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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가짜(fake) 및 ’엉터리(junk)‘ 역사’ (2)
김택규  |  petertk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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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8월 01일 (목) 12:21:11
최종편집 : 2019년 08월 05일 (월) 02:27:19 [조회수 :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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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가짜(fake) 및 ’엉터리(junk)‘ 역사’ (2)

 

 김택규(전 감신대 객원교수, UMC목사)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 9일, 청 나라(중국)의 체푸(Chefoo)항에서, 출항, 조선으로 들어가, 대동강에서 조선군의 공격에 의해, 9월 5일에 격침되고, 승조원 전원은 살해 당했다.

 

‘진실’을 알 수 있는 것은 다 사라져버렸다.

 

미국측의 몇 번에 걸친 탐문 조사 시도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와 그 승조원들에 대한 마지막 25일간의 자세한 행적은(미국측에서 볼 때)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셈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하고도 확실한 진상, 특히 셔먼호와 승조원들에게, ‘무엇이 어떻게, 왜’ 혹은 ‘무슨 일들이 벌어졌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사실(fact)’이다.

다만 조선측의 정부 문서인 ‘고종실록’이 남아 있을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측 당사자인 ‘평양감영’이 조정에 올린 ‘일방적 보고’를 주로 해서 기록한 문서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듯이, 그 사건의 역사적 정확성이나 객관성, 공정성을 그 문헌에서 기대할수는 없다. 실제적 사건의 내용과 진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할수 있는 ‘증거’는 불에 탄 셔먼호의 잔해 외에는 남아있는것이 아무것도 없기때문이다.

만일 그 배에 타고 있었던 토마스 선교사가 살해당하지 않았었다면, 그는 성직자, 비전투원이므로, 비교적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사건의 내용을 진술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셔먼호의 승조원 생존자는 아무도 없으므로 셔먼호측의 얘기를 우리는 접할 수가 없다, 언제나 사건에 대한 진실은 양측의 상황 설명이나 주장들을 다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은 조선측의 일방적 진술만 남아있을뿐이다,

사건이 발생한지 몇10년이 지난후, 의미있는 기록 문서들이 나왔다. ‘패강록’(貝江錄)’ 은 사건 당시 셔먼호측에 억류되었던 ‘중군’이현익의 아들이 붓으로 쓴 기록이라고 하는데, 언제 나왔는지가 분명치 않다. 같은 시기에 나온 ‘평양지’가 있는데 출처가 분명치 않다. ‘패강록’이 셔먼호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현익 아들이 쓴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아버지의 얘기들을 전해듣고 기록했을테니, 사적(史的)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60년의 세월이 지난후, 셔먼호 사건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책이 나왔다. 당시 교육자요 언론인인 오문환의 ‘평양 양란’(1925년)과 ‘토마스 목사전’이다.(1928년)

오문환은 사건이 발생했던 평양 사람이다. 그는 그 사건을 전체적으로 폭 넓게 그리고 깊게 조사 연구하였으며 특히 그당시 평양 인근에 생존해 있던 ‘셔먼’호 사건에 직접 참가했거나 연루되엇던 생존자들을 일일히 만나 그들의 생생한 증언들을 수집, 종합하는 등 오랫동안 자료들을 수집 종합하여 그책을 냈다. 또 그는 일찍이 선교사에게서 영어를 공부했음므로, 미국쪽 자료들도 조사 연구했다. 따라서 오문환의 기록은 셔먼호 사건 및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연구에서 그 권위를 인정할수 있는 대표적 저술이라고 할수 있다. 물론 일부 내용 혹은 ‘일자’ 등에서 오류가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역사 특히 ‘기독교선교’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련된 자료, 기록, 문헌들을 조사, 검토, 연구를 하여 논문, 책, 혹은 소설 작품 등으로 많이 발표를 하였다.

미국측의 오래된 초기의 문헌은, 우선 James S. Gale의 1895년에 나온 “제너럴셔먼호의 운명, 목격자의 증언(The Fate of General Sherman, From an Eyewitness)" 을 들수 있는데, 사료적 가치가 높다 할수 있다. 또 F. E. Hamilton의 ”한국에서의 첫 번째 순교자(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라는 1927년에 ‘The Korean Mission Field'에 기고된 논문도 귀중한 사료다. E.M. Cable의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1866-1871"이라는 1938년에 발표된 논문은 비교적 객관성을 가진 문헌으로 셔먼호 사건 연구에 가치있는 자료다.

