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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스: H.G. 아펜젤러 1주기 추도문(1903년)
노종해  |  ro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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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6월 06일 (목) 10:35:10
최종편집 : 2019년 06월 09일 (일) 01:46:44 [조회수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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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스: H.G. 아펜젤러 1주기 추도문(1903년)

“주여 앞장 서 옵소서, 제가 따르겠나이다.
진리와 충성으로 최후의 순간까지 따르겠나이다."(H.G Appenzeller)

G.H. Jones/노종해 역

*H.G. 아펜젤러 선교사(1885-1902)는 1902년6월11일 순직하여, 올해(2019)로 117주년을 맞습니다.이 글은 G.H. Jones(조원시) 선교사의 아펜젤러 1주기 추도문으로, 아펜젤러의 1주기 추도식은 1903년5월, 제19회 한국선교연회에서 열렸습니다.(곳, 정동교회) 이 추도문은 1903년 연회록 pp68-72에 게재 된 것으로 원문에 충실하고자 직역하였습니다.(역자 주)

   
▲ H.G 아펜젤러(1858.2.6.-1902.6.11. 44세)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전도자, 선교사, 교육자, 편집자, 그리고 번역자로 뛰어난 인품을 가진 성실한 일꾼이었다. 1858년2월6일, 펜실베니아의 수도 수더톤(Souderton)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통해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케 한 근면, 자립, 자존의 습성을 익혔다. 또한 그의 선교 초기에 격은 어려움과 고생 가운데서도 굳게 지켜나간 육체적 건강을 여기에서 얻었다. 그의 조상은 원래 독일계 스위스 캔톤스(Cantones)의 아펜젤(Appenzell) 계곡 출신으로 현재까지 이 이름을 성으로 사용한다. 초기의 종교교육은 독일 루터교회에서 받았으며 일생동안 복음주의 교회의 감독장(grand old communion primus)의 지고한 권위와 경건함을 나타내주는 위엄을, 그의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대학에서 교양과정을 준비하면서, 얼마동안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지낸 후 1878년, 고향 가까이의 펜실베니아 주 랭카스터의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에 입학했다. 당시 그는 20세였다. 이 기간에 그는 감리교회에 입회하여, 여기에서 평신도 전도자(Lay Preacher)로서 전도에 대한 소명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초기부터 그의 사역은 필연적으로 선교사였으며, 그의 첫 번째 파송은 학생시절 때 그가 다니던 랭카스터의 제일교회에서 운영하는 작은 선교처였다. 일생동안 선교사로 지내다가 이국땅에서 생을 마쳤다.

     그후 언제나 그가 명예롭게 생각는 문학사를 수여해준 프랭클린 마샬대학의 교양학부를 졸업한 뒤, 1882년 가을 감리교회의 선교를 위한 완벽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드류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다. 장엄한 신학부의 환경에서 그의 성격과 재능은 최고로 유능한 선교사의 자질을 위해 훈련받았다. 버츠(Buttz)학장, 밀레이(Miley)박사, 스트롱(Strong) 박사, 업햄(Upham) 박사, 크룩스(Crooks) 박사와 같은 분들의 교습과 지도로 그는 교회가 자랑할 만한 자질을 갖추었다. 이러한 분들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일생동안 그분들 밑에서 보낸 날의 기억들은 기쁨이 되었으며, 언제나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드류에 있는 동안에도 적극적인 선교활동과 사업을 계속하여 대학에서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인 파송을 받을 때까지 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그는 드류에서의 기억이 아름답게 남겨진 채 떠나갔다. 많은 동기생들이 교회에서 이미 명예롭고 책임 있는 일을 맡고 있으나, 그들보다 뒤지지 않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 그는 해외선교에 헌신키로 결심하였다. 그때 발티모어의 가우처(John F. Goucher) 박사의 많은 헌금으로 가능케 된 한국 선교를 위한 선교사가 요청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부름에 기꺼이 응했다. 1884년12월, 그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펜실베니아 랭카스터의 엘라(Ella J. Dodge)양과의 결혼이고, 또 하나는 한국으로의 파송이다. 1885년1월, 대학 졸업 시험에 합격하고 신학사의 학위를 받고 졸업했으며, 그는 아내와 함께 그들의 선교지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선교부의 설립을 위해 스크랜튼 박사부부와 그의 어머니 스크랜튼(M.F. Scranton) 대부인과 함께 동행 하였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파울러(Fowler) 감독을 만나 아페젤러는 집사목사(Deacon)와 장로목사(Elder) 안수를 받았으며, 그가 일생 동안 회원으로 지낸 필라델피아 연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잠시 그의 동료들과 감리교 한국선교부(the Korea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조직하였는데 명목상 감리사는 중국과 일본에서 오래 활동한 맥클레이(R.S. Maclay) 박사가 되었으며, 아펜젤러가 부감리사(Assistant Superintendent)가 되었다. 1885년4월, 한국에 도착하여 이때부터 아펜젤러의 일생은 한국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헌신하였다. 한국에서 17년 동안 그가 행한 일들을 하나씩 더듬어보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의 많은 부분을 기술하게 될 것이다. 이런 서술은 한국교회 기록의 많은 양이며 동시에 매우 훌륭한 것이며 감리교회(Methodism)가 앞으로 계속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것 중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업적 중에서 매우 극소수만을 기술하게 될 것이다.

