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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에서 말하는 『야고보서』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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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9월 30일 (월) 15:59:12
최종편집 : 2019년 09월 30일 (월) 18:27:46 [조회수 :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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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에서 말하는 『야고보서』의 신학

(TBC 성서연구원 원장 / 평촌교회 담임 홍성국 목사)

 


1. 야고보서에 나타난 중심 사상

 

『야고보서』의 핵심 주제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말씀의 실천, 행위로 증거되는 믿음이 그것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야고보서』는 『로마서』와 대조를 이룬다. 『로마서』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의(義)를 강조했다면,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혹평하면서 실천적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같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도 『로마서』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대표적 인물(롬4:1~25)로, 반면에 『야고보서』는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인물(약2:21~23)로 묘사하는 것에서도 두 서신이 가지는 대조적인 입장을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상반된 입장은 서신을 쓴 저자, 그의 시대적 환경, 서신을 받아 읽을 대상 등의 주위 상황과 연결시켜 해석할 문제이다. 즉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쓴 『로마서』와 ‘주의 종’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쓴 『야고보서』를 같은 맥락의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복음은 전하는 자와 받는 자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핵심은 변할 수 없으나 그 형식이나 포장은 상황에 따라 다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에서 강조된 ‘믿음’과 『야고보서』에서 강조된 ‘실천’이 상호 모순적이거나 갈등 관계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아서 어느 한쪽 면만으로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과 같다. 믿음과 실천은 때로는 갈등관계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믿음이 행함(실천)의 근거가 된다면 행함은 믿음의 증거라 할 수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면, 믿음이 없는 행함은 위선 행위일 뿐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실천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상호 견제하고, 격려하며, 충동해야 한다.

 
2. 믿음으로 만인가? 행함으로 만인가?

 

‘믿음이냐? 아니면 행함이냐?’라는 신앙논리의 이분법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였으며, 특히 그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른데서 시작되었다.

1522년 루터는 신약성서 전체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바울의 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사상에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신약의 여러 경전들을 차별화하는 등급을 매기기 시작하였다. 1등급에서는 요한복음을 최고의 자리에 놓고, 바울서신을 그 다음에, 그리고 베드로전서를 세 번째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네 번째에 놓았다.

그러나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또 다른 그룹으로 묶어 그것들은 예속적인 위치에 놓았다. 그리고 ‘신약서문’에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불렀다. 이같은 야고보서에 대한 루터의 비하는 ‘믿음이냐, 행함이냐?’라는 논쟁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루터는 무엇 때문에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른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루터 자신이 로마서에 나타난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바울의 칭의 사상을 계기로 하나님 앞에 회심하는 신앙적 경험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사상이 루터에게 있어서 최우선적 과제였기에 ‘행함’은 자칫 구원을 사고자 했던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예: 성지숭배)의 악몽을 연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믿음이외의 그 어떤 행위도 ‘악마적’일 수 있다고 그는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루터에게 있어서 ‘행함’이란 전혀 무의미했던가? 루터는 행함이 성령의 열매인 한, ‘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행함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그 근거가 되는 한, 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행위’가 사람을 선하거나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근거로 ‘믿음’은 항시 사랑의 행함 안에서 산 믿음이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갈5:13) ‘faith active in love’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랑’이 믿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사랑 안에서 살아있는 믿음으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지푸라기 서신론’은 루터 이후 끊임없이 바울 사상과 야고보 사상을 ‘믿음이냐? 행함이냐?’라는 양극적인 대립관계로 몰고 가는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바로 이 문제를 두고 우리는 두 성서학자의 해석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처음 신약학자는 조지 래드(George Ladd)이다. 그는 그의 저서 『신약신학』에서 바울이 행함을 비판한 것은 행함이 믿음에서 나오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자신의 의’와 ‘선’을 공적으로 자랑삼는, 더욱이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위선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행함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행함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위에 관한 여러 교훈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약1:27),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2:24),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등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최고의 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래드는 바울 사상과 야고보서 사상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의 양면일 뿐이라고 하면서, 래드는 간접적으로 루터의 '지푸라기 서신론'을 비판한다.

‘믿음이냐, 행함이냐?’의 이분법적 구분에 대한 해답을 시도한 또 다른 신약학자는 베르너 쿰멜(Werner G. Kummel)이었다. 그는 그의 저서 『신약서설』(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에서 특별히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2:24)를 들어 이 행위는 율법주의적-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과 회개에 근거를 둔 행위이며, 그것은 성화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룸멜은 래드와 함께 야고보서의 행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구원으로부터 오는 것이었음을 강조하면서 루터의 해석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원칙적으로 ‘쿰멜’이나 ‘래드’가 내놓은 해석에 동의하면서도, 그들이 야고보서의 윤리사상(행함)을 뒷받침하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 차원 하나를 외면하고 있는 약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야고보서의 행함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사랑으로부터 오는 윤리사상이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행함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강림(재림)을 소망하는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7~8)

그러기에 바울은 믿음을,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한다는 피상적 구분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사랑 그리고 다시 강림하시는 종말론적 소망 안에서 믿음은 사랑의 행함으로 이어지고(바울) 사랑의 행함은 믿음으로부터 오는(야고보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불행하게도 믿음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와 행함을 강조하는 진보주의로 양극화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서로가 양보하면 공통분모가 나올 것인가?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착상이다.

오히려 믿음과 행함(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의 강림의 약속을 소망하는 순례적인 삶 속에서 비로소 믿음은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고, 행함은 믿음에서 나오게 되는 새로운 관계와 연결이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믿음을 강조하는 신앙노선이나 행동을 강조하는 신앙노선이 만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과 오고 있는 주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순례적 신앙과 삶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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