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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섬과 나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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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7월 28일 (일) 12:57:13 [조회수 :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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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섬과 나아감
막1:35-39
(2017/07/28, 성령 강림 후 제7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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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일상을 충실하게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서에서 입추를 향해 가는 계절입니다. 많은 비가 내렸고, 습한 날씨로 컨디션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혼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계시는지요? 저는 요즘 역사의 추이에 대한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습니다. 제 의지와는 무관합니다. 사람은 부모를 닮게 마련이지만 그 시대도 닮는 법입니다. 내 생각인 줄 알지만 실은 다른 이들이 우리 속에 심어준 생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취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시대의 특색은 빠른 변화입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전전긍긍합니다. 5G 시대가 열린다고 합니다. 젊은이들도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기 어려운 판이니 나이든 세대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세상이 점점 낯설어지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습니다. 점점 으스스한 기분(unheimlichen)이 확고하게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마치 치킨 게임을 하듯이 강 대 강으로 맞붙고 있는 한일관계는 우리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하라며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모든 가치가 이익으로 환원되는 국제 관계의 냉혹함을 우리는 이제야 실감하고 있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도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힘의 역학을 살피다가 슬그머니 강자의 편을 들곤 합니다. 위험한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긴장과 울분 속에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전쟁터에서도 밥은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합니다. 가끔은 음악도 들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일상을 충실히 살아야 비상한 상황을 견딜 수 있습니다.

교우들 가운데 꽤 많은 이들이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여러 나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교인들이 소셜 미디어에 남기는 흔적을 보면서 나도 노마드가 되어 떠돌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후텁지근한 실내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 창문을 열듯이 여행은 권태로운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채우는 일인 것 같습니다. 낯선 세계와의 만남 덕분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확장되고, 낯선 사람들과 공존하는 법도 배울 수 있다면 들인 비용이 아깝지 않다 하겠습니다.

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travel은 ‘고생, 노동, 산고‘를 뜻하는 travail과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과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두 단어는 순례라는 특정 행위와 연결됩니다. “순례자들은 중세부터 신발을 신지 않거나 신발에 돌덩이를 매달거나 단식을 하거나 특수한 참회용 의상을 입은 채 여행했다“(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김정아 옮김, 반비, 2017년, p.83)고 합니다. 영혼의 정화를 원하는 이들이기에 그들은 편안함을 구하기보다는 자기를 극한까지 몰아붙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순례’라는 이름으로 ‘여행’을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만 순례의 목표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순례자가 목적지에 닿았다는 것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함으로써 무수한 여행과 변화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 종교의 일부가 됐다는 뜻”(리베카 솔닛, 같은 책, p.90ff)이라고 말했습니다.

∙외딴 곳에서 엎드리다
오늘 우리가 삶으로 쓰고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인지요?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를 씁니다.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매해 이맘때가 되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막6:31). 오고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에 주님은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쉼도 매우 중요한 삶의 일부입니다. 노동과 쉼이 음악의 멜로디처럼 조화로울 때 우리 삶은 건강해집니다.

여러 해 전에 여름 휴가 날을 잡았는데 교우가 사업체를 개설하며 예배를 부탁했습니다. 휴가는 물 건너갔고,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몸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데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의 몸 상태가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가까운 친구가 전화를 해서는 무엇 하냐고 물었습니다. 누워 있다고 했더니 자기는 지리산에 내려가는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저는 친구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수 산행에 동행했습니다. 백무동 계곡을 들머리로 하여 천왕봉까지 오르고 한신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였습니다.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짬짬이 소나무 아래 앉아 드렸던 침묵기도 덕분이었습니다. 하루 동안 6번 이상의 기도를 바쳤던 것 같습니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깊은 안식과 평강 그리고 몸의 회복을 가져옵니다.

미쉘 꽈스트는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시간이 모자라거든 잠시 일손을 멈추고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미쉘 꽈스트, <참 삶의 길>, 조철웅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89년, p.95) 예수님은 이른 새벽이면 늘 외딴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습니다. 새벽은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시간입니다. 만물이 고요한 그 시간이야말로 하늘과 접속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외딴 곳을 찾으신 것은 오롯이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분주하다는 핑계로 우리는 그런 시간을 마련하지 못한 채 시간에 등을 떠밀리며 삽니다. 많은 이들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누군가와 접속을 유지하려 합니다. 휴대 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나 홀로 놓치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어 늘 새로운 정보를 확인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정보를 가지고 사유의 집을 짓지는 않습니다. 재빨리 다른 정보를 수집하고 또 흘려보내기에 분주할 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외로움을 더 심화시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외로움을 가리켜 ‘홀로 있음의 괴로움’이라 했습니다. 외로움에 빠진 영혼은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홀로 있는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독’을 뜻하는 영어 단어 ‘solitude’는 ‘홀로 있음’이란 뜻을 내포합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택한 고독은 우리 삶을 성숙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숙성의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외딴 곳을 찾아가신 것도 일상의 번잡을 떠나 삶의 근본을 돌아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에 따라 당신 생각을 조율하는 시간은 하나님의 은총의 바다에 깊이 잠기는 시간이었을 것이고, 진정한 안식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교종으로 일컬어지는 요한23세는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바쳤습니다.

