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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 단편들 (3)
박효원  |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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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8월 24일 (토) 21:18:13 [조회수 : 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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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민족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어떤 민족 문제라도 공산당 이익보다 우선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영도하는 공산당이 명령하면 그것을 따라야 한다.” 따라서 민족의 분리 독립이나 자치 따위는 사라져야 할 것이었다.

1930년대는 국유화와 집단화로 민심이 좋지 않았다. 1920년대 터졌던 반발과 저항이 더 크게 일어날 수 있었다. 스탈린은 무자비했다. 국유화와 집단화를 반대할 잠재적 지식인과 지도자를 색출해 인민의 적으로 숙청했다.

숙청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소수 민족의 강제이주였다. 장기판에서 장기알을 부리듯 소수 민족들을 이주시켰다. 국경지역 소수 민족들은 거의 다 강제이주를 겪었다. 한인들이 이주를 한 다음에도 소련 내 독일인, 폴란드인, 그리스인, 이란인, 타타르인(Tatars), 체첸인(Chechens), 칼미크인(Kalmyks) 등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중앙아시아는 소수 민족들의 수용소였다.

스탈린은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새 경제체제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가오는 전쟁을 준비하자니 문제가 많았다. 많은 장교들을 숙청했으므로 지휘관이 부족했다. 서쪽 국경에 몰려 있는 군수 공장들을 시베리아로 옮겨야 하는 데도 시간이 부족했다. 연해주는 모스크바에서 제일 먼 곳이어서 통제하기 힘든 지역이었다. 1932년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 일본군과 소련군은 국경에서 계속 충돌했다.

스탈린은 시간을 벌려고 했다. 시간 벌기는 나치와 맺은 조약 그리고 일본과 맺은 조약에서 드러난다.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갑자기 나치 정권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1941년 4월에는 소련이 일본의 하와이 공격에 중립을 지키겠다는 ‘중립조약’을 맺었다. 스탈린이 내부로는 철권을 휘두르고 외부로는 전쟁준비를 위한 시간 벌기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8월말 이주 명령이 떨어지고 열차에 오르기까지 사흘에서 일주일 시간 밖에 없었다. 이주는 9월 1일부터 시작됐다. 곧 벼를 수확할 계절이었다. 러시아 당국은 이주에 앞서 보상과 새 생활 지원을 말했지만 그건 형식이었다. 명령 집행은 지역마다 달랐다. 본래 강제이주 대상은 국경지역 한인들이었다. 내무인민위원회(비밀경찰)가 점차 지역을 확대하더니, 북사할린과 캄차카 등 오지에 사는 한인도 이주 계획에 포함시켰다.

내무인민위원회는 미리 작성한 명단대로 사람들을 소리 없이 끌고 갔다. 끌려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려가지 않은 한인 지도자들과 공산당원들은 모임을 가졌지만 모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처형됐다. 지도자들이 사라지고 갈 곳을 전혀 모르는 상황은 공포였다. 소리 없이 불려가 사라지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공산당에 가입한 이들과, 적군을 도와 백군과 싸우고 일본군과 싸웠던 이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혼란은 상당했다. 그들 중에 홍범도(1868-1943)도 있었다.

한인들은 열차를 타더라도 중앙아시아까지 가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한인 일부가 연해주 북쪽 지역으로 이주한 예가 있었고, 당국에서 며칠 식량과 필요한 물건만 챙기라고 했으므로, 멀리 가도 북쪽 아무르 강변이나 하바롭스크 정도로 생각했다.

열차는 50량으로, 한 량은 여객칸으로 호송책임자인 내무인민위원회 경비원들이 탔다. 의료칸 한 량, 식당칸 한 량도 연결됐다. 한인들이 탄 열차는 화물이나 가축 운반용 열차였다. 내부를 개조해 이층으로 설치한 나무침대, 짚 그리고 한 가운데 놓인 난로가 고작이었다. 제대로 된 유리창도 없는데다 성긴 널빤지 틈으로 시베리아의 찬 바람이 들어왔다. 한 량에 대여섯 가구 서른 명 정도가 탔다. 가족이 떨어진 채 실리는 판에 친척과 함께 갈 수도 없었다.

위생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열차가 서면 수북이 쌓인 이를 털어내야 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오랜 이동은 고통이었다. 아동 과반이 병으로 사망했다. 노인들도 몸져누웠다. 시신을 담요나 짚으로 말아서 기차가 섰을 때 대충 파묻었다. 아픈 사람들은 경비원이 데려갔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큰 역에 도착하면 내무인민위원회가 지도자에 해당하는 자들을 색출했다. 참다 못해 항의한 한인도 있었다. 그들은 다시 열차를 타지 못했다.

가장 심한 문제는 용변이었다. 몇이 가려주고 본 용변은 재와 섞어 쌓았다. 열차는 석탄과 물을 보충하기 위해 역에 정차했고, 용변을 위해서는 벌판에 정차했다. 그러면 모두 내려서 참았던 용변을 보았다. 열차가 전복되는 사고도 일어나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렇게 6천 킬로미터를 한 달 이상 달렸다.

한인들이 연해주에 두고 떠난 것은 집, 농지, 가축뿐이 아니었다. 한인학교, 언론사, 문화예술 단체를 모두 버려둔 채 열차에 올랐다. 그러나 급하게 열차에 오르면서도 곡식 종자만은 반드시 챙겼다. 열차 안에서 배고픈 아이들이 울어대도 종자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인들의 이주 전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이주는 어찌된 것인가? 1928년부터 시작되어 1934년 만들어진 유대인 자치주는 마치 스탈린의 선물처럼 보인다.

소련 내 유대인들은 소련이라는 나라의 국민이었다. 그렇지만 소련 내 한인들은 공민증을 가졌다 하더라도 국민이라고 하기에 애매했다. 19세기 말에 획득한 영토에 러시아인 이주자들은 적지만 한인 이주자들은 많다. 그들은 집단으로 모여 산다. 한인들은 볼셰비키 운동가들과 함께 호흡하며 투쟁했어도, 모습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확연히 다르다. 한인들은 모든 점에서 이질적이다.

유대인들을 유라시아 동쪽 한 지역에 모여 살게 하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유대인들은 러시아 사회에 융화된 민족이었으므로, 그들이 비로비잔(Birobidzhan) 지역에 정착하면 동쪽 국경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자치와 땅에 대한 기대를 품고 이주했지만 통제 당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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