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이제는 시대를 대표하는 감독이 된 크리스토퍼 놀란이 처음부터 줄곧 천착했던 주제는 시간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알린 《메멘토》(2000)로부터 가장 최근작인 《덩케르크》(2017)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신이 만드는 거의 모든 영화의 내용와 형식에 시간이라는 주제를 집요하게 각인시켰다. 시간만큼 우리의 일상에 가깝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없는데 정작 우리는 이 시간의 본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을 늘 이상하게 여겼다는 감독은 이렇게 자신의 물음을 끊임없이 영화 속에서 구현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감독은 이미 시간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했다고 생각한 순간, 놀란은 또 다시 놀라운 시간 이야기를 우리에게 선사했으니 그것이 바로 영화 《테넷》이다.

《테넷》은 시간 여행에 관한 영화다. 어떤 계기로 주인공이 과거나 미래로 이동하여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는 시간 여행 영화를 우리는 이미 수도 없이 봐왔다. 멜로에서 SF까지 시간 여행이란 소재는 진부할 정도로 차고 넘친다. 하지만 《테넷》은 이제껏 봐온 적 없는 방식으로, 완전히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시간 여행을 묘사한다. 지금까지의 영화들에서 묘사한 시간 여행의 방식은 대개가 과거의 한 시점으로 점핑하여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즉, 어떤 특정한 시점으로 순식간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타임 슬립’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테넷》에서 과거로 이동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영화에서 과거의 한 시점으로 가는 방식은 시간을 거꾸로 역행하여 과거의 시점으로 가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10년 전의 과거로 가고자 할 때 타임 슬립의 방식이 순식간에 10년 전 시점으로 이동한다면 《테넷》에서는 시간을 역행하여 거꾸로 10년을 살아가야만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영화는 이 방식을 타임 슬립이 아니라 인버전(inversion), 즉 도치(倒置)라고 부른다.

이 과정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영화는 등장인물 과학자의 입을 통해 엔트로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일반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죽하면 감독이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했을까.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그런데 느끼라고 말해놓고서도 영화는 설명의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영화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대한 감독의 집요한 탐구와 그의 창조적인 구현의 방식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대체 시간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 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 들자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놀란 감독의 시간 탐구는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생각나게 한다. 모두에게 익숙하나 정작 본질은 알지 못하는 무엇, 그렇게 시간은 일상의 신비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시간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는 아마도 영원일 것이다. 영원이란 무엇일까? 영원은 끝없이 계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초월이다. 따라서 영원을 생명과 연결시킨 영생(永生) 역시 시간 속에서 끝없이 지속되는 삶이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미래까지도 죽음이라는 단절 없이 지속되는 삶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을 초월한 삶을 의미할 것이다. 이 영생을 가장 신학적인 의미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사용한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전한 적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요 5:24) 헬라어 원문은 이 문장을 분명한 현재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영생은 미래에 얻어질 무엇이 아니라 지금 현재 지니고 있는 무엇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영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영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하여 관계한다. 마치 우리가 내재적 삶에서 문득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처럼, 우리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문득 신비롭게도 시간의 초월, 즉 영원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로부터 출발하여 잠시 시간의 신비와 초월을 향해 나아갔던 생각의 흐름이 다시금 회전문을 통해 《테넷》으로 돌아온다. 놀란 감독의 다음 영화는 대체 어떤 새로운 시간의 사색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