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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우리의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가?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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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1월 01일 (금) 10:02:52
최종편집 : 2019년 11월 02일 (토) 01:21:35 [조회수 :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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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우리가 광복된 후로 최악의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랫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세계 곳곳에 소녀상을 세우고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해왔다. 그리고 한국의 대법원에서는 2018년에 신일철주금의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각각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러한 한국 측의 요구에 대해서 일본 측에서는 위안부 문제는 2015년에 타결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통해서 10억 엔을 지급했는데, 다시 위안부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1965년에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 때에 이미 지불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갈등이 심화하면서 일본에서는 그 보복조치로 반도체 핵심 소재들의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는 조치를 발표했고, 이어서 한국을 수출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이에 맞서서 한국에서도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군사정보보호협정(GISOMIA)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고 반일감정이 극에 달하자 우리의 반일감정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반일 민족주의』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의 역사가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한일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올바로 알고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일 민족주의』의 저자들은 징용되어 일본의 탄광에서 일한 사람들은 일본인 노동자와 동일한 임금을 받았다는 통계수치를 제시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들은 보수를 받고 위안부 노릇을 했다는 연구결과를 인용했다. 그들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이 일본군의 노예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정대협의 주장은 반일감정을 부추기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자의에 의해서 위안부 노릇을 하지 않은 사람도 탄광에서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한 사람도 많다. 그들의 주장을 참고한다 하더라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아서 착취하고 만행을 저지른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은 우리의 주권을 빼앗았고, 언어를 말살하려 했을 뿐 아니라, 창씨개명을 강요하면서 우리를 황국신민으로 만들려고 획책했다. 그리고 동경 대지진 때 조센징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서 대량 학살을 자행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리고 독립투사들이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워서 주권을 되찾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3·1 독립운동, 6·10 만세 사건 등이 일어났고,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본에 대항해서 싸웠다.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등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구속되어 고문당하거나 사형당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학교들을 폐교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교인들을 투옥했다. 그래서 200여 교회가 파괴되고, 2,000여 명의 교인이 투옥되었는가 하면,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30여 명은 옥중에서 순교했다.

이렇게 일본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우리를 탄압한 것이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는 한, 『반일 민족주의』의 저자들이 몇 가지 사실이 왜곡되었다고 말한다고 해서 우리의 반일감정이 해소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에게 그들의 수탈과 만행을 사과하라고 요구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한일 청구권 협정’이나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통해서 배상했기 때문에 충분히 사과를 표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흔히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독일은 2차대전 후에 정중하게 사과했고 지금도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는데, 왜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일본도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일이 서슴없이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한 것은 그들이 죄를 중시하는 기독교를 믿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기독교가 일본 땅에 뿌리내리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인에게 죄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지 않는 것도 그들에게 죄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수치심을 중시하는 일본인은 사과하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긴다. 그들은 수치를 당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결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자기들이 한 만행을 사과하기보다는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직접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돈 같은 간접적인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이렇게 가해자가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계속 사과를 요구할 경우 그들은 고집 세게 사과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면 서로에 대한 반감이 격화될 것이다. 따라서 사과를 요구하는 방법으로는 한일관계가 개선될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일본과 좋은 이웃으로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특히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의 가르침

누가복음 10장 25-28절에서 보면 율법사가 예수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고 질문한다. 그러자 그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언급한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는 예수에게 이웃이 누구인가를 물었을 때, 예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알려진 그 유명한 비유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을 만큼 맞아서 길옆에 버려져 있었다. 그 옆을 지나가던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지만,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돌보아주었다.

이 이야기를 마치고 예수는 그 율법사에게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하자, 예수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웃을 단지 자기 민족이나 형제에 국한시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해서 그들을 멸시하고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아가서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었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모두 유대인 지역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주로 유대인들이 다니는 길이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지리적 상황에 의한 추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등장인물들의 설정을 살펴보면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드러난다. 만일 그가 유대인이 아니고 사마리아인이라거나 다른 이방인이었다면,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이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이방인을 돕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면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이 자기 동족을 도운 것은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일 때에만 예수의 질문이 의미를 갖는다.

이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와주었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웃으로 생각한 자기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에 당시의 이웃에 대한 개념의 범위를 넘는 행위다. 그러나 여기서 당시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라고 멸시당한 것을 감안한다면,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운 것은 단지 민족의 경계를 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기를 적대시하고 멸시하는 사람을 도운 일이다.

