 한두 달짜리 월력이 보편적이라지만 그렇다고 시간의 의미조차 흔한 것은 아니다. 1년을 한 바탕에 담은 고난달력이나, 52주간 동안 매주 마주할 주간력처럼 누구든지 시간을 쪼개고 분류하는 편집자가 될 수 있다. 바로 자신이 누릴 시간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갑갑한 시절이지만 어느새 11월 첫날이다. 사철가로 따지면 아직은 “한로삭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은 어떠한고”를 노래할만한 대목이다. 우리를 향해 다가올 2021년 지혜로운 시간설계를 위해 남은 두 달 시간의 무너미 고개를 묵묵히 넘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