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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서민의 음식 감자탕
임석한  |  skygrac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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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9월 02일 (수) 00:27:22 [조회수 : 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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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가족과 외식을 했다. 메뉴는 감자탕이다. 프랜차이즈 감자탕 식당이었기에 깔끔하고 적당히 맛도 있었다. 음식을 먹으며 감자탕에 대해 한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름을 감자탕이라고 지었을까? 감자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주재료는 돼지등뼈와 우거지이지 감자가 주재료는 아니다. 정확하게 이름을 말한다면 돼지등뼈감자우거지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돼지등뼈 사이에 있는 척수신경을 감자라고 부르기에 감자탕이라고 부른다고 하고 돼지등뼈를 감자뼈라고 불러 감자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말하지만 이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생각 외로 감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감자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1800년대 초의 일이다. 그리고 감자가 한반도의 농민에게 널리 보급되어 일상의 식재료로 자리를 잡은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그때에도 감자의 공식명칭은 마령서(馬鈴薯)였고 감자라고 부르는 일은 많지 않았다. 감자와 고구마는 감저(甘藷)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분별없이 쓰였다. 마령서, 감저 등의 말이 사라지고 감자와 고구마가 명확히 구별하게 된 것은 1960년대 들어서이다. 1973년 과학기술처에서 ‘생활기술용어 통일안’을 발표했는데 이 통일안에서 마령서를 버리고 감자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니까 최근래에 들어서야 널리 쓰이기 시작한 감자라는 이름이 선사시대이후 수천 년 먹어온 돼지뼈에 붙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축산전문가들도 감자뼈라는 이름의 돼지뼈는 없다고 한다.

한반도의 옛 사람들은 농사를 도와야 하는 소를 함부로 잡을 수 없었기에 소고기는 넉넉히 먹지 못하는 대신 아무 것이나 잘 먹고 새끼도 많이 낳는 돼지는 그런대로 제법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도 그렇게 넉넉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기에 돼지를 잡으면 최대한 살을 발라 먹었을 것이다. 돼지의 것 중에서 털을 제외하고 사람이 소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었고 뼈까지 푹 고아 먹었다. 살도 알뜰히 발라먹었을 것이지만 돼지 등뼈는 굴곡이 져 있어서 칼로 아무리 발라내도 발리지 않는 살이 있었다. 이 살을 가장 쉽게 먹는 방법은 삶는 것이다. 삶으면 살을 바를 수 있었기에 아마도 돼지등뼈를 끓여서 먹는 탕은 솥을 사용했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음식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예전에는 이 탕을 뼈다귀탕, 뼈다귓국, 뼈다귀해장국이라고 했다. 이 뼈다귀 탕에 언제부터 감자가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감자재배는 일제강점기 때 많이 늘었기에 아마도 그 즈음에 지금의 감자탕 모양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일제는 우리나라에서 쌀을 빼앗아 가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고 살 식량으로 감자와 고구마를 적극적으로 보급하였기에 그때 흔해진 감자가 뼈다귀 탕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1990년대 들어 감자탕은 고급스런 프랜차이즈 식당의 메뉴로 변모했지만 뼈다귀탕도, 감자도, 감자탕도 모두 하층민들의 음식이었다. 소뼈를 끓인 설렁탕도 못 먹고 쌀밥도 못 먹던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다. 어느 특정 지역에서 유래한 음식이라기보다는 하층민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감자탕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농촌을 떠나 서울로 와서 노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돼지등뼈와 감자는 좋은 안주와 식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감자탕의 유래를 생각해보면 깔끔한 프랜차이즈 감자탕 전문점보다는 허름한 식당에서 할머니사장님이 끓여서 내오는 감자탕이 진짜 감자탕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욕에서 살 때 미국의 정육마트에 가면 돼지 뼈를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팔기에 그것을 가져다가 우거지 대신 푹 익은 김치와 감자를 넣어 끓이면 감자탕 비슷한 맛이 났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서 감자탕을 끓이지 않는다. 얼마든지 밖에서 편하게 사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 감자탕집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감자탕은 언제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친근한 음식이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감자탕으로 외식을 한번 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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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20-09-02 02:02:17
글쓴이가 주장하는 “일제시대에 일본이 쌀을 뺏어갔다”는 주장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조선의 남아도는 쌀을 일본이 사주지 않으면 어쩔까 하며 걱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의 쌀이 남아서 처치 곤란할 때에도 조선의 형편을 고려하여 조선의 남아돌아가는 쌀을 수입하여 일본의 쌀값이 폭락한 경우도 있었고, 조선인들이 조선의 남아돌아가는 쌀을 일본에 수출하지 못하면 어찌될까 걱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이 조선에 학교, 공장, 철도, 도로 등을 일본 돈으로 건설할 만큼 어느 정도의 자금력이 있었는데 朝鮮 건설에 퍼부은 자금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 그까짓 쌀값을 떼먹으며 수탈할만큼 자금부족으로 쩔쩔맨 것은 아니었다. 예외적으로, 미국의 압박이 거세져 1944년 8월 경부터 시행된 ‘강제징용기’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해진 전쟁 말기라서 일본인이나 조선인이나 간에 둘 다 물자부족에 허덕였다. 40년 일본 통치 기간 중 약 1년 정도는 최전방의 일본군에게 보낼 쌀을 공출한 것도 사실인데 일본, 조선 둘 다 쌀의 일부를 일본군부에게 뜯긴 것은 맞는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정직하다! 일제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그 당시 동아일보를 보면, 일본이 쌀을 수입했는지 수탈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쌀값이 4~5일 이래로 백미 중등미 한 섬에 오십이삼 원 하는 것이 별안간 폭락이 되어 사십칠팔 원이 되고 이에 따라서 적은 상점의 소매가격도 그와 같이 떨어졌습니다. 쌀값이 그같이 떨어진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무슨 이유인지 일본으로 해마다 수십만 섬씩 수출되던 미곡이 금년에는 수출되지 아니하는 것이 중대한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쌀값이 떨어졌다고 일반 월급 생활하는 사람은 좋아할지 모르나 쌀값이 떨어지는 데에서 다른 물가가 떨어지지 아니하면 일반의 생활은 더욱 곤란할 줄로 믿습니다. 조선 사람의 의지하는 것은 오직 쌀 뿐이라 이 쌀 한 가지를 팔아가지고 모든 것을 사는 터이니까 매우 곤란할 줄로 아옵니다. -중략- 조선 사람의 바라는 것은 미곡뿐인데, 미곡이 이렇게 떨어지면 조선 사람의 생활이 어찌 될는지 매우 위험하겠습니다. 물론 금후라도 다시 일본으로 수출만 하게 되면 다시 오를 줄 아옵니다. 연전에 한 번에 별안간 삼원씩 사원씩 폭등하던 것도 전혀 일본 수출이 폭증한 까닭이었습니다.’(동아일보 1920. 4. 17)