예수는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고 가르쳤다. 그리고 덧붙여서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그것은 세리들도 하는 일이고,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그것은 이방인들도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예수가 말한 원수는 레위기에서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19:18)라고 말한 모세의 원수와는 다르다. 레위기에서 모세는 동포를 원수 삼지 말라고 했지만, 예수가 말한 원수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 혹은 “악인”(마 5:45)이다.

예수는 마태복음에서 말한 너를 박해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누가복음의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다시스 행 배를 탔다. 그러면 왜 요나는 여호와의 명령을 외면했는가? 바벨론 유배 이후에 유대를 재건하고 유대교를 개혁하려고 한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선지자들이 선민의식을 강조하면서 이방민족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이미 아내가 된 이방여인들조차 쫓아냈다. 이사야 49장 6절에 이방인의 구원이 언급되어 있지만, 그런 단편적인 기록은 전반적인 이방인 혐오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이 예언한 이방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빠른 시일 안에 실현될 것으로 믿고 그 심판을 기다렸다. 이렇게 여호와는 유대민족만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이방인을 미워하시고 심판하실 분으로 믿은 요나는 이방인의 땅 니느웨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

그리고 니느웨가 수도인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두렵고 혐오스러운 침략자들이며 적이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처음 침공한 때는 요나 시대보다 거의 100년 전인 B.C. 850년대였다. 살만에셀 3세가 다메섹을 비롯해서 이스라엘까지 침공하려고 했을 때 아합 왕이 연합군으로 참여하여 살만에셀을 격퇴시킨 일이 앗수르와의 첫 번째 싸움이었다.

그 후 842년 살만에셀의 재침공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으며, B.C. 745년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점령당했고 살만에셀 4세에 의해 멸망당했다. 요나는 그와 같은 앗수르 침략기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그에게는 반앗수르 감정이 강했기 때문에, 적국 앗수르 제국의 부흥보다는 멸망을 더 원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서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켰다.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불만이었다.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서의 마지막 절에서 요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의 저자는 유대인들의 앗수르에 대한 적대감은 실상 여호와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요나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 저자는 반앗수르 감정에 사로잡힌 당대의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전복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의 적대국 앗수르도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일하는 선지자들도 그들의 적 앗수르까지도 사랑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나라를 식민지 삼아서 우리의 정체성을 말살시켜려 했고 교회를 박해했던 일본인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


마치면서

과거에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탈해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악행을 사과하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자진 협력했다거나 그들이 우리의 뒤떨어진 산업을 발전시켰다고 억지소리를 하기도 한다. 지금도 그들은 기술력을 앞세워서 우리를 압박해오고 있다. 여전히 그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했던 것처럼 그들과 맞서서 싸워야 할까? 신약 시대에 예수가 가르친 것처럼 그들을 이웃으로 포용해야 할까? 예수는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그렇게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실행하기에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우리가 손양원 목사를 추앙하는 것은 그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행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존경하는 것도 그가 원수 사랑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실제로 원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일본을 용서하고 그들을 이웃으로 대한다는 것은 실행하기 어려운 이상론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이상론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실현 가능할지 모르지만, 국제 관계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러나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앗수르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일본인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두 나라의 사람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서로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예수가 달린 십자가를 마음에 그리면서 그 희생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린다. 요한일서 저자는 하나님과 예수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4:11)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우리”는 단지 내 동포만이 아니라 우리를 박해하는 이웃 나라까지를 포함한다.

우리가 대를 이어서 일본인에 대해서 원한을 품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손 내밀어야 한다. 예수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 5:46)라고, 그러면 세리나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죄의식이 없기 때문에 사과할 줄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사과하라고 소리쳐도 그들에게서 사과를 받아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과 좋은 이웃이 되려면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예수의 가르침이고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일본을 용서하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따라서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일본에게 먼저 손을 내밀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찬송 하나를 골라서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했고>를 불러본다.
    
     내가 먼저 손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기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 . . . . . . . . . . . . . .

     왜 나의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른 채 이렇게 흐느끼며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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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11-04 19:47:44
죽창가 부르며 일본을 때려잡을 듯이 그렇게 난리치더니만 최근 슬그머니 꼬랑지를 내리고 아베에게 대화나 구걸하는 참으로 더러운 문재인 일당!
일본이 그동안 수없이 사죄했건만, 보상금(배상금)은 잘도 챙겼으면서 사죄(사과)가 진실 되지 못하다는 핑계로 이미 끝난 일을 계속 물고 늘어지는 참으로 치사한 민족성!

