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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레이고 싶다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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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6월 17일 (수) 20:55:52 [조회수 : 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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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라 욕하지 마라, 그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당당뉴스>에서 필자의 글을 읽은 어느 독자 분은 필자를 가리켜 걸레라고 한다.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라는 것이다. 자신을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많은 필자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람을 보고 ‘걸레’라니 좀 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이분의 말 중의 ‘아무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라는 의미로, 그러니까 말인즉슨 죽을힘을 다해서 애를 쓴다 해도 당신이 사람 되기는 아예 틀렸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아무리 그렇다지만 너무한 말인 것 같다. 성경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께선 길가에 나둥글어 아무데도 쓸모없는 돌멩이까지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고 하시지 않았는가.(마3:9 참조)

그런데 돌아다보니 자신이 ‘걸레’임이 옳았다. 아니 자신이 그토록 꿈꾸며 기도한 것이 실은 걸레가 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독자 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걸레이기는 하지만.

먼지를 닦아 내는 데에는 걸레만한 것이 없다. 비로 쓸어 내고 청소기로 빨아들여도 끝은 걸레로 닦아 마무리를 하는 것이 제일이다. ‘아무리 빨아도 걸레’인 그 걸레, 행주로도 쓸 수 있을 정도로 깨끗이 빤 걸레, 아무리해도 필자 같은 사람이 그런 걸레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을 목표로 기도해 오고 있는 것은 맞다. 닦고 닦아 더러워지면 빨고, 닦다가 더러워지면 또 빨아 나중에서는 너덜너덜 헤져 못쓰게 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 주신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거듭 말하거니와 필자는 걸레가 되기 위하여 기도해 오고 있다. 아니다. 의미상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기도하며 진짜 걸레는 염두에도 둔 적이 없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자신의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연인들이 ‘내 안에 너 있다’ 하듯이 내 안에 주님을, 주인님을 모시고 살게 해 주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연인들의 ‘내 안에 너 있다’와는 다른 데가 있다. 연인들의 ‘너’는 외양과 내면을 다 포함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니 외양이 없으시다. 이 땅에서의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 오셨음으로 물론 외양도 있으셨지만, 그 외양과 행동은 내면이 드러난 것이기에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수님을 안에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그 마음을 우리의 안에 품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의 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 그리고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이 우리가 성삼위 하나님을 자신의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 살면, 주님을, 주인님을 나의 안에 모시고 살면 ‘참 빛’이신 그분 예수께서 빛을 내여 우리를 통해 그 빛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예수의 말씀으로 여기에서의 ‘착한 행실’은 ‘너희 빛’ 곧 우리의 빛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실은 우리의 빛이 아니라 ‘참 빛’이신 예수의 빛으로 우리를 통해 드러내는 빛이다.

어떤가. 이만하면 필자가 걸레 되기 위해 기도해 왔다는 말이 이해되는가. ‘빛’은 ‘착한 행실’로 드러나고 ‘걸레’가 하는 일이 ‘착한 행실’이니 말이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옵소서

 

능력이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데다가 나이까지 많아지다 보니 하는 일이라고는 기도밖에 없게 됐다. 말씀까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도는 해 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기도로 지치다 보니 체력이 따라 주지 않는 것이다.

말씀, 말씀은 필자에게 있어 하나님이고, 믿음이고, 기도의 안내자이다. 말씀을 벗어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말씀과 다른 믿음은 기독교의 믿음이 아니다. 말씀 없는 기도는 주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가 되게 할 뿐이다. 그러니 말씀을 공부할 수 있게 하여 주시라 기도드리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3:16)이므로, 읽는 것만으로도 성령의 감동에 의해 말씀이 말씀될 수 있다. 그러나 그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붙잡아 주시는 은혜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섭리라는 시스템의 작동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삶도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삶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영적인, 그러니까 믿음의 삶에 관해서랴.

우리는 성령을 사모함으로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하고, 그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어 말씀이 말씀되게 해야 한다. 말씀이 속사람의 구성요소가 되어야 하고, 말씀이 믿음 자체가 되어야 하며, 아주 조금씩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게 해야 한다.

