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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예수와 사회를 등지는 교회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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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1월 27일 (수) 14:02:45
최종편집 : 2019년 11월 27일 (수) 14:04:11 [조회수 :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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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feminism) 운동은 19세기 말에 시작해서 1960대에 와서는 비평계의 화두가 되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20세기 초까지 여성은 존재감이 없었다. 20세기 초에 영국의 작가 버지니어 울프는 오빠들을 대학에 보내면서 자기는 딸이라고 해서 대학에 보내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 누나도 남동생들은 대학에 보내면서 자기는 중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고 어머니에게 불평하는 것을 여러 번 들은 일이 있다.

내가 30대였을 때만 해도 여자가 자전거를 타는 것이 이상스러워 보였다. 그때 미국에 가서 보니 여자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축구하는 여자들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큰 버스를 여자가 운전하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었다. 활동적인 일은 모두 남자의 영역이었고 여자들은 집안에서 살림이나 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들의 직업과 남자들의 직업이 그렇게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건축현장 같은 아주 힘드는 노동은 남자들이 감당하고 있지만, 많은 일터에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일하고 있다. 심지어 여자들이 도맡아 하던 육아까지도 남자들이 육아 휴가를 얻어서 돕고 있다. 요즘은 사시에 합격하는 사람들 중에 여자가 더 많다고 한다. 여자 판사나 검사를 영감님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그런 직종이 얼마나 오랫동안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남성 우월적 사고는 최근까지 과학실험에서도 지속되었다고 한다. 뇌과학자 송민령의 말에 따르면, 미국국립보건원의 지원을 받는 임상 전 단계의 동물 실험과 세포 실험에서, 수컷뿐 아니라 암컷도 포함시키라는 정책이 시행된 것은 2014년이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쥐 실험을 할 때 수컷 쥐만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암컷은 좀처럼 연구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20세기 후반에 여성주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 초에 영문과에 여학생은 10% 미만이었다. 그런데 20세기 말에는 여학생이 80% 이상으로 급상승했다. 집안에만 갇혀 있던 여자들이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활보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유림의 극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자 호주제가 법제화하기에 이르렀다.

여성주의자들은 남자 중심 사회에서 여자들이 무시당하는 것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도 남녀차별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중반에 비해서 지금 여성의 지위는 많이 향상되었다. 이것은 여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다.

사람이란 이기적인 존재여서 남자들이 자기들의 독주체제에 제동이 걸리는 여성해방운동을 환영할 리가 없다. 19세기 영국의 작가 하디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테스』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에서 남성중심 사회에서 겪는 여자들의 고통을 그렸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혼을 반대하신 예수님

그런데 예수님은 남자로서 이미 2천 년 전에 여성을 해방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예수님은 원조 페미니스트였다. 진정 예수님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예수님이 여자들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예수님의 주변에 예수님을 돕는 여자들이 많았다(눅 8:2-3)는 정도의 이야기는 우리가 많이 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그렇게까지 말할 만한 증거가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예수님이 소외된 자들을 돌보셨다는 성경 기록은 많이 나오지만, 예수님이 페미니스트라고 불릴 만큼 진보적인 분이었단 말인가?

마가복음 10:2-12절에서 예수님은 아내를 버리는 일에 관해서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버려서는 안 된다고 답하셨다.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고 버리면 된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보다 더 앞서서 이루어진 “창조 때”를 언급하시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은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답하셨다. 단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음행이라고 말씀하셨다.

모세의 율법을 버리라는 것은 예수님에게 질문한 바리새인들로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혁신적인 언급이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생존하셨을 때 유대 사회에서의 이혼 조건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아스의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에 의하면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힐렐학파에서 이혼권을 남편의 일방적인 처분에 맡겼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해서 살다가 아내가 남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편이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우리 전통 사회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고, 결혼 생활에서도 완전히 남편의 처분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하면 남편을 따르고 나이가 들면 아들을  따라야 했던 우리네 옛 여인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유대사회에서도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을 하면 남편을 따랐다고 한다.

전통 유대 사회에서 있었던 남녀의 성관계에 대한 관행에서도 그 당시 여자들이 얼마나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남자는 다른 여인과 성관계를 갖더라도 그것이 결코 그의 혼인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는 달랐다. 여자는 간음할 경우 어김없이 이혼을 당했다. 이러한 것은 남자는 처첩을 거느릴 수 있고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해도 무방하지만, 여자에게 정조는 목숨과 바꾸어야 했던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남자들이 자유롭게 누렸던 성 관례는 실상 간음하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계명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였지만, 유대 남자들은 간음하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을 오직 여자들에게만 엄격하게 적용하고, 남자들은 초율법적인 특권을 누렸다. 유대 남자들은 자기들에게 편리한 대로 관례를 만들어 놓고 그 관례를 근거로 모세의 율법을 범하고 있었다.

