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서평] 찰스 우드의 “신학탐구방법론”
최태관  |  감신대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0년 04월 03일 (금) 18:56:25
최종편집 : 2020년 04월 07일 (화) 11:28:52 [조회수 : 56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서평]

찰스 우드의 “신학탐구방법론”

  최태관 박사(감신대학교. 조직신학)

 

최근에 찰스 M. 우드 박사의 『신학탐구방법론󰡕(김흥규 역)이 번역 출간되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향해 급격히 발전해가는 시점에서 신학 탐구의 본질과 비전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의 특징은 전통적인 신학의 분류 방식과 개혁교회 신학자 슐라이어마허의 삼중 구분 사이에서 신학의 제3의 길을 제시하는데 있다. 종교개혁 시대 이후 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신학은 일반적으로 성서신학, 역사신학, 교의신학, 실천신학으로 구분되었다. 그 사이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저서 『신학입문󰡕에서 역사신학, 철학적 신학, 실천신학으로 구분하였다. 우드는 객관적 신학과 주관적 신학 사이에서 기독교 증언과 신학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하고 실증 학문으로서 신학의 본질로서 교회 지도력을 추구하는 신학의 길을 모색하였다. 다른 한편, 그는 신학에 대한 정의, 구성과 방법, 현실적 적용 과정을 해명함으로써 신학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신학의 길을 생동감 있게 서술한다. 특히 그는 기독교 증언을 비판적으로 검증하고 새로운 신학적 습성을 생산함으로써 현대적 학문성에 기여한다. 따라서 본 책은 통합학문으로서 신학의 학술적 기능과 가치를 성실하게 드러낸다. 기독교 증언(성서 연구와 역사적 전통)과 신학 연구를 위한 신학자들의 개별적인 결단과 교육으로서 전달 과정이 효과적으로 어우러져 기독교 신학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저서는 중립적이고 균형감 있게 신학하려는 신학자들이나 목회를 준비하거나 신학을 연구하려는 신학생들에게 간단하고 명료하게 그 길을 제시한다.

 

본 책은 기독교 증언 앞에 서 있는 신학자들과 신학생들의 현재적 상황에 대해서 소개한다. 우드는 1811년 『신학입문』을 출판한 슐라이어마허가 기독교 증언에 맞서 그의 삶의 자리를 근간으로 하는 신학적 방법론을 새롭게 정초한 역사적 사건에서 신학 탐구의 본래적 계기를 찾는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입문』은 과거의 교의학적 방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신학 연구 방법에 따라 기록된 역사적 산물이다. 이는 개인의 신학적 원칙(직관과 감정)의 결과이다. 그의 신학 방법론은 목회자 훈련을 위해 구분된 성서신학, 역사신학, 교의신학, 실천신학이 아니라, 세속 학문과의 관계에서 다양한 기독교 증언들을 비판하고 그 타당성을 검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학의 삼중적 분류는 사실상 개별 학문들의 유기적 특성과 통합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학은 기독교 증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검증을 통해 새로운 신학적 하비투스, 신학적 지성을 발견해야 하는 일이다. 신학은 기독교 전승을 수용하면서도 비판적 방법에 따른 새로운 신학적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는 데이비드 트레이시로 대변되는 고전후해석학과의 비교해 볼 때 상당히 특별한 점들이 발견된다. 트레이시는 해석학적 다원성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의 특성상 기독교 전통들은 상호관계적 대화를 바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증언에 대한 의심과 비판을 수용함으로써 현재 상황을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과제가 기독교 신학에 있다는 것이다.

우드와 달리 데이비드 트레이시는 슐라이어마허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에 따르면, 슐라이어마허가 전승에 대한 해석학적 절차로서 감정이입을 통해 텍스트에 대한 객관적 해석가로서 자신을 자리매김을 한다. 그래서 그는 텍스트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해석학적 과정으로서 ‘대화’를 알지 못한다. 트레이시의 비판이 우드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신학자로서 혹은 신학생으로서 신학의 길로 나아감을 생각할 때에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개인적인 신학의 길이다. 마치 슐라이어마허를 잇는 독일의 종교사 신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에게서 나타나는 포괄적이면서 통합적인 신학의 길이다. 그 길에서 트뢸치는 종교심리학자로서, 종교사회학자로서, 역사철학자로서, 문화철학자로서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고 있는 우드는 상당히 연구자 개인의 신학적 탐구에 초점이 맞추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에 신학을 탐구하는 신학자들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기독교 신학의 모델로서 슐라이어마허의 실증학문으로서 “신학은 기독교 공동체를 유지시키고 발전시켜가는, 기독교의 본질적 이념을 역사 안에서 현실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이것이 바로 교회 지도력 수행의 핵심이다”(35). 교회 지도력을 실현하기 위해 방법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드는 바로 역사신학, 철학적 신학, 실천신학을 통시적으로 파악하고 역사적 자료들을 개별적인 신학 과제의 목적에 따라 분류하고 종합하는 일을 조직신학 핵심적 과제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그의 신학적 입장은 목회의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아 신학의 연구를 경시하는 현재적 상황에 경종을 울린다. 신학 연구에 대한 경시는 세계에 자신을 드러나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를 막아서는 일인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역사신학, 철학적 신학, 실천신학의 유기적 상호관계를 제시하고 교회 지도력을 함양하려는 신학의 특별한 과제들을 제시함으로써 그 길잡이로서 신학의 역할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신학의 길이란 곧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하나님 계시의 길이고 하나님 실재가 인간의 내면에서 의식화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슐라이어마허의 개별화의 길을 비판하는 칼 바르트는 역사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서해석, 철학적 체계에 굴복하지 않는 교의학과, 성서신학과 교의신학에서 비롯된 실천신학을 주장했으나 신학 연구의 삼중적 구조를 벗어나지 않았다.