필자는 물론 필자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는다. 처와 자식들, 손자들, 그 가정들을 위해 기도한다. 내용은 필자 자신을 위한 것들과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필자가 소속된 교회를 비롯한 모든 교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와 이 땅의 모든 교회들, 지구촌의 모든 교회들, 그리고 우리 기독교와 아버지의 모든 자녀들, 특히 신앙의 지도자들을 붙잡아 말씀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말씀되게 하시어, 말씀으로 변화시켜 가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인들의 비난이 칭찬으로 바뀌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기도한다.

주제넘게도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대통령을 위시한 모든 국민들이 올바른 가치관 즉 세계관, 인생관에 의한 올바른 국가관을 가지고 바른 마음, 바른 생각으로 모든 것을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여 최선을 다해 그 바른길로 가게 해 주옵소서.’ 기도한다. ‘조금이라도 더 옳은 것들이 옳지 못한 것들보다 항상 우위에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옳은 것들이 옳지 못한 것들을 항상 이기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한다.

옳고 그름이 진영논리에 매몰되지 않도록 해 주시라고도 기도한다. 그러며 양비론도, 양시론도 되지 않게 해 주시라는 기도도 드린다. 단 몇%만이라도 나은 쪽의 손을 들어 줘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했듯이 옳기만 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나쁘기만 한 사람 또한 있기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코로나 19의 빠른 소멸과 이 사태의 빠른 종식을 위한 기도도, 그리고 정말이지 주제넘게도 모든 지구촌, 모든 인류를 위해서도 기도드리고 있지만, 날마다 하루도 빠지는 일 없이 기도드리고 있지만, 지루해 하실 독자들이 머리에 떠올라 이 정도로 마치려 한다.

 

 

정저와인가, 井底蛙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세상은 갈수록 다양화되고 있다. 사람도 그렇다. 옷차림 하나를 봐도 개성이 넘쳐난다. 획일적이 아니고 다양해진다는 것은 발전의 산물이니 좋은 것이다. 옷차림 같은 외양뿐 아니라 내면도 점점 다양해 가고 있다. 그 다양성이 창의력을 낳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기도 하니 어찌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다양함은 별의별 것을 다 만들어낸다. 별의별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타의 의견을 비판하는 다른 사람의 글에 다양성의 시대인데 편협한 사고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의 비판이 편협한 것이라면 자기의 비판은 어떻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다른 사람을 보고 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본다며 비판하며 정작 자신은 더 짙은 색안경을 쓰고 벗은 일이 없어 자기가 그런 것을 쓰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다. 세상이 다양화되어 감에 따라 늘어난 현상이다.

보편타당한 진리를 보고 흔해빠진 것이라며 무시한다. 무뇌(無腦)의 산물이라 조롱하기도 한다. 우물 안 개구리다. 자기의 편협한 사고체계의 우물에 빠져 우물 밖 세상을 우물 안보다 더 좁게 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가 나의 창은 어떠한 방패라도 뚫을 수 있고, 나의 방패는 어떠한 창에도 뚫리지 않는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러니 자기의 그다지 길지도 않은 말 속에 모순이 몇 개나 들어 있는 것도 모르고 열변을 토하는 것이다. 아니 모순 같은 것은 아예 관심 밖의 일인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 그만인 것 같다. ‘짐이 곧 법이다’라는 식이다. 지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면 틀림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다소라 할지라도 이 같은 경향은 대개의 사람들에게 다 있다. 필자라고 다르지 않다. 다만 그리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기도하며 노력할 뿐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정말이지 심각하게 기도한다. 진영논리에 빠지기 쉬운 일이라면, 그리고 그게 옳고 그름을 명백하게 분별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그 구체적인 사안을 두고 엄격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바로 앞에 떠올려 모시고 기도드린다.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 잘못 분별하여 행동하면 그만큼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안경을 쓰지 않게 해 주시라고,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라고 기도드리는데, 그렇게 맨눈으로 사안 사안을 보고 성경적 사고로 살아가는 것이 필자의 걸레 됨의 삶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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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봉성도 (122.101.20.21)
2020-06-19 08:56:55
내가 그동안 쭈~욱 봐온 어느 컬럼리스트의 느낌입니다.
(임종석 = 임종석)
둘이 거진 비슷한 면이 많이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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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20-06-19 11:19:29
북한방송 수금사원 임종석의 경우

