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라라도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면 자의식이 생긴다. 모스크바 공국이 몽골 타타르 사람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기틀을 잡으면서, ‘러시아인’이라는 의식이 생겼다. 러시아 정교회도 콘스탄티노플 정교회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이유가 있었다. 피렌체 공의회 때문이다. 피렌체 공의회(Council of Florence, 1439)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한 공의회였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는 이 모임 자체를 ‘정교회 신앙의 변절’로 보았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이전 황제는 그의 형 요안네스 8세(John 8 Palaiologos, 1392-1448)였다. 그에게는 통치할 땅이 별로 없었다. 제국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에게(Aegean)해 몇 개 섬만 다스리는 처지에다가, 콘스탄티노플마저 오스만 제국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제국이 아니라 도시국가였다.

동로마 황제는 서로마 교황에게 기대고자 했다. 요안네스 8세는 바티칸 교황에게 공의회를 열자고 했다. 명분은 교회 일치였지만, 실제는 오스만 제국을 몰아낼 서유럽의 지원군을 불러오는 데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로마 교황 에우제니오 4세(Eugenio IV)는 교회 개혁을 요구하는 바젤 공의회(Council of Basel, 1431-1442)에 휘둘리고 있었다. 공의회는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고 했다. 여차하면 교황을 폐위할 수도 있었다. 로마 가톨릭의 최고 권위가 바티칸과 공의회 사이를 오락가락 했다. 교황은 바젤 공의회의 반발을 무릅쓰고, 메디치(Medici) 가의 후원을 받아 피렌체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동로마 황제 요안네스 8세와 세계총대주교 요시프 2세(Joseph II of Constantinople, 1360-1439)가 공의회에 참석했다. 동서 양 교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연옥(purgatory) 교리, 성령의 이중 발출설인 ‘성자로부터’(et filioque) 문구, 성찬에 누룩이 들어간 빵 사용 문제 등을 조정했다.

1439년 동방 정교회 수장인 황제와 로마 교회 수장인 교황은 동서 교회의 일치를 교령(ecclesiastical decree)으로 공포했다. 교령의 이름이 ‘Laetentur Coeli’ 였는데, 번역하면 ‘하늘이여 기뻐하라’다. 하늘이 기뻐했을까? 로마 가톨릭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서로마의 교황은 로마 교황권이 우위라고 집요하게 주장했다. 이미 정치력을 상실한 동방교회는 군사 지원을 받기 위해 로마 교회의 우위를 인정해 줬다. 이제 로마 교회는 순서가 아니라 서열로 첫째가 됐다. 로마 다음으로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서로 총대주교의 서열이 정해졌다.

서로 파문하고 갈라선지 400여 년이 다 되어,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는 일치에 서명했다. 그런데 이틀 뒤 갑자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시프 2세가 세상을 떠났다. 동방교회 대표들은 흔들렸다. 그리고 “세계총대주교는 개인 의견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따라서 결정된 사항들은 만장일치로 각 지역 주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 에베소 주교 마르코스(Mark of Ephesus, 1392-1444)는 처음부터 서명을 거부했다. 그는 협박하는 로마 교황에게 맞섰다. “로마 교회는 이단이므로, 바뀐 교리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300년 후인 1734년 그는 동방 정교회의 성자가 됐다.

교회 일치 교령이 공포된 다음 해인 1440년, 황제 요안네스 8세와 대표들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제국의 상황이 뒤숭숭했으므로 황제는 서둘러 세계총대주교를 임명했다. 그러나 에베소 주교 마르코스의 단호함은 변함이 없었다. 교령에 서명했던 주교들도 그를 따라 동서교회 일치를 반대했다. 혼란한 상황은 계속됐다. 많은 수도사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새로 임명된 총대주교는 로마로 피신했다.

그러니 피렌체 공의회에서 공포한 교령이 효력을 발휘할 리 없었다. 서로마에서 군사도 오지 않았다. 1448년 황제 요안네스 8세가 죽었다.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1세 역시 상황을 수습할 수 없었다. 1453년 천 년을 이어온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그렇게 멸망했다.

콘스탄티노플이 왜 무너졌는가? 러시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가톨릭과 타협했다. 비잔틴 제국이 무너진 것은 정교회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콘스탄티노플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해서 정교회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고 또 믿었다. 모스크바 공국은 ‘제3 로마'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국 이반 4세(Ivan Vasilyevich, 1530-1584)는 유명한 황제다. 그는 1547년 호칭을 대공에서 ‘차르’(Tsar, 황제)로, 모스크바 공국에서 모스크바 제국(Tsardom of Russia)으로 바꿨다. 러시아 교회는 비잔틴 제국의 의식을 흉내 내어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의 나이 17살 때였다.

이반 4세는 처음에 통치를 잘 했다. 그러나 서른 살에 왕비가 죽자 광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궁중 암투에 왕비가 독살당했다고 믿었던 그는, 측근과 귀족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는 땅을 황제 직영지 ‘오프리치니나’(Oprichnina)와 귀족 영지 ‘젬시치나’(Zemsichina)로 나누고, 충성하는 자들에게 자기 땅을 주었다. 황제로부터 땅을 받은 사람들을 ‘오프리치니크’(Oprichnik)라고 불렀는데, 검은 옷에 검은 말을 타고, 안장에는 개 머리와 빗자루를 매달았다. 차르에 반대하는 자들을 물어뜯고 쓸어버린다는 뜻이다. 이들은 비밀 군대가 되어 차르에게 저항하는 세력과 가족들을 숙청했다. 무차별 테러로 붙잡힌 귀족들과 가족들은 고문 후 처형 당하고 빼앗은 재산은 몰수됐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에 있는 가장 큰 도시가 ‘노브고로드’(Novgorod)다. 1570년 비밀 군대는 노브고로드로 가서 3만 명을 학살했다. 당시 3만이면 거의 다 죽인 것이다. 러시아는 공포에 빠졌다. 정적이 제거됐다고 여긴 황제는 오프리치니크를 모두 죽인 후 조직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이반 뇌제(雷帝, Ivan the Terrible)다. 스탈린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말년에는 몽둥이로 아들을 때려 죽였다. 자신이 죽을 때는 몇 일 동안 울부짖으며 궁을 헤매다 쓰러졌다. 독살된 것이다.

이반 4세의 통치 때 모스크바 대주교는 마카리(Macarius of Moscow, 1482-1563)였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동경하지 않고 러시아의 옛 것을 수집하려고 했다. 콘스탄티노플과 단절하려는 의도 때문에, 14세기 아토스 수도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명상과 침묵과 신비의 수도원 운동은 멀어져 갔다.

국가가 강력해지면 국민의 자의식도 자란다. 자의식에서 싹트는 ‘자기 민족에 대한 긍정’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교회가 ‘모스크바가 마지막 로마’라는 종말론으로 포장하고, 기름을 부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교회전통이 한 민족의 기억 속에 갇히게 된다. 거기서 생기는 것이 ‘민족 우월감’이다. 콘스탄티노플이 갖고 있던 ‘세계 교회’라는 신앙 전통은 러시아에서 ‘민족 교회’로 대체되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우월감이 됐다.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남은 것은 모스크바 공국의 국력에 걸맞게, 모스크바를 총대주교급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정교회의 정통 신앙보다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중요한 문제가 됐다. 그리하여 국가와 교회는 정통 신앙보다, 모스크바에 총대주교 세우는 일을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감리교회가 웨슬리 신앙보다 ‘감독 뽑는 일’에 전력투구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