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속하지만 가장 이탈리아답지 않은 곳으로 단연 시칠리아 섬이 꼽힌다. 섬이라고는 하나 크기가 제주도의 14배에 달하므로 작다고 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가 처음 시칠리아를 방문했을 때는 로마에서 출발하면 거의 하루가 걸렸고, 타고 있던 기차가 배 안으로 들어가 밤새 항해한 후 오전에 시칠리아 제 1의 항구도시 팔레르모에 도착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지금은 저가항공이 취항하여 접근성이 나아졌으나 여전히 방문하기에 쉽지 않다.

▲ 사진 1. 시칠리아 최대 도시 팔레르모 전경

시칠리아 섬에는 분명 이탈리아의 도시지만 이탈리아 다른 유명 도시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도시들이 많다. 이는 지금까지 시칠리아를 지배했던 각기 다른 문화와 종교들이 조화를 이루어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력을 갖게 되는 그 문화에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각 문화의 조화로운 공존과 융합은 전혀 다른 개념인데, 조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융합을 택한 시칠리아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했다.

▲ 사진 2. 유럽과 아랍 문화가 융합 된 팔레르모 대성당

시칠리아의 주도이자 인구 70만 정도의 대도시인 팔레르모가 세워졌던 때는 기원전 8세기 경 페니키아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에 카르타고와 손을 잡고 번성했다가,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통치 아래로 들어갔고, 이어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9세기부터는 북아프리카에서 온 아랍의 지배를 받으면서 무역의 중심지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11세기에 북유럽 바이킹족인 노르만족의 로제르에게 정복되어 시칠리아 왕국이 건설되었는데, 백 이십년 정도 지속된 이 시기에 시칠리아는 황금기를 이루게 된다. 해양민족으로써 개방적이었던 노르만 왕국은 기존 민족과 문화, 종교에 관용적이어서 고대 그리스, 아랍 등, 시칠리아를 지배했던 문화와 유적들을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발전시킴으로써 이탈리아나 유럽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랍 - 노르만 양식의 건축물들을 남겼다.

▲ 사진 3. 몬레알레 성당의 아랍풍 베네데티니 회랑

후에 시칠리아를 지배한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부르봉 완조, 스페인의 아라곤 왕조, 이탈리아의 사보이 왕조 등, 외래 왕조 역식 기존의 유적들을 파괴하지 않음으로 시칠리아는 무슬림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잘 융합된 독특한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 바로 성당인데,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과 몬레알레 두오모 성당이 대표적이다. 이 두 성당은 무슬림 양식의 건축물과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이 잘 융합되어 있어 보는 이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 사진 4. 몬레알레 성당 내부 비잔틴 양식 모자이크

시칠리아 곳곳에 있는 도시들에는 무슬림과 기독교 문화의 융합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의 오랜 지배자였던 그리스의 문화도 융합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의 고향 시라쿠사의 두오모를 들 수 있는데, 이 성당은 기원전 5세기에 세워졌던 아테네 신전의 토대와 도리아식 원기둥을 그대로 활용하여 7세기에 세워졌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그처럼 시칠리아는 다른 문화와 이전 문화에 대한 수용성과 더불어 융합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 사진 5. 시라쿠사 두오모 내부 그리스 양식 기둥들

사실 시칠리아가 유명해진 것은 다른 무엇보다 영화의 영향이 크다. 아무리 보기 힘든 독특한 융합 문화를 가졌다 해도 방문할 가치가 넘쳐나는 이탈리아 지역 중에서도 가장 변방에 위치한 시칠리아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한계를 돌파하게 만든 것이 바로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이다. 영화에는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의 존재에 대한 긍정과 이해를 추동하는 힘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시대에 영향을 준 뛰어난 영화들로 인해 시칠리아는 긍정과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을 아우르는 마피아 가문의 고향이 시칠리아임을 알게 해준 <대부>, 수많은 이들이 인생영화로 꼽는 <시네마 천국>, 아름다운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가 열연한 아름다음을 가장한 끔찍한 영화 <말레나>, 영화보다는 감독이 유명해서 이름난 <그랑블루> 등이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대부>의 촬영지 팔레르모,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 체팔루와 팔라조 아드리아노, <말레나>의 촬영지 시라쿠사, <그랑블루>의 촬영지 타오르미나 등을 일생에 한 번은 꼭 방문하고픈 소위 ‘성지’들이다.

▲ 사진 6. 팔레르모 근처 대부 촬영지 까페 비텔리

▲ 사진 8.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 팔라조 아드리아노

▲ 사진 9. 말레나의 촬영지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

▲ 사진 10. 그랑블루의 촬영지 타오르미나

시칠리아를 방문한다면 그리스, 로마, 아랍, 비잔틴, 노르만 등, 시칠리아를 지배했던 문화들이 잘 융합된 곳들을 방문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명작들의 촬영지를 찾아가 영화 속 캐릭터들의 흔적을 따르거나 혹은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방문하기에 쉽지 않지만, 한 번이라도 방문한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환상적이고 색다른 여행지가 시칠리아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