이 외에도 참고할수 있는 자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미국측의 ’셔먼호사건‘에 대한 글을 쓴 이들에게는 미국측의 ’제1차적‘ 자료가 없다는 문제에 부디칠 수밖에 없는것이다. 결국 그들은 조선정부 기록인 ’고종실록‘등 조선측 자료들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그런데 '고종실록'은 당시 조선정부의 공식 기록이므로 그 권위를 인정해야하지만,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그것은 ‘평양감영측이 ’무단 침범해온 이양선, 침략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일방적인 보고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평양측은 그들의 전투 및 승리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침략자들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무단 상륙하여 인명 살상, 탈취 등 악독한 행동을 자행했다는 등 과장 내지 허위 보고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 실제로 오문환의 책과 고종실록의 기록에는 많은 부분에서 그서술이 다르다. 고종실록은 역사적 '사실' 기록에 오류들이 많다. 셔먼호의 페이지 선장의 국적을 덴마크라고 기술하고, 승조원에 대한 인적 사항이나 숫자 등에서도 전부 오류 투성이다. 그러므로 고종실록의 기록을 참고하더라도 그 정확성, 객관성, 공정성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연구해 보아야 한다.

현대에 와서는 여러 학자들 및 셔먼호 와 토마스 선교사에 관하여 연구한 이들에 의하여 많은 책이나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이능화, 유홍련, 김양선, 오윤제(재일학자), 고무송, 민경배, 박응규 등을 들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한국의 역사계가 ‘좌향좌(左向左)로 방향을 틀면서, 셔먼호에 대한 역사 기록들이 편향적 및 ‘반미적’ 서술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는 북한쪽은 어떤가? 한마디로, 북한측은 셔먼호 사건에 대한 역사 기록들을 완전히 날조, 변조시켜, 허위적인 ‘가짜 역사(Fake history)책들을 만들어 냈다.

   
 

 

북한의 셔먼호 사건에 관한 ‘가짜(fake)' 역사

 

북한의 교과서나 역사책들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사실들을 변조시켜 ‘가짜역사’로 만들어 낸 부분들을 일일이 여기서 논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다만 대표적인것 몇가지만 들어보겠다.

(1)셔먼호가 조선에 들어온 것에 대해, ‘조선에 대한 야욕을 들어낸 미제 침략의 시작’이라고 허위적 서술을 하고 있다.

셔먼호는 미국 해군 함정도 아니고, 정부가 보낸것도 아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 상선이다. 쉽게 말하면 ‘장사’차 들어온 배인데, 그것이 어떻게 ‘미제 침략의 시작’인가? 분명히 말할수 있는 것은 그때 미국정부는 한국에 대한 영토야욕이나 지배권 추구를 하지 않았다.

북한은 ‘인민들의 반미, 항쟁 출발점’이 바로 셔먼호 사건이라며 반미 선전, 선동 교육용으로 쓰고 있다

 (2) 셔먼호를 ‘해적선’이라며, 살상, 약탈, 난동, 강도짓을 하고 다녔다고 서술하고 있다. 언급할 가치도 없는 완전 날조된 ‘가짜’ 역사 기록이다. 그런데 문제는 남한의 셔먼호 사건 서술에서도 이와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엉터리 역사 기록임에 틀림없다. 셔먼호의 선주는 사업가이며, 간부들은 교육받은 미국인, 영국인들이다. 절대로 그런 악행을 하지 않았다.

(3) 가장 중요한 거짓, 날조는, ‘김응우(김일성의 증조부)를, 침략자 셔먼호를 물리친 영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고등중학교 교과서인 ’조선 력사(2)‘의 근대사 서술, 제 22과, “대동강에 처박힌 셔먼호“에서, 중요한 내용은 ”미제국주의의 대동강침입‘과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의 총 지휘하에 이를 격퇴했다‘는 것이라고 한 북한 관계 전문학자가 밝히고 있다.

