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7년 표트르 황제는 젊은 귀족 250명을 이끌고 유럽 여러 나라 순방에 나섰다. 18개월 동안,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후 발전한 유럽을 체험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나이 25세. 호기심 많았던 그는 손수 많은 기술들을 익혔다.

황제는 귀국하자마자 가위를 들고 귀족의 수염을 잘랐다. 곧 황제의 명령으로 모든 러시아인은 수염을 깎아야 했고 어기는 자에게는 세금이 부과됐다. 러시아 전통인 긴 소매도 잘랐다.

수염은 러시아인의 전통과 풍습이었고 정교회 신부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긴 머리카락과 긴 수염은 정교회 사제들에게 필수였다. 예수도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렀고, 구약성경의 기록처럼 단발은 거룩하지 못한 이교도의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오래 전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러본 적이 있다. 교인들은 러시아 성직자 다 됐다고 나를 추켜 세웠다.

표트르는 배를 짓고 해군과 육군을 새로 편성해 훈련했다. 1700년부터 1721년까지는 전쟁(The Great Northern War)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다. 러시아 서쪽과 남쪽에 있는 나라들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중요한 싸움은 발틱 연안을 지배하는 스웨덴과 그들을 밀어내고 발틱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공방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황제의 호칭을 차르(Tsar)에서 임페라토르(Imperator)로 바꿨다. 러시아가 유럽의 강대한 제국이 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표트르는 스웨덴을 몰아낸 자리에 새 도시를 건설했다. 아무 것도 없던 발틱(Baltic) 해변, 네바(Neva)강 하구에 유럽식 도시를 세우는 것은 엄청난 작업이었다. 운하를 만들고, 다리를 놓고, 나무를 박아 무른 땅을 견고히 하고,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유럽식 건물을 올렸다. 대리석을 비롯한 석재는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러시아와 거래를 원하는 모든 선박은 배 크기에 비례해서 돌을 싣고 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로 들어올 수 없었다. 토목공사에 필요한 재원은 세금과 몰수한 교회 재산으로 충당했다.

드디어 1713년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수도가 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독립 주교좌가 생기고 금세 대주교좌로 승격했다.

유럽은 왕의 권력이 교회의 권력을 앞지르는 시대의 끝자락이었다. 프랑스의 가톨릭, 스웨덴의 루터교, 영국의 교회가 세속 권력을 잃고 나서 왕권이 강력해지는 것을 표트르 황제는 보았다. 그도 교회를 누르고 그 위에 군림하는 국가 건설 작업을 시작했다.

1711년 황제는 국가 의회가 성직을 관리한다고 선언했다. 1716년에는 공식적으로 선출된 주교에게 맹세를 시켰다. 황제는 주교에게 요구했다. “세속의 일, 즉 황제와 국가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 필요하지 않은 교회를 세우지 말라. 성직자를 늘리지 말라.”

표트르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를 대주교좌로 격하했다. 그리고 1921년 정교회를 장악할 시노드(신성종무원, Holy Sinod)를 만들었다. 그것은 유럽 프로테스탄트 국가의 교회 행정기관을 본 딴 것이었다. 시노드가 정교회의 최상위 기관이 되고서,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정교회는 완전히 해체됐다. 정교회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200년이 다 된 1917년 2월,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러시아에서 총대주교가 갖는 비중과 모스크바가 갖는 종교적 상징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표트르 황제는 진작부터 정교회의 형식주의를 혐오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과 형식을 해체하려고 덤벼들었다. 그것은 니콘이 시도했던 정도의 교회 개혁이 아니었다. 표트르의 개혁은 정교회를 강제로 세속화 하는 것이었고, 프로테스탄트 식으로 바꿔 자기 밑에 두는 것이었다.

교회에 속한 영토는 국가 소유가 됐고, 교회 수입도 국가 재정에 들어갔다. 막강한 황제의 권력에 교회의 권력은 설 자리가 없었다. 정교회는 큰 충격을 받고 공포 속에서 침묵했다. 니콘의 개혁 때 나온 분리파 신자들은 아예 머나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자연히 정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맥은 끊어졌다.

교회를 세속화하는 황제의 작업은 거침 없었다. 황제 스스로가 저속한 무도회와 연극으로 정교회를 조롱했다. 성직자와 신자들에게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황제가 직접 나서는데야 막을 방법이 없었다. “러시아 같이 추운 곳은 수도원이 맞지 않다. 수도원 생활은 나태다. 수도원을 작업장으로 만들고 수도사들을 노동자로 만들어라. 국가가 사람들을 지도하는데 수도사들 때문에 방해된다. 수도사가 집필한 책은 발행하지 말라.”

황제는 정교회 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국민을 미신으로부터 보호한다고 했다. 성스러운 교회는 상스러워졌고 발가벗겨진 성직자들은 황제의 명령에 숨죽였다.

표트르와 함께 정교회 세속화를 밀어붙였던 성직자 페오판(Feofan Prokopovich, 1681-1736)도 성직 위계 질서를 혐오하고 교회 의식을 멸시했다. 시노드를 장악한 그는, 전통을 계승한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식으로 정교회를 몰아갔다.

그는 가톨릭 신학과 신앙도 혐오했다. 로마 가톨릭 신학을 잘 알고 있었던 페오판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끌어와 가톨릭을 비판했다. 모든 신학서적은 성경과 교부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권위는 교회 전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다고 주장했다. 마치 프로테스탄트 근본주의자 같았다.

또 구원에 인간의 의지가 없다고 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깨졌고 인간은 죄에 빠졌다. 믿음이 인간을 구원한다.” 이것은 정교회 교리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교리였다.

기적과 신비도 부정했다. 신비를 간직했던 정교회 신앙은 미신으로 간주됐고 광야로 내몰렸다. 정교회 신학은 설 자리가 없었다.

이런 사회변혁은 스탈린 통치 때나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표트르 황제의 개혁은 러시아인들이 따르기에 급작스럽고 역겹고 공포스러운 것이었지만, 먹혀 들었다. 개혁이 먹히면서 새로운 계급이 생겨났다. 그들은 표트르 황제의 개혁과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자들로, 신앙보다 이성을 따르는 신흥 엘리트들이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은 두 갈래 길을 간다. 하나는 세상과 거리를 두는 신비주의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성적 종교의 길이다. 러시아인의 신앙은 그렇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