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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명한 목사의 강해 설교에 대한 유감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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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년 02월 07일 (금) 02:26:05 [조회수 : 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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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사가 자기 교회에서 고린도전서를 가지고 강해 설교한 것을 정리해서 책으로 냈다. 그 는 미국의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지금 대형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다. 나는 그가 설교를 잘 한다고 들었던 터라, 그의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저자를 소개하면서 특히 신학생들이 그의 설교를 좋아한다고 극찬하고 있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목사는 그 책의 ‘여는 글’에서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또한 설교자로서 저는 개인적으로 고린도전서 강해 설교에 분명한 목적을 두었습니다.”라고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강해 설교를 세심한 편집을 통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주신 성서원에 감사를 전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강해 설교의 모범을 대할 수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목사의 고린도전서 강해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크게 실망했다. 내가 왜 그의 설교에 실망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그의 고린도전서 설교집에 나와 있는 <만물의 찌꺼기일지라도>라는 제목이 달린 설교문을 들여다보겠다.

그가 본문으로 택한 고린도전서 4장 9-13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이 목사는 이 설교의 서두에서 고린도가 아주 번창하는 도시였다는 것과 그런 도시에 사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만족하여 왕 노릇 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는 강해할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8절을 인용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그는 이 고린도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은보화를 비롯해 각종 자원을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좌정하지 않으신다면 그 교회는 가난한 교회요, 벌거벗은 교회라는 것이었다. 이 도입주가 마음에 들어서 관심을 갖고 읽어 나갔다.

이어서 그는 <나를 자랑하느냐, 하나님을 자랑하느냐>라는 소제목을 내걸고, 본문의 첫 절을 인용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그러고 나서 설교자는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로마 시대에 승리한 개선장군이 선두에 서고 맨 끝에 전쟁 포로를 세워서 구경거리로 삼았다고 고린도전서 기록 당시의 사회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 다음에는 고린도후서 11장 22-33절을 아주 길게 인용했다. 먼저 22-27절에서 바울은 그를 폄하하는 상대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기도 그들에 뒤지지 않는 혈통의 자손이며 자신도 사도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주리고 헐벗기도 했다고 자기가 당한 고난을 자상하게 언급했다.

그리고 바울은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 심경을 토로했다.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이 목사가 고린도전서 4장 9-13절을 본문으로 삼아서 설교하다가 고린도후서 11장 22-33절을 인용한 것은 그가 본문으로 택한 고린도전서 4장에 기록된 고난이 11장에 소상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본문에 나오는 “우리는 약하나”가 고린도후서 11장에 좀 더 자상하게 나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어 보였다.


강해 설교와 본문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이 목사는 11장을 인용한 후에 “신앙의 진가는 결국 자신을 자랑하느냐, 하나님을 자랑하느냐로 구별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바로 이 부분의 소제목 <나를 자랑하느냐, 하나님을 자랑하느냐>를 염두에 둔 언급으로 보였다. 그런데 강해의 본문인 고린전서 4장 9-13절에는 ‘자랑’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소제목은 강해의 본문과는 관련이 없었다.

내가 ‘본문’을 거듭 언급하는 것은 강해 설교는 설교자가 택한 성경 본문의 문맥에 맞는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 연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다. 강해 설교자는 주석가로서 본문의 뜻을 찾아야 하고 메시지는 성경본문에서 나와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강해 설교자는 그가 택한 본문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설교자가 정한 본문의 내용과 관련 없는 소제목을 정한 것을 보고 이 설교가 과연 강해 설교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이 설교자는 소제목의 ‘자랑’을 그가 길게 인용한 고린도후서 11장 중에서 30절에 나오는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였다. 이것을 보고 이 설교자는 이 소제목이 붙은 단락에서 본문보다는 인용문에 의지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자랑하느냐, 하나님을 자랑하느냐>라는 소제목이 붙은 단락에서 정말 본문이 외면당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가 설교 중에 본문을 언급한 것은 두 번뿐이었다. 그러고는 본문은 제쳐놓고 연속적으로 시편 73편 1-13절, 히브리서 11장 13,16절, 고린도전서 4장 14-15절과 16절을 인용하면서, 그 인용문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렇게 본문 외의 성경 구절들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강해 설교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

이 강해 설교의 두 번째 소제목은 <당신은 제자입니까?>인데, 이 단락에서는 첫 번째 소제목의 단락에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설교 본문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4장 17절과 디모데후서 2장 2절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겠다고 말했다는 것과 디모데에게 교인들을 잘 가르치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배우고 양육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라는 말로 설교를 끝맺었다.