북한은 매년 ‘셔만호 격침일’(북한측은 9월2일)이 되면 신문, TV에 특집프로로 ‘미제 침략 해적선 침입’, ‘김응우 선생의 지휘하에 불태워버림’ 등을 극적으로 내보며 김응우를 반미 항전의 상징으로 띠우곤 한다. 120주년이 되는 1986년 9월2일에는 대동강변에 대형 승전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열렬한 애국자이신 김응우선생을 비롯한 평양시민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던 미제 침략선 셔먼호를 천팔백육십육년 구얼 이일 대동강 한사정 여울에서 격침하였다”

그 부근에는 또 북한이 동해의 공해상에서 납치했던 미국 군함 푸에블로 호를 전시하고 있다. 모두 ‘반미 항전’의 상징 및 교육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김일성의 증조부가 셔먼호 공격을 주도했던 ‘리더’라는 이 가짜 주장이 조금이라도 사리에 맞을수 있는 근거라도 있는가?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나 조부 김보현의 출생년도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김의 부친 김형직의 출생년도는 1894년으로 되어있다, 이제 유추해 보자, 부친 김형직이 1894년 생이라면 그의 조부는 대체로 20살 정도에 아들을 낳았다고 가정하면, 1874년 정도다. 그것도 맏아들로 유추해서, 20년 정도 차이를 둔다면 그의 증조부 김응우의 생년은 1854년 쯤 된다. 그렇다면 1866년 셔먼호 사건때 김응우는 겨우 12실정도가 된다. 과연 ‘12살된 아이’가 특공대를 조직했다든가, 인민들을 총지휘해서 화공으로 셔먼호를 격침시켰다는 말이 성립될수 있는가? 중군 이현익을 구출한 영웅도 군관 박춘권이 아니고 김응우가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가짜 서술의 최초 창출은 1968년, 백봉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이러는 책에서 부터였다. 그후 모든 역사책, 백과사전 등에 그렇게 서술하도록 했다.

실제 김응우는 만경대 인근 한 지주의 묘지기 겸 ‘소작농’으로 생계를 꾸리던 가난한 농부였다. 김응우의 나이를 좀 더 올린다고 해도, 평양 감사가 총지휘를 하고, 또 그 지역 군대 수장이 작전을 수행하는데, 일개 시골 농부가 나서서 총 지휘를 했다는 것은 역사 외곡을 넘어 조작, 날조의 가짜 역사다.

 

남한의 셔먼호 사건에 대한 ‘엉터리(junk) 역사’서술 

 

내가 학생 때 읽었던, 또 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셔먼호 사건의 스토리 서술은 지금 것들과는 달랐다. 그때의 책에는 셔먼호가 조선과 그저 ‘교역차’ 왔다고 했다. 무슨 해적선이라던가 총포를 마구쏘며 살육, 약탈을 자행해서 평안도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한국의 역사학계가 좌편향되면서 셔먼호에 대한 서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떤 역사책이나 글들은 글쓴이가 북한의 책들을 참고한것이 틀림없는 것같은 그런 정황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한국의 역사책이나 글들에서 외곡된 ‘엉터리’ 서술을 하고 있는 부분들은 어떤것인가?

(1) 대부분 한국의 역사책이나 글들에서, 제너럴 셔먼호가 온 것을 ‘한반도에 대한 외세 침탈의 시작‘ 혹은 ’한반도에 야욕을 가진 외세의 각축전 시작‘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엉터리’주장이다. 북한측 역사 서술과 비슷한 주장이다. 셔먼호는 미국이나 영국 ‘국가’ 함정이 아니다. 1개 상선 일뿐이다. 그저 장사를 해보겠다고 조선에 온 것이다. 그때 한반도에 대한 어떤 지배 야욕을 가졌던 나라는 일본, 중국, 러시아였다. 미국이나 영국은 한반도에 대한 야욕이나 지배권 흥미같은 것은 없었다,

 

