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장마가 걷히고 폭염이 찾아왔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오듯하여 움직이는거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에어컨은 돈 먹는 하마라 정말 참다참다 더이상 못참게 되거나 아니면 여럿이 있을 때 잠깐, 냉방온도는 거의 바깥 온도와 준하게 27도에서 28도를 맞춰놓고 튼다. 틀어놓는것만 해도 위안을 삼을 정도다. 위안을 삼을 정도의 에어컨 바람임에도 뭐가 그리 마음을 붙드는지 전원 버튼 누르는게 쉽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선풍기를 종일 틀어놓는데 이것도 수명이 다했는지 아니면 중저가 브랜드에 사은품으로 받은 거라 그런지 바람이 훈훈하다. 미풍, 약풍을 지나 강풍을 맞고 있으나 폭염의 기세에는 택도 없다. 이렇게 더위와 땀과 사투를 벌이다 하루를 마친다.

폭염을 피하는 방법으로 난 그동안 미루고 미뤄왔던 집안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내가 사는 집은 옛날 농가라 천장이 매우 낮다. 천장이 얼마나 낮은지 눈을 치켜뜨면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밝은 전등 빛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래서 여름이면 저녁 9시에 전등을 끄고 스탠드 등을 켠다. 그래야만 한낮의 열기를 품고 밤새 뿜어내는 열기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웃픈 상황이다. 근래에 들어 내 시력이 쉽게 노화가 되는 이유는 흐릿한 불빛 아래서 핸드폰을 보거나 책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옛날 호롱불 아래서 씨름하는 것과 비슷하다. 더위를 식히는 방법으로 저녁이면 이렇게 전등을 끄는 습관과 다른 하나는 집안 가득히 쌓아놓은 짐들을 처리함으로써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얼마 전 텔레비젼에서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를 본적이 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짐들에 치여 사는 연예인들의 집안을 매우 간소하고 깔끔하게 정리해줌으로서 삶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두 연예인의 사례를 보았는데, 나는 그들에 비하면 정말 신사라고 여기지만, 남이야 어떻든간에 내 기준에서 본다면 나도 무거운 짐들을 온 몸으로 지고 사는 셈이다. 그 짐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이번 폭염 속에 드디어 칼을 뽑았다.

더위를 잊으려고 시작한 짐정리이지만 세간살이를 치우면 치울수록 내가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예상을 못했는지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지만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나온 길이었다. 가는 김에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산으로 힘을 썼다. 버리려고 했던 짐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큰 것보다는 자잘한 것이 더 많았다. 하다못해 작은 메모까지 상자 안에 고이 모셔두고 살아왔다. 언젠가 한번쯤 다시 읽겠지, 언젠가는 꼭 스크랩을 해놓고 간직해야지 하며 모아둔 것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버리고 싶어도 여러 의미를 담아 차마 버리지 못했던 것들도 꽤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이번에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과감히 해치웠다. 지난날의 물건과 미련없이 이별을 고하는 방법은 그저 생각하지 않고, 짬을 내어 잠깐이라도 추억에 머무르지 않으면 된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쓰레기통에 투하하면 된다.

버리려 했던 짐들이 쓰레기봉투에 툭 내던져지는 순간 찾아오는 짜릿함과 통쾌함은 엄청 컸다. 뜨뜻미지근한 연인의 관계를 청산할 때 오는 시원섭섭함도 느껴졌으나 다행히 미련은 남지 않았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 어렵지 하나를 치우고 나니 다른 것들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박한 정리’에 참여한 연예인들도 품고 있었던 것들 중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들, 의미를 부여하고 버리지 못하고 껴안고 살아왔던 것들과 과감히 이별을 고했을 때, 드디어 다른 것들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물건을 정리하고 난 뒤의 빈 공간이 주는 단촐함과 깨끗함으로 자신의 집이 꽤 넓다는 것과 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것이 공통된 고백이었다.

사실 옛 물건들은 소중한 것이긴 해도 박스 안에 들어가 햇빛을 받지 않으면 잡동사니가 된다. 내 시선이 가지 않고 쌓아놓게 되면 몸과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남는다. 그리고 정리가 되지 않으면 가지고 있어도 모를 것이 태반이고, 나중에 다시 들춰보겠다는 지금의 다짐은 수년이 지나도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설령 여유가 생긴다 할지라도 막상 꺼내보려 하면 지지난 것들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다. 그러한 나의 습관들을 이번 폭염 속에 아주 큰 맘 먹고 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매우 흔쾌히 “굿바이, 마이 프레셔”를 힘차게 외칠 수 있었다.

아직 치워야 할 것은 많이 남았다. 이번에 정리를 하면서 100리터 종량제 봉투 세장과 정리된 택배박스가 다섯 묶음이 나왔다. 계속해서 오래된 책들 그 중에 전공서적들을 정리해야 하고, 옷장에 묵혀있는 처치 곤란한 옷들을 정리해야 한다. 여기저기 크게 작게 담가둔 효소와 그릇도 있고, 꽉 찬 냉장고도 비워야 한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많이 남아 있다. 내 손에 붙들려 나오는 물건들이 아우성을 친다. 어떤 것은 옛 추억을 들먹이며 내 마음을 흔든다. 어떤 것은 지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인 것을 강조하며 내 손에서 벗어나려 한다. 어떤 것은 나중에 돈이 될 것이라며 쩐의 노예가 될 것을 종용한다. 어떤 것은 유행은 돌고 돈다며 내 시야를 흐린다. 물건마다 이유가 있고 변명이 있고 유혹을 한다. 쉽지 않은 선택이요 결단이다. 그런 고통들을 감내하며 지금도 난 밤마다 이열치열 중이다.

이렇듯 살면서 내 몸에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기는 쉽지 않다. 내 삶을 붙들고 있었던 편안함을 허물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크나큰 결심과 모험이 필요하다.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굳이 새 것을 취하지 않고 옛 것을 버리기만 해도 좋다. 뒤늦게 찾아온 폭염이지만 올해의 폭염은 나에게 일상을 정리하도록 이끌었다.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언제 어디서 우리의 발목을 붙잡을지 모르는 이 때, 세상의 어수선함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나와 세상과 하나님을 다시 새롭게 바라보는 것은 어떤가. 어쩌면 올해의 많은 난리는 익숙한 것들과 이별을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쉼의 시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