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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목사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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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10월 04일 (금) 01:24:02
최종편집 : 2019년 10월 19일 (토) 00:09:37 [조회수 : 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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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비판하지 말라고 말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바울도 로마서에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했다.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같은 일을 행”한다는 점을 지적했다(2:1).

그래서 교회에서는 목사나 이웃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으면, 예수는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고 말하면서 그 사람의 입을 막으려고 한다. 실상 교회는 아무나 한마디씩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근거 없는 비난도 난무하기 때문에, 인신공격성 비난을 할 경우에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을 인용할 만하다.

그런데 비판하지 말라 혹은 판단하지 말라는 말을 강조하다 보면, 아주 정당한, 꼭 해야만 하는 비판을 봉쇄하는 데에 성경이 사용되기도 한다. 비판받을 만한 일을 한 목사들은 흔히 설교단에서 예수의 이 말을 인용한다.

성경 주석자들은 비판이라는 말에는 정당한 비판과 음해하려는 비난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태복음 7장 3-5절에 나오는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본다는 말에 주목해서, 예수가 비판하지 말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비난이었다고 주장한다.

주석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비판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악을 행할 때 분연히 일어나서 그릇 행하는 백성들을 질책했다. 그들의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의였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악을 행할 때 왕 앞에 나아가서 직언했다. 개혁자들 역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일어선 사람들이다. 이러한 의로운 비판을 예수나 바울이 금한 것은 아니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보면 예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을 저주하기도 했다. 그는 그들의 행태가 하나님의 의를 벗어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예수가 한국의 목사들을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예수의 비판

마태복음 23장 1-36절에서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유대인들을 올바로 인도하려는 예언자적인 사명의식을 지닌 예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벗어났다는 것을 직시했다. 예수는 그들이 말만 풍성하고 자기들이 가르치는 것을 자신들은 행하지 않는다는 말로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예수는 비유적으로 그들이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만 앞세우는 그들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는 복장으로 치장하고 윗자리에 앉아서 거들먹거리고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존경받기를 좋아하는 그들의 위선, 교만, 그리고 권위의식이 예수 보기에 가증스러웠다. 예수는 그들이 겸손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했다.

이런 지도자들은 자기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들어가려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천국 문을 가로막는 자들이다. 그들은 교인들을 얻기 위해서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교인들을 잘못 인도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이 가증스러운 지도자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그들을 저주했다.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저주로 발전할 만큼 그들에 대한 예수의 분노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수는 중요한 것을 경시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시하는 그들의 분별력 없는 행태를 비판했다.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금, 예물, 십일조 같은 물질이었다. 그들은 물질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성전, 제단, 그리고 정의와 긍휼과 신의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특히 예수는 그들이 십일조를 드리면서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신의는 버렸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을 외면하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충성했지만, 예수는 아주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하나님께 해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는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혀서 인간을 외면하는 그들의 행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다음에 예수는 그들의 위선을 본격적으로 비판했다. 잔의 겉은 깨끗한데 안은 썩은 것으로 가득하다고,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아름답지만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그들이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하지만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지만, 실상 그들은 선지자들을 박해한 자들의 자손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을 박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수는 그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를 만큼 분노가 극에 달했던 것 같다.


예수의 사랑과 비판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예수가 비판하고, 용서하라고 말한 예수가 용서하지 못하면서 왜 이렇게 화를 냈을까? 우리는 주석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두 가지 종류의 비판을 가지고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왜곡된 생각이나 욕심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는 그들을 비판했다. 예언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의였다. 따라서 예수의 비판을 단순히 그들의 흠을 지적하려는 비난이 아니었다.

다른 면에서 보면, 예수는 그가 구원하려는 유대인들을 아주 사랑했기 때문에 화를 냈다. 중학교 다니는 자녀가 공부를 하지 않고 컴퓨터 게임만 일삼을 때 부모들은 화를 내게 마련이다. 영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체벌을 가하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자녀에게 체벌 가하는 것을 극히 삼가지만, ‘사랑의 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웃집 아이가 컴퓨터 게임에 빠졌을 때, 그것을 보고 우리는 화내지 않는다. 내 자녀가 우리를 실망시킬 때, 우리가 화를 내고 심지어 벌을 주는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을 사랑했다.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쳤지만, 복음 전파의 일차적인 대상은 유대민족이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민족 중에서 자기의 동족 유대인들을 가장 사랑했다. 따라서 예수는 어느 민족보다도 유대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대교를 대표하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외면했다.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복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사사건건 예수가 하는 일을 시비하고, 심지어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일하는 사탄의 세력이라고 예수를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예수는 장차 그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 것까지 예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들을 구원하려는 자기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크게 실망했다.