(2) 셔먼호의 ‘무장’에 대한 설명이 잘못되어 있다, 모든 글들이 ‘제너럴셔먼호가 ’중무장‘을 하고 왔다’. ‘선원들도 ‘완전무장’ 혹은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함선과 승무원의 장비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소리다. 셔먼호는 182톤으로, 작은 배가 아니다. 태평양을 건너와 ‘미지의 세계 극동 아시아에서 교역을 하려는 상선이다. 당시 외국을 다니는 함선들은 해적 등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배에 대포를 장착는 것은 상례였다. 12파운드의 대포 2문 정도를 중무장이라고 볼수 없다, 또 선원들도 ‘완전무장’ 상태라는 서술이 있는데 그것도 잘못된 소리다. 최초의 조선관리의 ‘문정’(조사) 보고에 의하면, ‘선원들이 모두 작은 총(권총)과 환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고 했다. 이 정도는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 또 해외에 나가는 선원들에게는 간단한 기본 무장이다. 토마스도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것을 비난하는 글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문제될것이 없다. 서구인들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언더우드나 헐버트(H.B. Herbert)등 선교사들도 조선에 와서, 어떤 경우 권총을 휴대했었다는 것을 모르는가?

 

(3) 토마스 목사가 ‘항해사’, ‘통역사’였다고 모두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엉터리(junk)’서술이다. 다음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토마스 목사는 ‘항해사’도 아니었고, 공식 ‘통역관’도 아니었다. 그 배에는 윌슨이라는 정식 항해사가 탑승해 있었다. Donald G.

Southerton에 의면, 통역은 중국인 Cho Lin Feng‘이라는 중국인이 주로 했다. 이 사람은 토마스와함께 결박되고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조능봉‘ 인 것 같다. 그런데 고종실록에는 ’이팔행’이라는 중국인이 통역을 주로 했다고 되어 있다. 이 세 이름의 주인공은 아마 동일 인물일수도 있다. 용역 계약을 했던 메도우 회사가 북경주재 미국공사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토마스는 ‘승객’(passenger)이었다. 다만 그가 중국말을 잘했고, 또 조선말도 약간 할수 있었으므로 조선측과의 소통을 할 때 그 자리에 참여했던 것이다.

 

(4) 한국의 많은 책이나 논문들이 셔먼호 사건에서, 가장 치명적인 ‘엉터리’ 역사 서술을 하는것중 하나는, 토마스 목사의 셔먼호에서의 ‘위치’ 혹은 ‘신분’에 관한 것이다. 그가 마치 셔먼호의 ‘리더’처럼 행동했다고 서술하고 있는것이다. 한규무(광주대 교수)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논문에서, “그는 단순한 통역이 아니다. 그때 그때 상황을 판단해 셔먼호의 진퇴를 결정하는 책임적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라며, 셔먼호가 조선측의 제지를 물리치고 무리하게 평양까지 간것도 토마스의 책임인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토마스가 마치 그 배의 모든 것에 대해 결정권을 가진 ‘리더’의 위치에 있었다는것이다. 사람들이 가장많이 찾아보는 온라인 ‘백과사전’에는, 전투 지휘관 분류에서, 평양측은 평양감사,박규수 퇴교 박춘권 등으로, 셔먼호측은 토마스, 페이지선장 등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완전 ‘가짜(fake)'서술이다. 당시의(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엄격한 함선 승조원의 계급과 ‘위계질서’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오류다.

‘함선’에서의 ‘결정권자’는 철저하게 ‘선장’(captain)이다. 육지를 떠나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왕국이나 다름없다. 그 배에서 선장의 위치는 ‘왕’과 같다. ‘결정권자’는 선장이며, 모든 승무원은 선장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선장(captain), 간부(officer), 선원(sailor)간의 위계질서는 철저하다. 규칙과 질서는 엄격하다. 만일 질서와 규칙이 엄하게 지켜지지 않으면 배안에서 ‘mutiny’(배안에서 일어나는 항명, 반란)나 어떤 나쁜 일들이 생길수 있기 때문이다. 선장은 범법자나 질서 파괴자를 영창에 구류도 한다.

나는 과거 해군과 해병대 장교로 근무했었다. 함정에는 ‘함장석’이 따로 있다. 그런데 그 함장의 자리에는 함장 외에는 아무도 앉을수 없다. 대통령이 와도 그 자리에는 앉지 못한다. 그렇게 ‘captain(선장)의 권위는 대단하다.