개인 간에 어떤 불미스런 일이 발생해서 상대방의 명시적인 사과(사죄)가 없고 또 상대방에 대한 분이 덜 풀렸더라도 상대방으로부터 합의금(보상금)을 받으면 상호간에 그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것입니다. 합의금(배, 보상금)을 받은 사람이 사건 합의 후에 돌아서서 상대방으로부터 진정한 사죄(사과)를 받지 못해 억울하다고 딴 소리를 한다면... 이런 자를 누가 사람 취급하겠습니까?

한국이 바로 보상금(합의금)만 챙기고 나중에 딴소리하는 얌체 인간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더럽고 치사한 짓을 골라서 하는 겁니다.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이미 끝난 사안에 대해 국가 간의 보상 아닌 개인 간의 보상은 해당이 안 된다느니, 진정한 사죄(사과)가 없었기에 만족을 못한다느니... 이건 완전 양아치 수법 아닌가요?

일본과 좋은 이웃이 되려면 일본도 일본 나름대로의 성의를 보여야하겠지만 한국도 이런 양아치 행태를 그만 두어야할 것입니다.

일본천황을 戰犯의 자식 운운하며 일본의 역린을 함부로 건드리면서 죽창가 부르며 아베를 때려잡겠다고 설친 게 불과 얼마 전인데... 꼬랑지를 내리고 아베에게 대화를 구걸하고 나자빠졌습니다. 이렇게 쓸개도 없이 구는 데 대해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놈의 죽창가는 어디로 간 걸까요?

문희상 국회의장이 일본천황을 아무렇게나 가지고 놀다가 혼쭐나서 3번이나 사과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사과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동안 일본이 한국에 대해 무수한 사과를 했지만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며 한국이 냅다 발로 차버린 걸 일본으로부터 그대로 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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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3
김경환 (222.100.38.174)
2019-11-01 11:05:10
논리전개 중 크게 보아 세 가지의 오류가 있다!
<첫 번째의 오류> 돈만 받고 사과는 받지 않은 비열한 한국인

일본은 무수한 사과(사죄)를 하였으나 한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주는 배상금(보상금)은 받아들였습니다. 한국은 아주 비열하게도 돈(배상금, 보상금)만 받고, 진정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죄(사과)는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아래와 같이 여러 차례 사죄했습니다. 한국은 보상금(배상금)은 잘 챙겼습니다. 보상금(배상금)은 그대로 넙죽하고 받았으나, 사죄는 그대로 넙죽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사과(사죄)한 경우를 예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에게 히로히토 천황이 "금세기의 한 시기에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했으며,

1990년 노태우 대통령에게 아키히토 천황이 "우리 일본에 의해 초래된 불행한 시기, 귀국의 사람들이 겪었던 불행을 생각하며, 나는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1995년 8월 15일에 일본 수상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줬다. 의심할 여지없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라고 사죄했습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과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등 1995년 이후 역대 수상들이 연대서명하여 전 위안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일본의 국무총리로서, 난 이와 같이 위안부로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고 치료할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부상을 입은 모든 여성들에게 나의 가장 진실한 사과와 참회를 새로 넓힙니다. 우리는 과거의 무게를 피해서도, 미래에 대한 책임을 피해서도 안 됩니다. 난 우리나라가 사죄와 참회의 심정으로 자국의 도덕적 책임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정면으로 과거 역사를 바라보고 이것을 정확히 미래 세대에 전달해야 합니다.”라고 사죄했습니다.

2010년 8월 10일 일본 수상 간 나오토가 “난 식민지 지배로 인해 야기된 크나큰 피해와 고통에 대해 갱신된 깊은 유감과 마음 깊은 사과를 표합니다.”라고 사죄했습니다.

