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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의 유희
지성수  |  sydneytax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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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8월 08일 (목) 00:15:32
최종편집 : 2019년 09월 23일 (월) 02:03:32 [조회수 : 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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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 더위에 일본이 더 덥게 만들고 있다. 이 마당에 어떤 이들은 “냉정하게 대처하자.”고 하고 “이웃 나라와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고 한다.

모두 좋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한 번 엄밀하게 생각해 보자.

시드니처럼 다민족이 사는 곳에서는 특히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 이웃을 잘못 만나면 평생 고생을 하거나 심지어는 집을 팔고 이사를 갈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이웃 때문에 고통을 겪어왔다.

세상에는 ‘운’이라고 하고 기독교인들은 ‘은혜’라고 하는 것이 있다. 운이 없을 때도있으니 그럴 때는 은혜스럽지 못한 때일 것이다. 그러므로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운이나쁘게도 이웃을 잘못 만났으니 기독교적으로 생각해도 일본은 한국에게는 은혜스럽지 못한 나라이다.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 어원은 시누이가 말리는 척 하면서 손을 잡는 동안 시어머니가 흠씬 때리도록 만드는 상황에서온 것이다. 지금 ‘냉정하게 대처하자.’는 주장하는 이들의 마음은 시누이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고 말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남과 북은 형식상이라도 전쟁 상태이기 때문에 논리상으로도 평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과는 다르다. 전쟁 상태가 아니고 ‘한국을 없애기를 바라는’ 일본과 심리적인 갈등 상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공격해 오는 일본 앞에서 생존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므로 본질은 우리를 없애고 싶어 하는 나라 앞에서 우리는  ‘생존’을 추구할 뿐인 것이다.

예를 들면 칼 들고 목숨을 위협하는 상대 앞에서 ‘평화롭게 지내자’고 하면 말이 되는가? 우선 살고 봐야지. 그래서 길 바닥에 있는 짱돌이라도 찾아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실제적으로 무엇이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인가를 궁리해야 하는 것이 현실적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전쟁의 시대도 평화의 시대도 아닌 일단 나를 죽이려는 상대의 공격을 피해 살고 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모든 생물은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최대한 머리를 굴리게 되어 있다.

지난 주일에 메노나이트파의 성경공부에 참여 했었다. 내가 평생에 참여했던 어떤 성경공부보다 진지해서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자세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마치 컴퓨터 시대에 원시인들이 돌도끼로 나무를자르듯이 원초적인 방법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메노나이트답게 일체의 신학이 배제된 성경과 나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시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의 기초적인 원칙에 비타협적으로 충실하고자 하는 이들이다. 방문객으로 참석했기에 말 없이앉아 있었더니 한 마디 하라고 해서 ‘성경공부가 자칫하면 관념의 유희에 빠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했다.

지금 우리가 공격이 아닌 방어에 여념이 없는 상황인데 '냉정하게 대처하자',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정치적인 목적이 없다면 관념적 유희에 빠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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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21.154.74.229)
2019-08-08 08:24:50
성경공부 자체가 이미 관념의 유희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이 없는 성경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활동이며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을 통한 인식이며 이해를 통해 이뤄지는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라는 것 자체가 이미 관념의 유희적인 요소를 갖고 출발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성령의 감동없이 성경공부(관념)의 유희를 즐기며 그것을 좋아 하기도 합니다.

신학을 완전히 배제한다 하였는데 그러한 성경공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신학은 성경을 기초로한 관념적 활동의 산물입니다.
여타의 신학을 배제하였다는 것은 또 다른 신학을 기초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신학없는 신학의 활동을 통한 성경공부인 것이지요.

신학없는 신학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느냐?
말 그대로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할 수 없는 일들이 가능하다고 말을 합니다.
즉 여타의 신학을 배제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매우 신선해 보이는 접근이나 매구 진부한 결론을 맺을 것입니다.
즉 헛되고 헛된 성경공부(지식 쌓기)을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을 통한 성경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한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 모두는 관념적인 유희를 기본으로 합니다.

재미가 없으면 모든 일들은 할수 없습니다.

불가에 묵언수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힘든 것 같지만 묵언을 통한 유희를 느낀다면 묵언은 수행이 아니라 유희가 되고 유희가 된다면 수행을 재밌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고행이란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고행은 힘듭니다. 그러나 고행을 통한 유희를 느낀다면 고행은 힘든일이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유희에 빠진 이들이 재밌게 하면서도 고행의 고통을 자랑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고행을 통한 유희놀이와 더불어 고행의 자랑만이 남습니다. 결국 부질없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에 불과합니다.

유희라는 것을 구원과 연관을 시킨다면 유희(놀이) 자체가 구원이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른이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워 하는 일들을 증겨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구원을 단순한 유희는 아닙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는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말과 기쁜이란 말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남들은 힘들어하고 너무도 진지해 지루할 것만 같은 성경공부를 즐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대론 생소하여 신선해 보이지만 그러나 과거의 성경공부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경공부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오직 성령의 감동입니다.
신학을 전혀 새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또한 성령의 감동에 의한 신학활동입니다.

대부분의 신학의 출발점엔 반드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거나 남들이 듣지 못한 것을 듣거나 더 나아가 남들이 깨닫지 못한 바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신학이라는 것 또한 그 출발점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신학이 또 다른 자유신학을 낳는 과정에서 신학의 유희를 즐기는 이들이 성령의 감동과 무관한 활동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타락하고 그래서 변질되고 그래서 최초의 그 신선함이 오히려 진부하고 지루한 헛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감동과 같은 일로 시작하지만 그 나중은 인간의 관념의 유희만이 남게 됩니다. 관념의 유희란 탁상공론과도 같습니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으며 전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일들이지만 그것을 즐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 시키려 합니다.

다시 돌아가 성경공부는 이미 관념의 유희적인 활동입니다.
더불어 성경공부가 유지되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관념의 유희를 즐기는 이들이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컴퓨터 시대에 원시인들이 돌도끼로 나무를자르듯이 원초적인 방법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라고 하심과 같이 극히 현대화되고 문명화(?) 된 현실의 삶속에 '정글의 법칙'과 같은 프로그램을 즐기는 이들이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지성수님도 어쩌면 정글의 법칙과 같은 프로그램에 매우 많른 흥미와 재미를 느끼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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