그런데 셔먼호에 관한 많은 글들에는 토마스가 마치 ’선장‘같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전혀 말이 안되는 소리다. 그 배에는 페이지라는 노련한 선장이 있었다. 그때 토마스의 셔먼호에서의 위치는 ’승객‘인데, 어떻게 한 27세의 젊은 승객이 배안에서의 모든 일에 ’결정권자‘가 될수 있는가? 아마 그것은 함선의 질서나 규칙에 대해 전혀 무식했던 당시의 조선관리가 문정(조사)할 때, 잘못보고, 또 서양 사람들의 풍습을 몰라서, 잘못된 보고를 한 것일 것이다. 그 당시 서구사회에서 ’목사‘의 사회적 신분은 ’고귀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호칭도 반드시 Reverend(목사님)라고 불렀다. ’문정‘하는 조선관리가 셔먼호에서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이 토마스 목사에게 경의를 표하듯이 대하는 것을 보고, 아마도 토마스가 그 배에서 권력이 센 높은 사람인 것으로 잘못 판단해서 그런 보고를 했고, 고종실록이 또 그대로 옮겨 적어서 그런 잘못된 서술이 계속되는 것 같다.

 

(5)한국의 현재 대부분의 책들, 글들에는, ‘셔먼호의 승조원들이 ‘총을 마구 쏘며 살육, 약탈 등 난폭한 행동을 자행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해적질도 했다는 글도 있다. ‘한민족문화 대백과사전’(한국학 중앙연구원)에 수록된 ‘제너럴 셔먼호 사건’ 란에 보면, ‘토머스가 프랑스함대가 처들어올것이라고 위협하며, 통상을 강요했다’, ‘난폭한 행위를 자행, 평양군민과 충돌이 벌어졌다“는 등의 서술이 있다. 전봉관은 그의 글에서, ’해적선으로 돌변한 셔먼호‘라는 소제목 하에 ‘셔먼호는 근처를 지나가던 조선상선을 공격해 쌀과 찬거리를 약탈하는 한편, 배 주위로 몰려든 평양주민들을 향해 대포와 총을 난사했다’ 라고 적고 있다. 과연 이런 셔먼호에 대한 ‘악의적’인, 일방적인 주장이 사실이며, 또 합리성이 있는 것일까?

우선 그때의 셔먼호가 처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셔먼호는 지금 드넓은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강’이라는 극히 제한된 수로에 있다. 이런 지형에서는, 작전개념상으로 볼 때 셔먼호측이 대단히 불리한 위치이다. 적들은 언제든지 사방에서 포위 공격할수 있는데, 강에 떠 있는 함선 측은 ‘대응’에도 제한이 있고, 더구나 위험시 도망칠 곳이 없다. 더구나 셔먼호의 승조원은 겨우 24명, 소수인원이다. 그 중 19명은 중국인, 말레시아인이다. 실제 전투병은 한명도 없다, 그런데 현지인들을 분노케하고 조선군에게 공격할 빌미를 줄수 있는 그런 살육, 약탈, 해적질같은 어처구니없는 짓을 자행할수 있을까? 더구나 셔먼호는 지금 ‘교역’차 왔다. 상대방에게 그렇게 나쁜짓을 하고도 파차 ‘장사’가 성립될수 있을까? 셔먼호의 선장이나 선주 프레스톤이 정신이상이었거나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는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글 혹은 책에서는 셔먼호가 ‘무력’을 사용하여 강제로 교역을 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주장한다. 아마 미국이 일본에 대해 ‘함포 외교“를 통한 ’강제 개항’을 했던 것을 염두에 둔 소리인 같다. 그것도 ‘상황 판단’ 무지에서 나온, 말도 안되는 소리다. 1854년 페리제독의 함대가 에도항에 들어와 일본 강제 개항을 시킬 때, 그는 완전 무장한 8척으로 구성된 거대 함대와 대병력을 대동했었다, 그러나 셔먼호는 겨우 ‘작은 상선’ 한척에 대포 2문뿐이고 전투병력도 없다. 그런 빈약한 입장에서 어떻게 조선을 강제 개항시킬수 있다고 생각할수 있었겠는가? 그때 조선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해도, 강대국을 두려워하지않고, 서양인들(프랑스 신부들)도 마구 죽이는 나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런 나라에 들어와 셔먼호가 그런 난폭한 짓을 자행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나 논리적으로도 전혀 타당성이 없는 주장이다.