 

2장에서 우드는 개별화된 신학들의 상호관계를 바탕으로 역사적 이해 방식을 넘어 구성적인 믿음의 결단으로 나아간다. 현재에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전통, 교회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으로 전개한다.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판적 탐구를 통해 기독교 증언의 첫걸음을 제시하고 단순히 성서신학이나 교회사적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학은 기독교 증언이 지닌 비본질성을 고발하고 비판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에 대해 신학적으로 응답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다양한 관련 연구들에 대해 개방적이어야 하고 비판적 탐구여야 한다. 우드는 기독교의 증언과 비판적 탐구라는 기준에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신학적 습성으로서 하비투스와 새로운 하비투스를 개발하는 과제가 곧 신학의 과제이다. 그리스도인의 습성으로 정의되는 하비투스에 따라 반복되는 다양한 역사적 가르침과 교리와 달리 비판적 탐구로서 신학은 객관적 지식의 차원을 넘어 신학적 반성을 통해 새로운 지성적 습성들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는 활리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학의 회복은 곧 신학교육의 재정향을 위해서 교회성(기독교 공동체에 적합한 실존의 양태)이 포함해야 하는 대상을 이해하는데 있다.” 다시 말해, 신학은 기독교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적합한 신학적 지성(하비투스)를 개발하고 새로운 커리큘럼을 길을 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생들은 모호한 신학적 현실성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하비투스로서의 신학은 신앙의 지적이고 인식론적 구성요소로서 그 본질에서 신앙에 속하는데 신앙의 객관적 지적 요소, 즉 신조가 아니라 이 신조를 믿는 행위를 말하는데 이 믿음의 행위가 단순히 어떤 견해를 갖는 것을 넘어서 기독교적 자아를 형성하는 확신의 문제냐 아니면 실존적 자기 이해가 될 때 신앙에 속한다. 교사는 이러한 능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70).

 

3장에서 우드는 신학 탐구의 세 가지 차원, 역사신학, 철학적 신학, 실천신학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95)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적합성을 보증하는 일(96)이라고 주장한다. 비판적 탐구를 실행하는 신학자는 세 가지 물음을 제기한다. 이 증언이 진정으로 기독교적인가? 이 증언은 의미 있는 진리인가, 이 증언은 상황에 적합한가? 이 세 가지 질문이 기독교 증언의 보편적 타당성과 포괄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학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비판적 탐구를 통해 형성된 자료들을 통합하여 포괄하는 과제가 조직신학에 있다. 각 신학 분과와의 관계에서 조직신학은 신학의 세 가지 차원에서 형성된 각각의 분과들을 종합함으로써 기독교 증언의 타당성을 단일한 탐구 구조로 만들어가고 증언 전체를 일관성과 통전성이라는 시각에 구조화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조직신학은 이렇게 형성된 구조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상황에서 비롯된 다양한 질문에 대해 응답한다. 다른 한편. 우드는 윤리신학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기독교 증언의 타당성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음을 주장했다.

 

4장에서 우드는 일반적인 학문 연구와 동일하게 신학 연구를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신학자는 소극적으로 일반 역사가로부터 연구 결과를 기다려서는 안 되고 한 전문 역사가로서 당당히 신학적 탐구에 전념해야 한다(136). 철학적 신학이나 실천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도 일반 연구가(철학자나 인문학자) 같이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역사적 역동성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한계로 인해 쉽게 학문적 불충분성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는 기독교 역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종교개혁, 수도원개혁운동, 대각성 운동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138). 신학의 비판적 탐구는 단순히 전통을 재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현대적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신학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그는 역사적 신학-철학신학-실천신학으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연구 방법을 지양하고 오히려 통찰력과 분별력을 바탕으로 신학의 통일성으로 나아간다. 이와 같은 그의 신학적 태도는 일반 학문과 같이 이론과 실천을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것에서 벗어나 신학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신학의 대상을 다루는데 중심이 있다. 따라서 신학자는 다양한 신학 연구들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과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분별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해가야 한다(156). 조직신학의 과제는 세 가지 분야가 신학 연구에 있어서 상호 간에 빛을 제시하고 자기중심적 태도로 환원되는 태도를 비판하는 데 있음이 분명해진다.

