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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장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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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0월 02일 (월) 00:00:00 [조회수 : 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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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장의 열쇠말(keyword)은 "성령"이다. 예수의 육체는 사라졌다. 이제 그의 위대한 영혼(마하트마)이 육체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육체는 영혼이 잠시 머무는 집이다. 육체를 떠난 영혼은 경계를 갖지 않는다.

예수는 "성령"이라는 형태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다. 육체의 예수는 사라져야만 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무덤으로 찾아갈 필요가 없다. 그는 "성령"의 형태로(또는 형상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다!) 다시 태어났다. 그를 만나려면 눈을 감으면 된다. 그는 "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어디서든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의 승천은 필연이었다.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이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을 믿었다.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며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14절)를 하였다. 이현주목사는 '그 분에게 여쭈어 보는 것이 기도'라고 정의했다.

성령은 기도하는 영혼 위에 임재한다. 성령은 어느 곳에든 있지만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않듯,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성령은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사람, 소망하는 자에게 시나브로 임한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할까? 예수의 지상명령은 '땅끝전도'가 아니라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었다.(1:8) 지식은 머리와 이성을 움직이지만 성령은 가슴과 감성을 움직인다. 머리로는 '예수에 관한 지식'을 많이 담고 있다. 하지만 예수를 닮지 못한다.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예수에 관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싼 나드 향유를 허비한 여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야심한 밤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성령이 임해야 사람이 변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처럼 아니, 예수 흉내를 조금이라도 내며 살기 위해서는 성령이 필요하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가룟유다처럼 살게된다. 유다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배신은 모두가 했다. 그럼에도 유다는 돌아오지 못했다.

성령은 사람을 '사람되게'하는 하늘의 선물이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진정한 예수쟁이가 되었다. 삶이 예수가 되기 시작했다.
예수의 영을 우리 가슴 속으로, 삶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기도라는 문을 만들어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있어야 우리의 삶은 온화하고 온유한 예수로 조각되어 갈 것이다.

나는 소망한다. 성령의 임재하심을...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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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잎 (61.252.115.23)
2006-10-03 16:23:39
성령이 내 안에 없으면 나도(우리도) 유다와 같이 배반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 돌님과 김요한 님의 글 감사합니다.

위 글의 본 뜻은 "성령이 내 안에 없으면 나도(우리도) 유다와 같이 배반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목사라는 성직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자꾸 인간적이 되고, 숫자놀음에 빠지고 하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해 측근이라고 하는 제자들이 그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해(관해) 잘 알았겠지요. 그러나 그 앎이 그들로 하여금 '증인'으로 살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에 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아니며, 성서는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에 대해 그럴듯한 신학을 얘기하고 책을 쓰고 하지만, 삶과 생각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교회와 신학자와 목사들을 보게 됩니다. 이는 저 자신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구요.


문맥을 잘 보시면 오해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성령의 사람' 예수를 따르려면 성령을 상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가랑잎은 변경수의 닉네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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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1
김요한 (82.126.170.44)
2006-10-03 13:05:35
우리의 싸움은 향방없는 싸움이 아닙니다.
향유를 부은 이야기는
예수가 왕이고 메시아 이었다는 도유식을 가장 미천한여인을 통하여 거행하게되었다는 성서기자의 신학적인 '예수가 왕'이라는 강조의 묘사가 있었고,

거듭나고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나라를 '볼수' 있다.. '들어갈 수'있다
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3장에 만 있는
유대 바리새인에게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편협한 시각을 벗으라(다시보라)는 예수님의 말씀(혹은 요한공동체의 고백주장) 이란 것도 전혀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보편적인 헌신에 대한 강조와
보편적인 거듭남(성령)만을 강조할 경우

각 성서의 언어가 전혀 다른 의도로 곡해될 수 가 있습니다.

저는 유다가 성령을 받지못해서 예수를 배반했다고 말하기보다는
유다는 예수가 누구인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몰랐던지, 알았어도 그것에 가치를 두지않았기에 배반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것이 크게말하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배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 심각한 교회개혁의 중심점은
성령, 예수, 하나님, 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규명하지 않을 때.
단순한 종교적 열심..
복음과는 거리가 먼 종교적 열심으로 줄달음치게 만들든지
무엇을 추구하고 구현하라는것인지
향방없는 싸움을 가르치는 것이 될수 있습니다.

바울이 왜 십자가의 사도가 되었는지...왜 유대인에게 그토록 거치는 자가 되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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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2
김요한 (82.126.170.44)
2006-10-03 02:20:47
열매가 무엇인가 를 생각하고 성령을 말해야한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잔잔하게 파고드는 성서의 등장인물 입장에서 쓰신 글들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령'의 글중에서 한가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추종자들(예수교)가 있기전에 유대인들도 기도를 지나치게 많이 했고
중세기에 많은 수도사들도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기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삶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간파해내지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경건과 금욕, 헌신이라는 개인윤리차원 정도이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하고 싶습니다.

'기도하면 성령이 임한다' 라는 도식은 어느정도 수긍이 되지만
예수로부터 말씀하고있는 성령이 무엇인지 어느정도 규명이 필요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유대교로부터 확연히 다른 관점의 삶의 방향으로 나간것
이방인 포용, 종교성에서(율법적)의 해방 (오늘날의 인권운동에 가까움) 유대와 이방인 과의 장벽을 궁극적으로 허물은 해방과 소외(죄)을 허물은 바람을 성령이라고
신약은(예수이후)표현하고 있다고 판단 됩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의 표현은 그운동이 있은 후에 누가가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로 '성령'의 역사' '성령'이었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바람(운동, 현상)을 생각지않고
성령이라는 단어를 이야기 할때에

신비적인 기운(프뉴마)으로만 해석될수가 있고
결국, 개인이 소유하는 특별한 능력으로 오해될소지가 있습니다.

오늘날 영에대한 풀이가 혼란한때에 '성령'이라는 단어(?)(표현)가 무엇인지
어느정도 규명하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나아가야하는지 혼란해질수있습니다.

오히려 이방인, 죄인들, 당시 1세기에 버려진 인간들을 해방하는 사건을 오늘날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은 그것을 말하기위해 ... 그것을 예수의영 '성령'이 강림했다라고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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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2
이 돌 (125.57.101.112)
2006-10-02 17:27:38
무슨 소설 쓰는교..
[성령을 받지 못하면 가룟유다처럼 살게된다.]
그럼 유다 빼고 나머지 사도들은 당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유다 처럼 되지 않았습니까?
신학만 좀 하고선 진리를 사변(思辨)적으로 그려내면 소설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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