 

(6) 양측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서술도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된’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판단된다

과연 셔먼호측과 평양 측간에 ‘치열한’ 전투가 여러날 진행되었을까? 평양측은 ‘이양선’이 침범해왔다고 판단하여 셔먼호를 향해 공격을 한 것은 사실일것이다. 그러나 당시 평양군측의 군사작전 능력이 어느정도였을까? 우선 그들의 무장이란 대단히 빈약한 것이었다. 대포나 소총이 있기는 했지만, 성능도 원시적인 것이고, ‘사거리’도 짧아 대부분 포탄이 셔먼호까지 도달하지도 못했다. 육지에서가 아니고 목표물이 강에 있기 때문에 배를 타고 가지 않고는 ‘치열한’ 공격을 감행할수도 없다, 그런데 조선군이 배를 타고 가서 공격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면 셔먼호측에서 치열한 공격을 했을까? 셔먼호측은 물론 대포 2문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성능이 뛰어난 미 해군이 사용하던 무기다. 포의 ‘사(射)거리’나 ‘탄착 정확도’도 조선측의 대포와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내가 해병대 간부 훈련때 배운바에 의하면, ‘탄착(彈着) 정확도’는 목표지점까지의 거리측정, 포의 각도, 정적량의 장약(화약), 포탄의 무게, 등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발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산할 시간이 없거나 산출의 능력이 없을때는 몇번의 시험발사를 통해서 조정하게 된다. 셔먼호는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으므로, 훈련된 포 사수가 탑승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것이 있다. 셔먼호측의 포사격으로 강가에 나와 구경하던 민간인 7명정도의 소수 인원만 죽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것인가? 조선군측의 공격에 대항해서 셔먼호가 별로 크게 대응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일 셔먼호의 대포 2문이 맹렬하게 포격을 가했었다면 조선측의 사상자는 훨씬 많았어야 했다. 특히 더 중요하게 짚어보아야 할 것은 조선군측 ‘군인’의 사상자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셔먼호가 조선군측 군인들을 직접 상대해서 싸우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평양측 군인이 작은 배를 타고 셔먼호에 가까이 접근해 온적도 있었다. 하지만 셔먼호측은 그 군인들을 목표로 하는 사격은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지막날, 평양측의 ‘화공 작전’ 전까지는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란 없었다. 만일 육지에서 싸웠다면 육박전도 전개하게 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수도 있다. 조선군 측이 배를 타고 와 강에서 셔먼호를 공격한일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교역을 목적으로 온 셔먼호측이 조선측과 싸울 이유가 없다. 조선측이 공격을 좀 해도 무엇때문에 치열하게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겠는가? 상식선에서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

 

(7) 셔먼호가 황주목, 송산리에서 조선관리의 ‘문정’(조사)을 처음 받은때부터 셔먼호측이 ‘식량‘을 요구했다거나, 혹은 승조원들이 상륙해서 식량을 약탈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외곡되거나 소통에 문제가 있어 ’오해‘에서 나온 ’잘못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셔먼호는 태평양을 횡단해 오기도 한 배다. 그때는 태평양 횡단에 대개 20여일 이상 걸리던 시절이다, 배가 해외로 출항할때는 반드시 식량을 충분히 싣고 간다는건 기본사항이다. 셔먼호가 송산리에 도착했을때는 제푸항을 떠난지 1주일쯤된 때인데, 그때 벌서 식량 문제가 생겨, 조선관리에게 식량을 요구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셔먼호는 쌀 등 농산물도 교역물로 정하고 왔기 때문에, 그 지역이 농촌이니 아마도 돈을 주고 사겠다거나, 쌀 등과과 자기들의 상품을 물물교환을 하자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측이 그것을 잘못 이해했을수도 있다. 더구나 식량을 약탈했다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조작‘이다. 셔먼호 승조원들을 ’해적선‘같이, 나쁘게 설명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외곡되거나 사리에 맞지않는 이상한 서술, 주장들이 많다.