설교 본문에 나오는 바울이 “그리스도 때문에” 약해지고 비천해지고 모욕과 박해를 감수하는 것은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본문은 이 설교의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복음 전파와 맥이 통했다. 그러나 문제는 강해 설교를 하겠다고 공언한 이 설교자가 본문에 집중하지 않고 본문 외의 성경 구절에 의지해서 논리를 전개했다는 점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떻든 이 설교는 성경 본문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밝혀서 전달해야 하는 강해 설교는 아니다. 이렇게 설교할 요량이었다면 그는 애당초 그의 설교가 강해 설교라고 말하지 말았어야 한다.

이 목사는 강해 설교에서는 본문에 집중해야 한다는 강해 설교의 기본 개념을 잊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린도전서 4장 9-13절을 본문으로 택한 이 설교자가 첫 번째 소제목의 단락에서 본문인 고린도전서 4장 9-13절 다음의 14-15절을 인용하고 설명한 다음 16절도 인용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제목의 단락에서도 본문 밖의 고린도전서 4장 17절을 인용했다. 그가 강해 설교를 하려고 했다면, 이 설교자는 앞뒤로 넓혀서 본문을 최소한 고린도전서 4장 8-17절로 정했어야 한다.

강해 설교자도 본문을 강해하는 중에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본문 이외의 성경 구절을 인용할 수 있지만, 본문에 집중하지 않고 이렇게 본문 외의 성경 구절들에 의존하는 설교는 강해 설교라고 말할 수 없다.


제목의 설정

설교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제목이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어느 설교학 책에서는 설교자는 설교 제목을 가지고 설교하는 날 새벽까지 고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설교의 제목은 설교의 내용을 포괄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설교의 제목이 ‘주님의 십자가’라면 그 설교는 주님이 어떻게 그리고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나는 앞에서 소제목으로 설정된 <나를 자랑하느냐, 하나님을 자랑하느냐>가 이 설교의 본문과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이 제목을 가지고 설교자가 강조하려는 것은 나를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교에서 ‘나를 자랑한다’는 말이 설교자가 인용한 고린도후서 11장 30절(“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에만 나온다. 그리고 왜 우리가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렇게 설교의 내용과 동떨어진 제목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한다‘는 말은 본문에서도, 인용문들에서도, 설교자의 설명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소제목의 단락에서 설교자는 바울의 고난, 악한 자가 흥하는 것, 믿음의 사람들이 본향을 사모하는 것, 그리고 바울이 교인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했다는 것을 언급했다. 그런데 이런 언급은 <나를 자랑하느냐, 하나님을 자랑하느냐>는 제목과 별로 상관이 없었다. (단 두 번째 소제목 <당신은 제자입니까?>는 그 단락의 내용과 잘 어울렸다.)

전체 제목도 설교의 내용과 따로 놀았다. 이 설교자는 본문의 마지막 절에 나오는 “만물의 찌꺼기일지라도”를 이 설교의 전체 제목으로 정했다. ’찌꺼기‘와 그가 인용한 고린도후서 11장 30절 “내가 약한 것”은 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그 부분 외에서는 <만물의 찌꺼기일지라도>라는 제목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연관될 만한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는 전체 제목도 첫째 소제목도 설교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았다.

강해 설교를 하든 주제 설교를 하든 설교자는 자기가 정한 제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설교에서 제목과 내용이 겉도는 것을 보면, 이 설교자는 제목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설교뿐 아니라 일반 글이나 책에서도 제목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이 목사는 이러한 상식을 외면하고 있었다.