경기도 여주 이천에서 산출하는 자채쌀은 자고로 일찍 익는 종자로 유명하야 해마다 유월 유두 때가 되면 의레히 진상하는 쌀이 나는 터인바 금년에도 금월 초생에 이천에서 산출한 햅쌀이 인천 시장에서 매매가 되었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그동안 미곡검사소에서 검사를 맛치고 지난 17일에는 일본으로 수출이 되어 오사카와 고베 시장에서 한 섬에 35원금으로 매매가 되얏는데 일본 시장에서도 이와 같이 일찍 되는 종자는 매우 드물다고 크게 환영을 받았다더라.(동아일보 1921. 8. 26.)

일본 취인소의 조선미 격차와 別建(별건:일본미와 따로 거래함) 등은 당 업자 사이에 매우 머리 아픈 문제로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는 바 그 대책으로 차제에 일시적 姑息(고식) 수단을 취함은 도리어 화근을 맨들 염려가 있으니 곧 실제상 효과가 있는 대책은 오직 조선 내의 미곡상이 일치단결함에 있을 뿐이다. 현재에 취인소 각 시장이 임의로 取引上 사정에 의치 않고 공정시세를 정하야 이를 표준으로 일본의 쌀 상인과도 거래하기로 하고 혹은 堂島[どうじま] 취인소는 受渡米(수도미:거래하는 쌀)의 7할까지는 조선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별건을 주장하여 부당한 격차를 생기게 하는데 대한 대책으로 품질을 개량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 향상 개선을 도모할 필요가 있을 것이며 지금 일본식량은 실로 조선미의 풍흉과 출회 여하에 좌우되는 상태이나 조선내의 시세는 항상 시세가 변동됨을 고려할 바이니 사탕, 인도의 고무 등은 항상 상인의 단결력에 좌우됨을 생각하면 조선미가 일본 시장에서 너무 냉대를 받는 것은 조선내 당 업자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조선미 한 섬에 2원의 시세 차는 곳 수출고 4백만 섬이라 할진대 8백만 원의 이해가 생기므로 충분히 단결하여 차 대책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동아일보 1925. 1. 27)

이와 같이 쌀값 변동의 震源(진원)인 공급방면의 이상은 조선 쌀값의 장래에 큰 영향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쌀값 변동의 결과 다소 招致(초치)할 수 있는 소비 증진을 예상한다 할지라도 조선인 경제력으로서 감당하지 못할 처지이며 그렇다고 하면 이 남아도는 쌀 2백만 섬은 나갈 곳을 발견하여야 할 터인데, 조선미의 최대 수요지인 일본 내에서는 방금 1천 만 섬 이상의 남아도는 쌀과 풍작 예상으로 조선미 이입 방지를 도모하고 있는 이때이니 그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아도 수난기에 있는 조선미에 이제 또 다시 먹어낼 수 없고 팔아낼 수 없는 쌀이 불었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다.(동아일보 1933.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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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20-09-02 02:20:42
일본을 비난하더라도 제대로 된 근거를 가지고 비난해야 됩니다. 대명천지에 조금만 노력하여 자료를 들춰보면 곧바로 사실관계를 확인 할 수 있는 ‘인터넷시대’입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괴벨스의 농간’에 놀아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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