<두 번째 오류> 독립은 태평양전쟁의 결과로 그저 주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때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한국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와 상해임정의 독립운동 등으로 알제리의 독립운동에 비하면 鳥足之血입니다. 어디다 대고 “독립운동 했소!”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워 말을 할 수도 없을 터인데... 북한은 북한대로 김일성의 독립운동을 뻥튀기하고, 한국은 한국대로 우물안 개구리 행태로 자화자찬을 일삼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의 實情은 극소수의 선각자 이외의 대부분 백성들은 순종황제가 “짐이 일본천황에게 조선의 통치권을 讓與하였으니 백성들은 그리 알고 일본천황의 명을 따르라!”는 엄명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절대다수 조선인은 누가 뭐랄 사람이 없는 데도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1940년도의 경우 강원도 횡성군의 이창만이란 壯丁이 일본군 지원에 탈락하자 비관하여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는 교사 질을 때려치우고 만주軍에 입대하여 1등으로 졸업하기도 하였습니다.

1938년 400명 모집에 2900여 명 지원(경쟁률 7.2 대 1)
1939년 600명 모집에 1만2300여 명 지원(20.5 대 1)
1940년 3000명 모집에 8만4400여 명 지원(28.1 대 1)
1941년 3000명 모집에 14만4700여 명 지원(48.2 대 1)
1942년 4500명 모집에 25만4300여 명 지원(56.5 대 1)
1943년 5330명 모집에 30만3400여 명 지원(56.9 대 1)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자 다급해진 일본이 1944년 9월부터 강제징용을 실시하였으나 일본해가 미군에 의해 봉쇄당하여 강제징용마저도 제대로 실행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승만, 김구, 안중근, 김준엽 등 극소수의 독립 운동가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일제시대 조선인은 일본에 협력했다고 정직하게 이야기 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치부를 감추려고 북한의 김일성 식으로 역사를 뻥튀기해서야 되겠습니까?

일제시대의 광주학생의거라는 것도 실상은 열차 안에서 일본인이 한국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가지고 희롱하는 광경을 목격한 혈기 넘치는 조선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으로 일종의 패싸움에 해당됩니다. 장군의 아들 김두환이 일본깡패들과 맞장을 뜬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미사여구를 첨가하면 소설이 되는 겁니다. 3.1운동마저 없었다면 그야말로 몰골이 처참해지는...

<세번째 오류> 독일은 전쟁관련 사과는 했어도 식민지관련 사과는 한 적이 없다

독일은 사죄를 했는데 일본은 왜 안 하냐며 비교하곤 하는 데 독일은 식민지관련 사죄한 게 아니고 전쟁 중 학살관련 사죄를 했을 뿐입니다. 벨기에의 경우 2백만명이나 식민지 주민을 학살했습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 일본의 막대한 자금을 퍼부은 것도 사실이며... 독일, 영국, 벨기에 등에 비하면 비교적 신사적으로 식민지를 통치한 것도 사실입니다. 관동대지진에 대해서도 뻥튀기가 심하나, 1952년 12월, 제109회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내무부에서 전국적 조사 통해, '일본 震災時 피살자 명부'라는 제목으로 조선인 피살자 290명에 대해, 2015년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 조사위원회'가 최종 신원 확인자 40명 발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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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11-01 14:01:30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인은 총알받이로 250만여명, 조선인은 2만여명이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하였다!

태평양전쟁 참전 日本軍이 戰線에서 사망한 원인 중 가장 많았던 것은 굶주림이었다. 일본군 총전사자는 25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이중 60%에 가까운 약 140만 명이 餓死했다. 70만명은 地上戰에서 전사했고, 40만명은 海戰 등에서 전사했다. 일본군의 餓死는 쌀 등 물자부족으로 인한 보급품 단절 및 연합군의 봉쇄작전 등이 원인이었다.

일본군 전사자 250만명 중 한반도 출신자는 2만명 내외다. 전체 전사자 중 1%가 안 된다. 당시 일본본토 인구가 7100만명, 한반도 인구가 2000만명 초반 대였음을 감안하면 아주 적은 희생이다. 일본제국이 조선인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세우지 않은 셈이다.

이러한 원인은 徵兵(일본계)과 募兵(조선계)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당시 일본계에 대해서는 1939년부터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져 젊은 日本系 남성은 징병되었고, 여성은 근로 동원되었다. 朝鮮系 男女에 대해서는 5년 후인 1944년부터 국가총동원령이 적용되었다. 
          