크게 실망했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그렇게 화를 낼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가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가 육신을 입었다는 면에서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배고플 때 먹어야 했고, 피곤할 때 쉬어야 했고,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지녔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실망하는 것처럼 예수도 자기가 사랑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실망했고,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의를 행하고 교회를 바로 세워야 할 목사가 불의를 행할 때, 우리가 실망하여 화내는 것처럼, 예수는 자기의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실망해서 화를 낸 것이다. 그렇다면, 원수를 용서하라고 가르친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용서했을까?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그 용서의 범위에는 자기를 재판에 회부한 유대교 지도자들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유대교 지도자들을 닮은 한국교회 목사들

예수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판한 것 하나하나가 한국교회 목사들에게 해당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외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의를 외면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유대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말만 풍성하고 행함이 없는 위선자들이다. 교만과 권위의식에 사로잡혀서 섬길 줄을 모르는 것도 유사하다. 그들은 물질에 사로잡혀서 호의호식하고 거창한 교회건물을 지어놓고 우쭐댄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행위, 특히 사랑은 외면한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위선, 권위의식, 물질주의, 편향적 주장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교회 지도자라면 최소한 범법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들은 유대교 지도자들보다도 한 술 더 떠서 악을 행하다가 고소당하고 교회 법정이나 세상 법정에서 실형을 받기도 한다. 그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와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분별력이 없다고 비판한 예수가 이런 분별력 없는 목사들을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까?

분별력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목사들 가운데에는 학교를 다닐 때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 지금도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올바로 읽지 못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성경의 전부라고 착각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 그것은 무식한 자의 아집일 뿐이다. 예수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맹인된 지도자라고 말한 것처럼, 목사들 중에는 맹인이라고 비판받을 만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같은 사람도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다고,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 글을 쓰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거스틴을 비롯한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이 걸출한 학자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는 목사들은 그 학자들조차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흔히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외면하는데,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 그 사람도 맹인이다.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지혜 있는 자들”을 박해하리라고 말했는데, 특히 교단에 속한 한국의 신학대학에서는 앞서가는 신학이론을 소개하거나 연구하는 신학자들을 박해한다. 이렇게 학문연구의 자유가 없는 신학대학은 지혜 있는 자들의 무덤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보여준 것처럼 문을 닫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예수는 전통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이제 예수가 목사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불을 보듯 분명히 드러난다.

 

마치면서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예수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의 위선과 악행을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니더라도 교회에 별로 관심이 없다면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의 저주를 받을 만한 짓을 해도 화내지 않고, 빈정거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가 내 교회일 때, 그 교회가 올바로 서기를 원할 때, 그 교회를 사랑할 때 우리는 장로들을 만나서 걱정하고, 영 안 되면 목사를 찾아갈 수도 있다. 목사가 계속 실망스러운 일을 할 때는 화가 치밀게 된다.

예수와 바울이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가급적 비판을 삼가야 한다. 그러나 예수가 비판하고 저주하기도 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행태와 목사들의 행태가 같다면, 비판을 주저하거나 비판을 삼가라는 주변의 말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더구나 목사를 비판하면 벌을 받는다는 엄포는 무시해도 좋다. 교회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 진력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벌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을 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가 상대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와 예수의 가르침에 맞는지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휩쓸리고 편견에 따라 분별없이 행동하는 수가 많다. 우리는 흔히 남을 흠뜯는 일에 열을 올린다. 우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그 의를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내 비판이 예수가 보여준 그 비판과 일치한다면, 그리고 진정 예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예수처럼 과감하게 비판해야 한다. 우리는 예언자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예언자들의 눈으로 교회를 보고 그들의 자세로 교회를 위해서 말해야 한다. 예수도 넓은 의미에서 예언자였다. 우리는 항상 예수라면 이런 경우에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하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표준은 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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