논리의 전개

설교자는 논리의 단절이나 비약이 없도록 물 흐르듯 논지를 전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단의 첫 문장 안에 앞선 문단의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단어를 포함시키거나, 앞선 문단의 의미를 포함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렇지만,’ ‘그 외에,’ ‘그리고’ 같은 연결어를 사용해서 앞 문단과 뒤 문단을 연결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 설교자는 문단의 연결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논리 전개가 매끄럽지 못했다.

이 목사는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거주할 본향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고린도전서 4장 14-15절을 인용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인용문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나은 아버지로서 그들을 권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고린도전서 4장 14-15절의 내용이 설교자가 바로 앞에서 말한 “우리가 영원히 거주할 본향이 아니”라는 말과 전혀 연관이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앞 문단과 연관 없는 글이 갑자기 튀어나오면 글의 맥이 끊기게 마련이다. 그렇게 글의 맥이 끊기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이게 왠 일인가 하고 당황한다. 설득력 있는 설교를 하려면 글의 논지가 끊기지 않도록  매끄럽게 이어가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하면, 이 목사가 인용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먼저 고린도전서 4장 14-15절을 인용해 놓고 다음에 그 인용문을 설명하고 있었다. 글 쓰는 사람은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설교자의 견해가 언급되고 다음에 그 의견을 보강하기 위한 인용문이 나와야 한다. 이 설교자처럼 인용해 놓고 그 다음에 인용문을 설명하면 앞선 문단과 인용문이 연결되지 못할 뿐더러, 설교자가 인용문에 끌려가는 꼴이 되어서 설교자의 주장은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식의 인용은 금물이다.

이 목사가 글쓰기에 미숙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설교 중에 나오는 문단 하나를 들여다보겠다. 그는 “약한 게 어떻게 자랑이 될까요?‘라는 질문으로 한 문단을 시작했다. 이런 경우 청중은 설교자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리라고 기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설교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이 질문에 이어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삶에 정을 붙이지 말고 천국을 소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질문을 해놓고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던 청중은 허탈해진다. 이렇게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말이 반복되면, 설교자의 말을 따라가려다가 지친 교인들은 결국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된다.


마치면서

나는 이 유명한 설교자의 고린도전서 설교집을 읽고 크게 실망했다. 그는 자기가 강해 설교를 한다고 공언했지만, 실상 그는 강해 설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설교의 제목은 설교 내용을 포괄해야 한다는 것도 외면하고 있었다. 그 외에 자기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인용해야 한다는 인용의 원칙을 모르고 있었고, 논지를 매끄럽게 전개하는 데에도 미숙했다.

자신이 강해 설교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을 뿐더러 훌륭한 설교자로 널리 알려진 이 목사가 강해 설교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글쓰기의 기본조차 모른다면, 이 사람보다 덜 알려진 설교자들의 설교는 어떨까? 고린도전서에 대한 이 설교집을 읽으면서 김형석 교수가 일본에서 산 4년 동안 왜 한인 교회에 나가지 않았는지 이해할 만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국민의 교육수준이 많이 높아졌는데도 목사들의 설교 수준이 김 교수가 일본에서 공부하던 70여 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신학대학에는 설교학 과목이 있다. 그런데 목사가 이렇게 설교 원고를 작성할 줄 모른다면, 그 설교학 시간의 강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교육이 대체적으로 이론에 치우치고 있어서 실제적인 설교문 작성에 관한 교육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설교문을 작성하는 글쓰기 훈련이 설교 이론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논리적인 글을 쓸 줄 모르면 호소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인의 교육수준이 전에 비해 아주 높아져서 젊은이들은 글쓰기에 능하다. 그들은 수업 시간에 글쓰기를 배울 뿐 아니라, 대학 입학을 위해서 논술 시험을 준비하면서 글쓰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한다. 그런데 목사들은 왜 글을 쓸 줄 모를까? 그들이 구세대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학교에서 글쓰기 연습을 게을리했거나 논술 시험이 없는 대학을 나왔기 때문인가?