유대 남자들이 자기들 중심으로 만들어 놓은 관례의 문제점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촉구할 뿐 아니라 모세보다 더 엄격한 간음의 기준을 제시하셨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그러고 나서 바로 다음에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32)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간음의 문제를 여자에게만 적용하지 않고 남자에게도 적용하셨다는 점이다. 아내가 간음한 경우에는 이혼이 가하나 그 외의 이유로 아내를 버린다면 그것은 경제적인 힘이 없기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갈 수밖에 없는 그 버려진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만드는데, 그 간음의 책임이 아내를 버린 남편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혼당한 여자를 받아들이는 남자가 본부인 외의 여자와 간음하게 되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아내를 버린 사람이라고 했다. 따라서 한 남자가 자기 아내를 버릴 경우에는 간음에 대한 이중의 책임이 그에게 있다.

다윗이나 솔로몬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부다처제가 관행이 되어 있던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은 간음의 문제가 남자나 여자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남자들의 탈율법적인 간음 행위의 문제점을 지적하신 것은 남자와 여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관례의 희생자인 여자들을 그 잘못된 관례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하신 것은 현대 여성주의자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페미니즘 운동이 여자들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서야 시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19세기는 물론 지금도 여성운동을 지지하는 남자들이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남자로서 여자들을 그들이 처한 곤경으로부터 구해주시려 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다. 예수님은 분명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셨다.


마치면서

예수님이 소외된 자들을 도우신 것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권면하신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소외된 사람들을 도우려고 여러 가지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선이나 구제는 유대인들도 행하고 있던 일이다. 우리는 유대 사회에 고아, 과부, 나그네를 돌보고 환대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추수할 때 이삭을 남겨서 가난한 사람들이 그 이삭을 줍게 했다는 것을 구약에서 읽을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유대인들은 세 가지의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제1의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쓰이는 십일조였다. 제2의 십일조도 있었는데, 그것은 축제에 쓰이는 십일조로서 제1의 십일조을 바치고 남은 것 중에서 다시 1/10을 구별하여 바치는 규례였는데, 이것은 민족 절기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구제비에 쓰이는 제3의 십일조가 있었다. 이 십일조는 고아, 과부, 나그네 그리고 레위인 등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쓰였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소외된 자나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가르치신 것은 관례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들의 신앙을 격려하거나 여자들에게 당신의 사역을 도울 수 있는 제자직을 허락하신 것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남자들이 여자들을 노리개처럼 취급하고 임의대로 이혼할 수 있던 사회에서 예수님이 이혼을 금하심으로써 여권의 신장을 꾀하신 것은 관례를 전복시키는 혁신적이 일이었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의 범위를 여자들의 범위까지 확대하셨다. 이러한 범위의 확대가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구약에서 간과했고 여자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회에서 여자들이 소외된 것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인권을 인정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예수님은 시대를 앞서간 분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사제의 자격에서 여자를 제외하고 개신교의 보수 교단에서도 여자들에게 안수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경을 올바로 읽지도 못하고, 사회를 알지도 못한다. 예수님은 여자를 소외시키지 말라고 가르치셨고 사회는 여권신장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할 뿐 아니라 사회도 외면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시대를 앞서갔가셨는데 지금 교회는 사회를 등지고 있다. 목사들은 성경이면 충분하다고 믿고 성경과 교리에 관한 책 외에는 책을 읽지 않는다. 김형석 교수는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한국에 온 미국인 목사들이 까뮈나 싸르트르를 모르더라고 말한 일이 있다. 목사들은 세상 지식은 신앙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작가들의 책을 외면한다. 그런데 그렇게 책을 읽지 않는 목사들은 책을 읽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올바로 읽지 못한다. 이것이 문제다.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은 저만큼 앞서가는데, 목사들은 뒤에서 터덜거리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맹인된’ 지도자들이라고 비판하셨다.

우리는 교인들도 사회 안에 살고 있으며 교회도 사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불교의 사찰은 산속에 있지만, 교회는 마을이나 도시 안에 있다. 이것은 불교는 사회를 외면하지만, 교회는 사회와 호흡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따라서 도시 안에 자리한 교회가 사회를 외면하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사랑의 복음을 가지고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서, 달리 말하면,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사회를 등지는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사회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사회를 앞서가는 개선책을 내세우셨는데, 교회가 사회를 등진다면, 그런 교회는 예수님의 뜻을 외면하는 교회다. 요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지각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뜻을 외면하는 교회, 사회에 뒤진 교회를 등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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