 

(8) 끝으로, 남한의 셔먼호 사건에 대한 글 들에서,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은 문제다. 전봉관은 한 기고문에 , “제너랄셔먼호를 무찌르기 위해 대동강변에 모인 평양 주민들가운데---김응우라는 촌부가 끼어 있었다. 그로부터 82년후, 김응우의 증손자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었다. 이후 북한 역사는 박규수가 아니라, 김응우가 평양군민을 ‘지휘’해 --셔먼호를 격침한 것으로 기록했다”라는 서술을 하고 있다. 이런식으로 아얘 김응우가 셔먼호 공격 침몰 작전에 ‘지휘’를 한것처럼 북한측 주장대로 서술하는 글들도 있지만, 또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그때 셔먼호 격침싸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다“는 식으로 간접 서술한 글들도 많다.

이미 위에서 말했지만, 그때 대동강변에 김응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셔먼호 사건이 종료된후 조선 조정에서, 박규수 평양감사나, 박춘권 등 셔먼호 격퇴에 공을 세운자들에게 진급 등 포상을 한 것이 기록에 남아있다. 그러나 그 포상자 명단에 김응우란 이름은 없다, 그런데도 남한의 좌편향 학자들이 북한의 ‘조작’된 ‘가짜’ 역사 기술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현실은 한심한 일이라 아니할수 없다.

근래에 와서 셔먼호사건에 대한 글, 논문, 책 및 기타 매체에서 더 편향적인 잘못된 서술들이 판을 치고 있다. 특히 북한과 남한의 좌파 진영에서는 셔먼호사건을, 외세 침탈의 시작, ‘침략 세력에 항거한 민중 항쟁의 승리’라며, ‘반미’, ‘민족주의’ 고취의 도구로 오용(abuse)하고 있으니 문제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역사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 더욱 심도깊은 연구가 계속되어져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는 편향적인 시각이 아니라 올바른 입장에 서서, 건전한 판단력과 합리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셔먼호 사건에 대한 역사 연구를 더 넓게, 깊게 진행하는 연구자들이 많이 나와 지금까지의 ‘가짜역사’, ‘엉터리역사’ 서술들을 바로잡게 되기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측의 1차적인 증거나 증언들은 전혀 찾아볼수 없으니, 그 과거시절, 한국과 미국 간의 첫 조우(遭遇)였던 ‘셔먼호 비극’은 그 진실을 밝혀낼수 없는, 이른바 역사의 ‘미스터리’, ‘미제(未濟)사건’ 으로 영원히 남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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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규 (76.229.101.201)
2019-08-02 22:21:29
김경환목사님.
감사합니다.
북한에서는, 처음에는 김일성(김성주)의 부친까지만 생일을 공개했었고, 그의 조부나 증조부에 대해서는 생일을 언급하지 않았었지요. 김일성 자신의 나이를 엉터리로 했기때문이지요.
그러다가 김응우의 셔먼호 사건 주역 조작 이후에, 그에 맞게, 김일성의 조부, 증조부 생년월일 및 그들의 생애도 가짜로 만들어냈지요.
문제는 남한의 소위 학자라는자들이 북한의 조작된 역사 서술에 동조하고 있는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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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08-01 23:22:57
김성주의 증조부 김응우의 생몰연도가 보도된 적이 있는 데 이게 사실인지요?
출처 :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521010011938

1. 김응우(金膺禹, 1845년 4월 8일 ~ 1878년 10월 4일), 사실이라면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김응우는 21세

2. 북한이 애초 김응우를 셔먼호 사건에 처음 등장시킨 것은 1968년부터다. 그전에 책들에서는 북한 당국도 셔먼호 사건의 결정적 공로자는 박춘권이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68년부터 나온 책부터 박춘권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김응우의 이름을 갖다 얹기 시작했다. 

3. 셔먼호를 불로 공격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민간인은 퇴역 장교 박춘권(朴春權)이다. 특히 이 사건에서 박춘권의 역할은 압도적으로 커서 그는 조정으로부터 큰 상을 받았고 셔먼호에 대한 전투가 계속되던 1866년 7월 25일에 벌써 왕명으로 현역에 복귀되고 평안병사의 다음 자리에 임명되기까지 했다. 

북한측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의 지도자설은 적어도 조선조 역사의 기록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더욱이 김응우에 대한 기록은 북한의 역사책에서도 자꾸 바뀌어 이것이 날조된 역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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