목사 지망생들이 중등학교에서 글쓰기를 소홀히 했다면, 신학대학에 와서는 글쓰기 연습을 힘써 해야 한다. 개신교의 예배는 설교 중심이고 교인들이 예배에서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담임 목사의 설교이기 때문이다. 목사의 설교가 부실하면 교인들이 그 교회를 떠난다. 따라서 신학대학에서는 성경이나 신학 공부의 과목을 좀 줄여서라도 집중적으로 글쓰기 훈련을 시켜야 한다.

어떤 신학대학에서는 학생들을 선발하면 입학식 전에 합격자들을 모아놓고 집중적으로 히브리어와 헬라어 공부를 시키고 있다. 그런데 성경 원전을 읽는 능력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 쓰는 능력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글쓰기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성경 원전을 잘 읽고 신학 지식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목사가 그 지식을 가지고 설득력 있는 설교를 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이 올바로 쓰일 수 없다. 우리는 그 예를 우리가 지금까지 들여다본 고린도전서 설교집의 저자에게서 볼 수 있다.

어떤 분은 신학대학에서 전공을 공부하는 데도 시간이 부족한데, 어떻게 글쓰기를 훈련시키겠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재료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물건을 만드는 요령을 모른다면, 그 재료는 빛을 보지 못하게 마련이다. 반대로 재료가 좀 부실하더라도 물건을 만드는 재주가 출중하다면, 그 재료로도 좋은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설교에서도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을 전달하는 능력이다. 그 능력은 바로 글쓰기 훈련에서 나온다. 말재주나 글재주를 타고난 사람들이 있지만, 타고난 재주가 적다 하더라도 노력하면 글쓰기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 에디슨이 ‘천재는 99%의 땀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는 전혀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께 능력을 달라고 기도만 하는 것은 게으른 자들이 곧잘 빠지는 함정이다. 목사들은 흔히 하나님은 부족한 자를 들어 쓰신다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은 하나님이 특별히 들어 쓰시려고 작정하신 경우에 해당한다.

일반적인 경우, 하나님은 우리가 노력하면서 기도할 때 길을 보여주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은 인간 편에서 지기의 길을 계획할 때 하나님이 그를 도우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기독교 국가인 독일에서 나왔다는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그 속담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속담이란 원래 경험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는 이러한 우리의 경험을 뒷받침해 준다. 그 비유에서는 주인이 준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장사해서 이윤을 남긴 종은 선하고 충성스럽다고 칭찬을 받고,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은 악하고 게으르다고 질책당할 뿐 아니라 받은 달란트조차 빼앗긴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마저 빼앗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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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199.218.124.2)
2020-02-07 05:51:17
지나가다 남긴다.
가장 피해야할 글의 전형이다.
첫째, 지나치게 길다. 8800자 분량이면 일간지 칼럼의 5배 분량.
둘째, 그럼에도 이 글의 목적이 그 유명목사를 비난하기 위함인지 신학생들에게 글쓰기 연습하라는 교훈인지 분명하지 않다.
셋째, 둘다 목적으로 삼았다면 대단히 필자중심적 생각이다. 독자를 고작 필자인 나로부터 가르침받는 하수들로 내려보고 있다는 태도가 깔려있다. 넷째, 이는 동시에 나(필자)는 글을 잘 쓰고 비판도 합리적으로 할 줄 안다는 자의식의 과잉을 보여준다.
다섯째, 결국 비판으로 시작해서 교훈으로 끝나는데 중언부언하며 끝을 맺는다. 자기만족성 글일 뿐이다.

그럼 어떻게 써야하냐고?
1/4로 줄이라. 메시지를 명확히 하라. 양파까듯 이 얘기 저 얘기 다 늘어놓는 건 최악의 글이다. 전문적인 정보와 사실관계를 둘러싼 가치판단을 보여주는 심층적 글도 아니면서 원고지 44매 분량을 쓰는 것이 글을 잘 쓴다는 역량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혼자 무조건 써 제끼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치명적 오류다

필자 본인은 여러 이슈를 아우르는 통합의 기막힌 글을 썼다고 착각할지 모르나 이 글은 구성도 문장도 그냥 일기수준이다. 아무리 인터넷에 분량제한이 없다해도 독자를 고려한 글을 쓰라.