 

5장에서 우드는 신학 탐구에 대한 교육적 효과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신학 탐구에서 비롯된 다양한 연구 결과를 사용하는 일은 대단히 강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드는 앞서 주장해온 바와 같이 주관적 결과와 객관적 결과를 구분하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 설교, 교육, 상담 등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객관적 교육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신학교육은 우리가 계속해서 신학적 하비투스로 부르는 것을 구성하는 지적으로 복잡한 인격 특질을 습득할 목적으로 신학의 탐구에 뛰어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180). 따라서 우드는 단순히 객관적 신학 탐구의 대상들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필요한 자료들을 얻고 신학적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비판할 수 기술을 연마하는 적극적인 의미의 신학 활동을 요구한다. 구체적으로 영성 형성과 기독교 전통의 전달, 교회 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한 전문적인 훈련이다(188). “교회 지도자가 성인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복음의 빛에서 자신을 진실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타인 역시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양육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필요는 아니다. 교회 지도자가 되는데 필수적인 덕목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참으로 기독교인답게 살아나가는 것(즉,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 은혜와 심판 아래에 두는 것)에 있다”(189). 신학 탐구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신학적 하비투스, 신학적 지성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회심하고 새로운 신학적 지성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나님 인식 없이 신학적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판적 태도를 통해 단순히 습관처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비판이나 비판적 사고를 통해서 능력과 성향을 합한 적성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신학의 목적으로 보았다. 신학자들은 신학적 지성의 개발을 통해 역사신학, 철학적 신학, 실천신학을 통해서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교회와 한국의 신학적 상황에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운 신학교육에 있어서 신학생들이 신학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이점이 있는 책이다. 우선 자신의 전공 분야에 집중하면서도 인접 분야의 중요성을 깨닫고 소통함으로써 자신의 전공 분야의 연구를 촉진시킬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자인 김흥규 박사(내리교회 담임목사)는 켈시가 주장했던 아테네 형식과 구분하여 우드의 방법을 베를린형 신학교육이라고 부른다. 영혼을 훈육하거나 전인적 인격을 형성하는데 목적을 둔 아테네식 교육, 즉 파이데이아로서의 교육(219)이 아니라, 엄격한 학문적 규범과 리서치 연구 방법에 따르는 신학 방법이다(220). 계시와 성서와 같이 주어진 권위가 아니라, 인간의 공통 경험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하는 비판적 탐구이다. 이와 같은 연구 방법은 신학이 더는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다른 학문과 같이 그의 학문성과 실천성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의학과 법학이 사회 전체의 건강과 정의에 기여하는 의사와 율사를 길러내는 전문교육인 것처럼, 신학 역시 사회-역사적 실체로서 교회를 위해 영혼을 돌볼 목회 지도자를 육성하는 실증 학문, 즉 현장에서 그 가치가 입증되는 학문이다”(221).

다른 한편, 오늘날 현대 사회에 적용 가능한 새로운 신학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책이다. 최근의 코로나 19사태는 한국교회에게 새로운 과제를 부여하고 있다. 심각한 감염 확산으로 인해 교회가 비대면 예배, 즉 유튜브 생방송을 통해 화상 예배를 드리고 있고 몇몇 교회들은 국가의 예배 중단을 거부하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다. 전쟁 중에도 예배를 중단이 없었다는 주장과 함께 주일 예배를 정당화는 일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상황이다. 이는 기독교 신학이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드는 기독교 증언이냐 아니면 비판적 태도인가 하는 상황에서 특정한 태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종합함으로써 보다 나은 신학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역자는 이를 파이데이아와 학문으로서 신학을 종합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우드가 고슴도치와 여우형을 비교하면서 이야기했듯이 기독교 역사를 통시적으로 볼 수 있는 거시적 습성과 각각의 대상들을 정교하게 비판적으로 분석해내는 미시적 습성이 함께 어울어져야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고통스럽지만 하나님 앞에서 대화를 통해서 풀어가야 할 숙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한 신학생이 물어왔다. “지금 코로나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대답하기 쉬워 보일지 모르는 이 질문 앞에서 필자인 나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사태 이후 한국교회가 직면하게 될 위기 앞에서 보다 더욱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틸리히와 같이 하나님의 응답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그 대답이 주관적이고 인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앵무새와 같이 사람의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신앙적 위기 앞에서 결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신학 탐구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얍복 강가에 야곱과 같이 인간은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여 우리의 신학의 길을 열어 가시는 그분에게서 우리가 나아갈 비전을 새롭게 발견해야 할 것이다.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54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0 / 최대 22400바이트 (한글 11200자)
- 금지어 사용시 댓글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 [댓글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도배성, 광고성, 허위성 댓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