전대협의장 출신답게 북한 방송∙노래∙도서의 독점 수금 대리인 지위를 확보하여, 일방적으로 저작권료를 수금하여 북한에 송금하거나, 법원에 공탁하거나,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부 대변인실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북한에 지급된 저작권료는 7억 9200만 원입니다. 2008년 7월 금강산에서 박왕자씨 피격사건이 발생한 뒤 대북제재로 저작권료를 북한에 전달할 수 없어서 법원에 공탁되고 있습니다. 현재 법원에 공탁돼 있는 북한 저작권료의 규모는 통일부 관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총 18억 6000만 원(2019년 6월 11일 기준)이라고 합니다.

통일부 관계자는 "경문협(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2대 이사장 임종석)에 의하면, 계약과 관련한 일체의 내용은 제3자에게 알리지 못한다는 게 계약 내용에 포함돼 있어 알려줄 수 없다"라고 합니다. 경문협이 집행한 금액의 정확한 경로와 사용처에 대하여서는 진실 규명이 필요하고 조사가 불가피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지상파 방송사들은 연 3000만 원 안팎, 종편 등은 수백만 원 선으로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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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20-06-18 05:59:42
<나는 걸레이고 싶다>를 읽고
1. 걸레에 관하여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라는 말은 꽉 막힌 이데올로그를 비하하는 뜻으로도 쓰고 있다.

자기 확신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만으로는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라는 말을 들을 순 없다. 자기 확신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 확신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남을 심히 조롱하고, 그 무신 문둥병 환자 취급하고, 남이 자기 확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반격하는 걸 못견뎌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야말로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라는 말로 반격 당하기 안성맞춤이다.

2. 진영논리에 관하여

임종석 칼럼니스트 曰 “옳고 그름이 진영논리에 매몰되지 않도록 해 주시라고도 기도한다. 그러며 양비론도, 양시론도 되지 않게 해 주시라는 기도도 드린다. 단 몇%만이라도 나은 쪽의 손을 들어 줘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했듯이 옳기만 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나쁘기만 한 사람 또한 있기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임종석 칼럼니스트가 문재인 일당을 칭찬하는 것은 많았으나 그 반대 일당을 칭찬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 반대 일당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저주에 가까운 글을 쓴 경우가 많았다.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상대진영에게 참으로 매몰차게 대했다. 그렇다면 상대진영으로부터 반격을 각오해야만 정상이다. 그런데 상대진영이 임종석 칼럼니스트를 공격하는 걸 감수하지 못하고 “몇% 나은 쪽” 운운하며 볼멘소리나 하고 있다. 자기가 남을 공격하는 건 “몇% 나은 쪽”이기 때문에 아주 정당하고, 다른 이가 자기를 공격하는 건 “의인이 아닌 주제에” 자기를 공격하는 것인가?

3. 우물 안 개구리에 관하여

보편타당한 진리를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전세 내어 자기만이 보편타당한 진리를 말한다고 여기는 者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다. 하나님은 다양한 측면이 있다. 사랑의 하나님, 분노의 하나님 등... 하나님의 한쪽 측면만으로 남을 공격하면서 그것을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강변하며 남을 심히 조롱하는 건 보편타당한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못견뎌하는 우물 안 개구리의 사촌일 뿐이다.

하나님의 한쪽 면을 강조하는 건 자유다. 그건 틀린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한 쪽 면에 좀 더 끌리는 건 당연하다. 하나님을 예로 드는 건 뭣하니 미인을 예로 들어보자. 미인을 평가할 때 주로 건강미를 보는 사람도 있고, 주로 얼굴 생김새를 보는 사람도 있다. 건강미를 주로 보는 사람에 대해 “얼굴을 보지 않은 너는 틀렸다!”고 씹어댔다면, “얼굴만을 미의 기준이라고 보는 너는 우물 안 개구리다. 미의 기준에는 건강미도 있다.”라는 반격쯤은 허허허... 하면서 감수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걸 감수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운운하는 건 ‘내로남불’의 극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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