제목이 '유감'이라면 왜 유감인지만 일목요연하게 비평으로 그치라. 비평이 곧 비평자를 우월하게 보이면 안된다. 이 글에는 비판자를 높이는 문장으로만 가득차 있다. 시선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비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니 본인도 궁색했나 엉뚱한 글쓰기 교훈으로 화제를 바꾼거다. 글이 너절해지는 가장 큰 이유다.

도대체 감리교 목사들은 왜 이다지도 자기 만족과 확신에 가득찬 우물 안 개구리들만 천지삐까리인가. 이 엄중한 시대에 고만고만한 부류들끼리 도토리키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참고로 이 댓글은 원고지 4장 반 분량이다. 우연히 제목에 낚였다가 짜증내서 진실을 내뱉는다. 글 갖고 잘난체 좀 하지 말고 살자. 인신공격이니 이 딴 말로 호도하지 마시고 반성 좀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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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5
김경환 (222.100.38.174)
2020-02-07 16:41:59
‘쉬운 건 어렵게, 어려운 건 널뛰기’하며 고상한 척하는 유식한 척하는 능력도 능력이니...
그렇고 그런 목사 설교를 들으면 하품이 나오는 이유 중의 하나를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글입니다.

자신의 의견은 10%도 안 되고, 제3자 듣보잡(?) 의견을 90%이상 섞어서 설교하면서 은연중에 자신의 유식을 자랑하며 목에 힘주는 설교를 들으면 구토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유명한 철학자나 종교인을 많이 알만큼 지식이 넘쳐난다고 자랑하는 건지 하나님의 말씀을 시의 적절하게 설명하는 건지 헷갈리게 만드는 설교를 들으면 하품이 나온다는 겁니다.

시골 할머니들이 손자를 무르팍에 올려놓고 옛날 옛적에... 하고 이야기 할 때 ‘말하고 싶은 주제’와 ‘그 일이 주는 교훈’을 이야기하면 어린 손자는 다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식한(?) 할머니가 손자에게 강 이쪽에서의 진리와 강 저쪽에서의 진리는 반드시 같지 않다는 걸 이야기하면서 유식하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까지 끌고 와서 어쩌고저쩌고하며 어렵게 설명한다면 이건 코미디일 겁니다. 이런 코미디 같은 설교가 실제로 횡행하고 있습니다.

웃기는 건... 누구나 알기 쉬운 교훈은 그냥 쉽게 설명하면 될 터인데 이걸 아주 멋들어지게 어렵게 설명한다는 겁니다. 좀 어렵고 난해한 교훈은 아인슈타인의 할애비의 할애비의 이론을 가져와서라도 누구나 알기 쉽게 설교하려고 노력하는 목사는 극소수입니다. 난해한 교훈은 아예 입도 벙긋하지 아니하거나 평생 설교 근처에도 가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간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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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김경환 (222.100.38.174)
2020-02-07 17:05:56
지식과 지혜는 좀 다르다!

본문 글에서 “그런데 문제는 지금 국민의 교육수준이 많이 높아졌는데도 목사들의 설교 수준이 김 교수가 일본에서 공부하던 70여 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라고 하였는데...

70년 전보다는 지식수준은 높아졌다고 볼수 있으나 지혜수준은 오히려 퇴보할 것은 아닐까? 정주영, 이병철시대의 국민학교 졸업장과 지금 현재의 대학교 졸업장의 가치는 어느 것이 더 중할까?

영어, 수학, 국어, 글쓰기 등의 지식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지혜까지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바울의 경우 비록 대학은 졸업하지 아니했지만 그렇고 그런 대학졸업자들 보다는 지혜는 더 충만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정주영의 경우 비록 대학졸업자는 아니었지만 지혜 있는 자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옛날에 비해 지식은 상당히 높아졌다고 볼 수 있으나 지혜까지 상당히 높아졌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신학대학 나와 지식은 어느 정도 있는 목사는 넘쳐나는데 반해 지혜 있는 목사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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