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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이후
박효원  |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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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7월 04일 (목) 03:30:12 [조회수 : 6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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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사회주의 운동은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주역이었다. 연해주 항일 무장투쟁도 한인 독립군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으로 옛 일이 됐다. 볼셰비키 정부는 처음에 일본과 싸웠지만 결국 일본과 타협했다. 붉은 군대에 편입된 한인들은 더 이상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군이 아니었다.

자유시에서 만주로 돌아간 독립군과 흩어진 독립군들은 힘든 시절을 보냈다.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은 일본군의 간도 습격을 피해 밀산(密山)으로 이동했고,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레닌 정부에 희망을 품고 우수리 강을 건너 연해주로 갔다. 그는 자유시 참변 전부터 적군의 의도를 의심했다. 그래서 자유시로 향하지 않고 회군하여 만주로 돌아왔다. 김좌진은 만주에서 다시 독립군을 키우려 애쓰다가 1930년 한인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됐다.

서일(徐一, 1881-1921)은 대종교 지도자였다. 2대 종사 김교헌이 그에게 3대 종사직을 물려주려 했으나 사양했다. 그는 김좌진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장군이다. 일제의 추격을 피해 밀산으로 이동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을 때, 그는 최고 지휘관인 총재였다. 자유시에서 홍범도와 지청천이 투항할 때, 서일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김좌진과 밀산으로 회군했다. 밀산으로 돌아온 서일은, 농사지으며 전투하는 식으로 독립군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마적 떼의 습격으로 허사가 됐다.

자유시 참변으로 수 천의 독립군 동지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다 도적떼의 습격으로 남은 독립군마저 잃자, 그는 조식법(調息法)으로 자진했다. 조식법은 호흡기관을 스스로 정지시켜 자진하는 방법이다. 1916년 홍암 나철이 일제의 종교탄압에 항거하여 자진할 때도 썼다.

자유시에서 저항하다 살아남은 독립군은 흩어졌다. 사할린 의용대 지휘관 박일리아는 구사일생으로 자유시를 벗어나, 중소국경 이만(Iman, 현재 Dalnerechensk)으로 이동했다. 그가 이만에서 만주 서쪽 요하(饒河) 지역으로 이동한 후 알려진 소식은 없다.

볼셰비키 사상에 투철했던 오하묵은, 소련군 5군단 소속 ‘합동민족여단’의 지휘관이 됐다. 붉은 군대에서 대령으로 진급했고 연대장과 사단장이 됐지만, 1936년 숙청 대상자가 되어 처형됐다.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강요 받고 독립군 300명과 투항한 홍범도는 붉은 군대 대위가 됐다. 홍범도의 나이 53세, 사령관 오하묵의 나이는 26세였다. 홍범도는 살아남아야 항일투쟁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군복을 벗었다. 그리고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노동하며 지냈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온갖 일을 다했다. 승려가 된 적도 있고 포수가 된 적도 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충격을 받고서 항일투쟁에 나섰고, 1908년에는 연해주로 옮겨와 항일 독립군을 이끌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과 함께 치른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그의 이름을 드높였다.

1937년 강제이주 때 그는 카작스탄 크질오르다(Kzilorda)로 갔다. 블라디보스톡 문화활동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크질오르다는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의 중심이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크질오르다로 옮겨온 ‘고려극장’의 수위로 말년을 보냈다. 그가 살았던 집 근처 거리는 ‘홍범도 거리’가 됐다. 고려인들은 그를 장군으로 기린다. “홍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눈과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 막 쓰러진다.” 이 민요풍 노래는 함경도 사람들이 홍범도 대장을 칭송하며 불렀던 노래다.

코민테른은 어떻게 됐을까? 1920년대 초 드높았던 세계 혁명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라앉았다. 1922년 스탈린이 집권하고서 코민테른의 역할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1943년에 코민테른을 해산했다.

1934년 스탈린의 절친인 키로프(Sergei Mironovich Kirov, 1886-1934)가 암살 당한 후(또는 스탈린이 비밀리에 죽인 후), 스탈린을 반대한 공산당 간부들은 체포되고 처형됐다. 숙청은 모든 분야로 확산됐다. 1937년부터 두 해 동안, 스탈린에게 조금이라도 비판적이면 숙청됐다. 70만 명이 처형됐고 200만 명 이상이 굴락(Gulag,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

칼린다리쉬빌리(Nestor Alexandrevitch Kalandarishvili, 1876-1922)는 어떻게 됐을까? 1921년 자유시에서 저항하는 한인무장 독립군들을 제압한 그는, 다음 해 백군과 싸우기 위해 3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야쿠츠크(Yakutsk)로 갔다. 야쿠츠크는 지금 사하 공화국(Sakha Republic)의 수도다. 사하 공화국은 투르크계인 야쿠트(Yakut)인들이 사는 곳인데, 아마 사람 사는 곳 중 겨울이 가장 추운 곳일 것이다. 추운 삼월, 칼린다리쉬빌리는 잠복한 백군의 포위공격을 받고 야쿠츠크 외곽에서 죽었다.

연해주 땅에서 쓰러진 독립군들과 스러진 독립군의 혼을 누가 위로해 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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