“오! 주님이시여, 저를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하소서. 그것이 주님의 의향이시라면 죽음이라도 만족하고 기쁨으로 받겠나이다. 주님은 제가 바라는 모든 것의 중심이며, 종합이며, 최후의 목적(目的)이나이다. 하오나 최소한 당신의 성스러운 사랑 안에서 죽게 하여 주소서. 세상에서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을 사랑하도록 저에게 당신이 주신 능력을, 또한 하늘에서도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찬양하기 위하여 간직하겠나이다.”(교황 요한23세, <靈魂의 日記>, 박 바오로 옮김, 크리스챤 출판사, 1996년, p.90)

그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기쁨으로 받겠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제가 바라는 모든 것의 중심이며, 종합이며, 최후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과 깊이 대면하기 위해 선택한 고독은 우리 속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가까운 고을로 가자
그러나 고독 속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외딴 곳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 머무시던 주님의 고요를 깨뜨린 것은 시몬과 그의 일행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말합니다.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마가는 사람들이 주님을 찾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밝힐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은 까닭은 그분에게서 빛을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빛은 곧 희망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 고침의 기적을 바라고 주님께 나왔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시대의 우울을 견딜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나왔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막1:38)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의 소명이요 존재 이유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 하나님 나라는 옛 삶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욕심의 법을 따르던 삶, 이기심과 자만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던 삶, 힘을 확보하고 그 힘으로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던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겸허와 절제와 사랑에 근거한 삶을 능동적으로 택할 때 생의 곤고함이 줄어듭니다.

예수님은 육화된 말씀 그 자체셨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굳어진 마음의 지각을 깨뜨려 사람들 속에 감춰진 생명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낫게 만듭니다. 이기심의 감옥에 갇힌 이들을 이끌어내 새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귀신은 사람들 속에 들어와 그의 영혼을 조각내는 세력입니다. 조각난 영혼, 통전성을 잃어버린 영혼은 날카롭습니다. 모든 깨진 것들은 당사자에게도 곁에 있는 이들에게도 위험합니다. 언제든 찌르거나 벨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겨울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모서리가 많아지고 날카로워집니다. 사소한 자극에도 극단적인 반응을 합니다. 악령에 들리지는 않았다 해도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마음을 잃은 채 사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더럽다, 위험하여 하여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귀신을 내쫓으심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게 해주셨습니다. 지치지 않고 그런 사랑을 실천하실 수 있었던 것은 이른 새벽마다 외딴 곳에서 하나님과 대면했던 시간 덕분입니다. 나아감만 있으면 지치게 마련입니다. 물러서기만 하면 무력해집니다.

∙나의 새로운 사막은 연민
홀로 고요함 속에 머무는 것만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외적인 실천에 치중하는 것도 건강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20세기의 위대한 영성가입니다. 그는 스물 일곱 살의 나이에 켄터키 산간에 있는 겟세마니 수도원에 입회한 후 죽을 때까지 거기 머물렀습니다. 깊은 고독을 갈망하는 그에게 수도원장은 수련수사들의 교육을 맡겼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하여 많은 이들이 수도자가 되려고 수도원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는 수련 수사들은 물론이고 수도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들 속에 깃든 어둠과 슬픔 그리고 상처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없는 연민이 그의 가슴에 흘러들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소명을 마음을 다해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일기에 “진정한 은둔 생활은 미래에 거는 희망이 아니라, 현재를 심화하는 것“(토머스 머튼,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 오지영 옮김, 바오로딸, p.397)이라고 적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성심껏 감당하는 것이 진정한 수도 생활이라는 뜻일 겁니다. 사막의 고독을 구하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새로운 사막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민compassion이다“(p.505).

연민은 타자의 고통에 반응하는 마음, 그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폭염 속에 철탑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직장에서 내몰린 사람들, 위험을 외주화하는 사회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사람들의 시린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 마음이야말로 하나님께 속한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은혜 받은 사람인지는 연민의 사람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이런저런 상처를 입다 보면 우리 마음에는 단단한 껍질이 생깁니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은혜의 장으로 부르십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고, 사람들의 힘을 북돋는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밀물과 썰물의 리듬이 바다를 푸르게 유지하는 것처럼, 물러섬과 나아감의 리듬 속에서 우리 삶이 세상을 향한 선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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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21.154.74.229)
2019-07-29 08:13:08
당선무효와 선거무효로 감독회장의 지위가 부존재하게 되었다면
감독회장이 되었었다고 기득권을 내세워 자리에 연연하여 항소함으로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란 주장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 사회인이라 하여도 부끄러운 일이며 그것은 무책임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 한 사람의 이기심 때문에 공동체 전체가 부끄러움을 당해야 하며 공동체 전체가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커다란 피해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그러하다면 깨어있는 목사라면 그러한 기득권자를 향해 한마디라도 해야 합니다. 나단 선지지가가 다윗을 찾아가 꾸짖음과 같이 목사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 스스로 감독회장이요 목사라는 자의식이 있다면 뻔뻔한 얼굴로 자리 보존에만 온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야 함이 당당하고 정당한 것입니다.

물러섬, 이것은 책임있는 자의 최후의 책임감입니다.
나아감, 이것은 책임있는 자의 최선의 책임감입니다.

말만 무성하고 최선의 책임감이 없다면 차라리 무성하지 않음이 더 나을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심과 같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할 수 도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은 불의에 대한 동의이며 지지입니다.
무관심은 불의에 대한 또 다른 불의이며 범과이자 탐욕적인 이기심일 뿐입니다.

청년의 기백으로 불의와 맞서야 합니다.
파당에 서지 않고 하나님의 편에서서 불의를 꾸짖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러한 사명을 위해 이 땅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회중은 기도하고 목사는 불의를 향해 외치는 푸른파도와 같은 그리스도의 열정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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