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시작된다. 명절 연휴라 해도 딱히 갈 곳이 없는 나는 우스갯말로 방콕에 장시간 머물 예정이다. 언제부터 방콕 여행에 취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명절이 되면 가족들은 큰집으로 일찌감치 움직여도 나는 꿋꿋하게 방콕 여행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은 분명히 기억난다.

방콕 여행이 시작되기 전, 두서너 번 명절을 쇠러 큰집에 간 적이 있었다. 나의 큰집은 그 동리에서 그래도 사는 집이었다. 너른 마당에 안채와 사랑채, 외양간과 곳간 그리고 측간이 안과 밖으로 있었고, 논과 밭도 꽤 있었으며 큰아버지는 그 당시만 해도 농사에 일가견이 있으셨다. 또 동네에서 존경을 받는 분이셨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큰집엔 인사드리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문안을 드리면 집에 가지 않고 꼭 안채나 사랑채에 있는 방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명절 음식을 먹기도 하고, 화투를 치기도 하고, 그간의 동정이나 일년 농사 계획을 나누며 왁자지껄 놀다 가셨다. 어린 마음에 그 모습들이 재미나서 방방마다 돌아다니며 어른들을 구경하였는데 그러다 세뱃돈을 얻는 횡재가 주어지기도 했다.

그저 두서너 번 함께 했던 명절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큰집 새언니의 음식솜씨였다. 안동에서 시집을 왔는데 새언니의 곱고 예쁜 얼굴처럼 음식도 보기에 좋았고 맛도 좋았다. 특히 새언니의 배추전은 앉은 자리에서 열장은 거뜬히 먹고도 또 먹고 싶은 부침개였다. 뜨겁게 달군 가마솥 뚜껑에 들기름을 바른 뒤 부쳐내는 전은 그 두께가 나비처럼 하늘하늘하고, 백지장처럼 얇았지만 찢어지지 않는 놀라운 솜씨였다. 그 맛과 솜씨에 반하고 새언니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지금도 명절이 되면 배추전만은 빼놓지 않고 부쳐내 먹는다.  

지금은 모두 믿는 가정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큰집은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제사상에 오른 음식 가운데 유독 나의 눈을 사로잡는 과자가 있었다. 동글납작한 모양에 표면은 빨강색과 흰색, 약간의 초록과 노랑으로 물들인 알록달록한 사탕이었는데 성인이 되어 이름을 검색하니 ‘옥춘’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귀했던 때, 이것은 아무나 못 먹었다. 아니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음식이며 과자였다. 꼭 큰어머니의 손을 거치고 하사를 받아야 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귀한 과자였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밥을 먹으면서도 눈은 그 과자에 가 있었다. 밥상을 무른 뒤, 소화가 한 김 되었나 싶으면 큰어머니는 아이들을 불러 앉히셨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주 조용하고 공손하게 큰어머니를 마주 뵙는다. 경건 훈련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습득되는 순간이었다. 큰어머니는 우리 모두가 정결한 마음이 모아졌다 여기시면 그때 아이들 이름을 일일이 부르시면서 과자를 주셨다.

내 차례가 되었다. 공손히 앞으로 나가 두 손을 내밀었다. 두 손에 과자가 놓였다. 저런! 옥춘이 아니었다. 내 손 위에 놓인 것은 빨간색의 조그만 사탕 하나. 입에 물고 오물오물거리면 입술과 혓바닥이 빨갛게 물들어가는 색소 사탕. 그때부터 경건함은 사라지고 원망이 밀려오는 순간이었지만 나는 워낙 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뒤로 나 앉았던 기억이 지금 새롭게 떠오른다. 옥춘은 맛보았을까? 그렇다. 상심한 나를 부엌으로 불러낸 새언니가 내가 좋아하는 옥춘을 몰래 챙겨주어 큰어머니를 향한 원망은 입에 문 옥춘과 함께 깨끗이 녹아내렸다.

이제 그런 설날의 기억은 사그라졌다. 오래전 친척들과 왕래가 끊어진 탓에 큰댁에 갈 기회는 더 없어졌다. 그리고 몇 년 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큰집 마을은 내 기억과는 너무나 달랐다. 동네가 변한 것인지 아니면 내 기억이 흐릿한 것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그 마을은 아주 작고도 작았다. 동네 입구에 있었던 교회만이 내 기억과 일치하는 것 말고는 내 기억의 시골 큰집은 더 이상 옛날의 큰집이 아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옛 기억을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워서 한동안 동네 어귀의 정자에 앉아 흐린 기억들을 흘려보내고 왔다.

설날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그동안 왕래가 끊어진 친척들, 마음이 고왔던 새언니가 유독 보고 싶어진다. 오래 전 기억속에 남겨진 모습들을 다시 소환하고 싶은 마음은 설날 아침 옥춘을 먹고 싶어한 내 어린 마음만큼 간절하다. 모두 평안히 잘 계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