※ [참고1]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제국은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만주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인은 軍統帥權者인 천황 지휘 하에 美軍 등 연합군과 전투를 벌여 2만명이나 일본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또 소련軍 휘하에 들어간 아주 극소수의 조선인은 스탈린그라드戰鬪에 투입되어 독일軍과 맞장을 뜨기도 하였다. 또 만주로 탈출한 극소수의 조선인은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戰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조선인 절대 다수가 천황의 지휘를 받아들이는데 망설임이 없었고, 극소수가 이를 거부하여 소련軍, 만주항쟁軍, 상해임정軍 등에서 抗日활동하였다.

※ [참고2]
징용(근로동원)된 조선계의 80% 정도는 한반도 內에서 근무했고, 20% 정도가 일본 등으로 이동해 근무했다. 당시 조선여성의 경우,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15세 ~ 40세에 해당하는 미혼 여성에 대해 1944년 9월부터 1년간의 근로의무가 주어졌다. 이때 동원된 조선여성은 20만 명가량이었다. 이들 20만 명의 여성을 가리켜 흔히 '근로정신대'라고 부른다.

일본제국은 戰時에 여성을 근로 동원하는 것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당시 소련의 경우 女軍만 해도 80만 명에 달했다. 간호병은 물론 비행기조종사, 탱크운전병, 저격수, 유격대원 등의 임무가 주어졌다. 미국의 경우 당시 女性 4300만 명이 전시 동원되어 군수공장 등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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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11-01 14:02:43
태평양전쟁에서 日本과 함께 싸운 韓國 (2017. 12. 24. 산케이 신문)

- 마쓰키 구니토시(松木國俊, 1950년생), 조선근현대사 연구소장 -


韓國은 웬만하면, 자국을 '2차 대전 전승국'이라고 주장하고, 학교 교과서에서도 '한국인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에 맞서 싸웠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美國과의 전쟁에 돌입하기까지의 진행과정(美日교섭 등)을 조선사람들은 긴장하는 상태에서 추이를 지켜보며, 美國의 일방적 요구에 크게 반발했다. '美國과 英國을 공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1941년 12월8일, 진주만에 대한 기습공격이 보도되자, 朝鮮人들은 內地의 日本人들을 능가하는 열광을 보였다. 

1941년 12월14일에는, 조선사람들에 의한 조선臨戰보국단 조선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거기에서, 해방후 韓國 정부의 상공부 장관이 되는 詩人 주요한(朱耀翰) 씨는 이렇게 호소했다. 

'正義의 탈을 쓰고 착취와 음모를 도모하는 세계 제일의 위선군자 아메리카 합중국의 루즈벨트君! 당신들의 運은 끝났다.' '一億 동포와 반도의 2400만명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戰의 용사가 될 것을 맹세한다.' 

전쟁이 시작되자, 특별지원병 모집에 朝鮮의 젊은이들이 쇄도했다. 1942년에는 모집인원 4077명에 25만 4274명이 지원했다. 적령기에 있는 건강한 남자의 태반이 지원한 것이다. 朝鮮은 유교국가이므로 군대에 지원하려면 보통, 부모, 친척 등의 허락이 필요했다. 대동아 전쟁에 대한 조선민족 전체의 압도적 지지가 있었던 것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높은 경쟁율을 뚫고 자원입대한 청년들은 우수하고 용감했다. 1938년에 지원병 1期로 입대한 최경록(崔慶祿) 씨는 뉴기니아 전선에서 소대를 이끌고 美軍들에 맞서 전투에 나섰다가 全身에 被彈했다. 부하 이데타(出田) 상등병에 의해 후송되던 중, 최경록 씨를 신병 때부터 지켜보던 참모장 '오노 다케오'(小野武雄) 대좌가 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노 참모장은 '최경록을 살리지 못하면 폐하와 朝鮮人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외치며 최선을 다하도록 한 결과, 최경록 씨는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다.(이데타 상등병과 오노 참모장은 戰死했다)

최경록 씨는 해방후 외교관이 되어, 駐英, 駐日 대사 등을 역임했다. 駐日 대사 부임시에는, 천황의 신임장 봉정(奉呈) 때, 통상 10분이면 끝나게 되어있었지만, 40분에 걸쳐 긴 대화가 이어졌다. 태평양전쟁에서 朝鮮人들은 잘 싸웠다. 朝鮮人들은 군인과 군속을 포함해 24만명 정도가 전쟁터로 부임해, 아시아 식민지를 해방시키기 위해 日本人과 함께 生死를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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