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친구 중에 김진국 목사라는 이가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산문집 <목사님, 한 잔하시죠>를 펴냈습니다. 평소 문재(文才)가 있던 그는 신학생 시절 ‘꿈을 이룬 어린 나귀’ 라는 동화로 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내가 나귀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게된 것도 이 친구 덕분입니다.

이솝 우화를 보면 나귀는 항상 우스꽝스런 사건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입니다. 흔히 나귀는 하나님께서 동물을 만드실 때 말을 만들고 남은 찰흙을 버리기 아까워 나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평소 나귀는 말과 비교해 볼품이 없고 덩치도 작으며 앞머리에 아름다운 긴 털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동양에서 ‘나귀의 해와 달’은 오지 않는 시간으로 여겨집니다. 주목할 만한 짐승도 아니어서 12지간(支干)에 쥐띠, 소띠, 호랑이띠 등은 있지만 나귀띠는 없습니다. 그런데 독일 비텐베르크의 마틴 루터 기념품 가게에서는 나귀만이 유일하게 판매되는 동물인형입니다. 이쯤 되면 나귀는 문화권 마다 서로 다른 대접을 받는 셈입니다.

나귀는 성경의 주요 사건들마다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나귀(창 22:3), 모세의 나귀(출 4:20), 발람의 나귀(민 22:21-30), 오뎃의 나귀(대하 28:15), 사마리아 사람의 나귀(눅 10:34) 그리고 예수님이 타신 어린 나귀(요 12:14-15)가 대표적입니다.

복음서 기록자들은 입을 모아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수 백 년 전 선지자 이사야와 스가랴 예언의 성취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사실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권력자와 전혀 다른 새로운 왕입니다. 유명한 유월절 행진에서 주님은 화려한 백마가 아닌 다리가 질질 끌리는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군악대의 연주가 아닌 아이들의 노래 속에 등장하신 새 임금님은 군인들의 사열과 행진 대신 백성들이 스스로 깔아놓은 겉옷과 남녀노소의 환영 속에 오셨습니다.

새로운 왕을 수행한 것은 어리숙한 어린 나귀였고, 부드럽고 파아란 종려가지였습니다. 강요되지 않은 개선 행진곡이 사람들의 가슴 가슴마다에 희망으로 울려 퍼진 장면을 상상하면 오히려 더 큰 위엄이 느껴집니다.

사실 나귀는 본디 체질이 강건하고 병에 대한 저항력이 크고 먹음새가 좋습니다. 인내심이 강한 나귀는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숱한 봉사를 해왔습니다. 세간에서는 말과 비교하여 보잘 것 없이 여기고 종자(種子)타령을 일삼았지만, 말은 전쟁에나 쓰인 반면 나귀는 참된 봉사자로 여겼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평화행진의 주인공으로 부름 받은 나귀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특히 나귀의 어깨 사이에 있는 독특한 검은 무늬를 십자가 모양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 십자가 표식을 가리켜 겸손히 섬긴 나귀에게 주신 명예로운 보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계적인 봉사단체들이 나귀를 상징동물로 삼게 된 배경입니다.

이제 사순절의 긴 순례를 마감합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종려주일, 나귀가 선택받은 의외의 드라마처럼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방식은 사람과 그 방법을 달리합니다. 지금 주님은 나를 부르시고, 또 이끌어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