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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라멘과 치킨라면 그리고 고(故) 전중윤 회장
임석한  |  skygrac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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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8월 18일 (화) 23:39:56 [조회수 : 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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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장마와 폭우로 온 국민이 고통을 받았는데 이젠 고온다습한 날씨로 참 힘든 나날이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의 재확대로 오늘부로 교회대면예배가 또 금지되었다. 이렇게 된 까닭에는 개신교회의 책임이 커서 참 부끄럽고 답답한 마음이다.

나는 이번 주가 휴가기간이다. 이런 상황에 어디를 가는 것도 마땅치 않아 집에서 이런 저런 정리를 하고 영화도 보며 틈틈이 휴가를 즐기려 한다. 어제는 온 가족이 하루 종일 집정리를 했다. 안방과 작은 방 그리고 배란다의 짐들을 정리하니 밤늦은 시간이 되었다. 푹푹 찌는 날씨에 입맛도 없어서 계속 찬 음료만 마시다가 밤 늦은 시간에 온가족이 컵라면으로 저녁식사를 때웠다. 오랜만에 먹는 컵라면이다. 아내는 육개장사발면, 딸은 김치사발면, 나는 신라면컵라면이다. 김치와 오이지 두 가지 반찬으로 먹는 컵라면 맛이 참 좋았다. 그 덕에 오늘 글은 라면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 라면을 언제부터 먹게 된 것일까?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인당 5일에 한번, 일 년에 일흔세번 정도로 라면을 먹을만큼 라면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농심의 신라면은 1986년 출시된 이후 2009년 11년까지 누적판매 183억 개를 기록했는데 이 라면 봉지를 일렬로 놓으면 에베레스트산 18000개 높이와 맘먹는다고 한다. 지금은 2020년이니 지금은 그 이상일 것이다.

라면은 위그루족의 전통적인 건면제법(乾麪製法) 즉 면을 만드는 방법에서 시작되었지만 라면의 면을 기름에 튀긴 것은 중국이 원조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기름에 튀긴 요리가 발달하였는데 식품을 기름에 튀기게 되면 건조되어 저장성이 좋아진다. 중국군이 건면을 튀겨서 비상식량으로 휴대했던 이유도 수분이 적어 가볍고, 오래 보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름을 함유한 고칼로리 음식으로 급할 때는 열을 가하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라면은 일본이 중일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 중 하나이다. 중일전쟁당시 일본군이 중국군들의 짐꾸러미에서 라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유로 중국의 라면이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일본에서 만든 최초의 라면은 1958년 일본의 식품기업인 니신식품에서 닭뼈육수맛을 낸 치킨라면이다. 이 라면을 시작으로 인스턴트 라면의 시대가 열렸다. 니신식품의 창업주였던 대만계 일본인인 안도 모모후쿠는 당시 회사에 부도가 나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치킨라면을 개발하여 출시한 계기로 다시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그는 2007년 1월 5일 96세의 나이로 별세하기까지 매일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다고 한다.

컵라면 역시 니신식품에서 탄생하였다. 니신식품은 1971년 미국의 인스턴트 라면의 소비자들이 컵에 라면을 부어놓고 포크로 먹는 것을 보고 컵라면의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세계최초의 컵라면인 컵누들(cup noodle)을 출시하였다. 이 컵누들로 인해 북미시장에서 더욱 인스턴트 라면의 인기가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라면은 삼양라면이다. 삼양라면은 삼양식품의 전중윤회장의 착안에서 비롯되어 1963년 9월 15일에 처음 나왔다. 전중윤 회장은 1960년대 초 남대문시장을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미군병사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끓인 꿀꿀이죽 한 그릇을 5원주고 사먹기 위해 줄을 서있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들에게 싸고 배부른 음식을 먹게 할 방법은 없을까?” 하며 고민했다고 한다.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전회장의 열정과 사명으로 최초의 라면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지역을 돌며 시장조사를 하였고 특히 일본이 패전 후 식량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눈여겨보았다. 일본에서 라면을 시식한 경험이 있었던 그는 라면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당시 주무부처인 상공부를 설득해 5만 달러를 할당 받고 곧바로 일본라면 제조회사 묘조식품(明星食品)을 찾아가 천신만고 끝에 기계도입과 기술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당시 41살이었던 묘조식품의 오쿠이 기요스미 사장은 한국전쟁이 일본경제를 재건해 주어서 일본이 그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한 라인에 6만 달러하던 라면 제조시설을 두 라인에 2만 5000달러로 즉석에서 발주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계수입 대금으로 정부로부터 받은 5만 달러 중 기계 도입을 하고 남은 2만3천 달러를 다시 정부에 반납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전사장은 일본 현지에서 라면 제작의 전 공정을 배웠지만 일본인 기술자들은 끝내 면과 수프의 배합비율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전 사장이 끝내 비율을 못 배우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오쿠이 사장은 비서실장을 시켜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전 사장에게 전해주었다. 비행기에서 뜯어보라는 그 봉투 안에는 기술자들이 펄펄 뛰며 비밀로 했던 면과 수프의 배합비율이 적혀 이었다. 가난하고 굶주렸던 국민들의 배를 채워줬던 라면은 이렇게 눈물겨운 사연을 안고 1963년 9월 15일 삼양 ‘치킨라면’이란 이름으로 탄생했다.

당시의 라면 가격은 10원으로 김치찌개 백반이 30원, 자장면이 20원이었던 시절이니 굳이 지금 물가로 따지자면 2000원꼴로 상당히 고가의 먹을거리였다. 더군다나 가난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라면이 대중화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후 삼양라면의 스프에 고춧가루를 더 넣음으로써 맛의 변화를 꾀한 작전이 성공하였고 1965년 때맞춰 나온 정부의 혼분식장려정책으로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대용할 수 있는 라면은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라면은 이제 한국인의 소울 푸드가 되었다. 사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라면이 한두 가지씩 있다. 나름대로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비법도 가지고 있다. 이 라면이 우리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전중윤이라는 한 기업인의 가난한 국민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과 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열정과 사명감이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다음 라면을 먹을 때는 고(故)  전중윤회장을 생각하며 삼양라면을 끓여먹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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