 

   
▲ 안식년 휴가 중 아펜젤러의 가족사진(1901년)-홀로 내한하여 순직함(1902년6월11일)

     1887년, 그는 한국에서 전임 감리사(Full Superintendent)가 되어 1892년에 안식년 휴가로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 이러한 중요하고 고귀한 업무에 지칠 줄 몰랐다. 저급한 문명의 상태에서, 은둔자와 같이 어둠과 무지의 사람들과 함께 초기의 상황에서부터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난관을 만났다. 그가 일하는 가운데 당면한 육체적이고 도덕적 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직면한 난관은 가장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도 꺽일 만한 것이었다. 그가 만약 좀 더 약한 사람이었다면 모두 포기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어떠한 교사나 심지어 책도 없이 언어를 습득했다. 이국인들에 대해 의심하고 증오하는 나라와 화해해야만 했다. 또한 기독교는 모든 쓸모없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기독교를 옹호해야만 했다. 그는 모든 장애물을 인격, 능력, 그리고 선한 성품의 힘으로 극복해 나아갔다.

 

   
▲ Official Minutes of the Nineteenth Annual Meeting Korea Mission M.E.C. 1903. pp68-69.

     그는 배재대학(paichai College)을 설립하여 그의 대부분의 선교사 활동을 학교의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초기 감리교회의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들은 이 나라의 최초 교회의 기초를 닦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글로 자신을 나타냈고 한글을 사용했고,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그는 공공심을 가진 자이며 연합교회(the Union Church), 대한성교서회(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 서울 유니온(the Seoul Union), 외국인 묘지협회(the Cemetery Association), 대영 왕립 아시아학회의 한국지부(the Korea Branch of the Asiatic Society)의 중추적인 회원이 되었다. 사실상 그는 지역사회의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모든 방면에서 그렇게 인식 되었다.

     선교사로서 그는 많은 여행을 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반도의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알려졌다. 그는 이 나라의 모든 지역을 여행하였으며 사람들과 매우 친근한 관계를 가졌다. 일하던 인부도 일하다 말고 그에게 인사를 했고, 친구들에게 존경하는 그에 대해 설명을 했다. 학자들도 그의 박식과 교육과 그의 활동에 대해 존경을 표했다. 양반 계층들도 그들의 친구로서 그를 대하기를 기뻐했다. 정부에서도 그를 진정한 친구로서 여기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중요한 자리에 함께 하여 국사를 논하기도 하였다.

     그는 동료와 함께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를 편집하여 5권까지 발행하였는데, 이 책자는 오늘날 영어로 된 것으로는 한국에 관해 모은 글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삶과 가르침은 한국교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들은 그의 커다란 사랑을 알았고, 깊고 지속적인 애정으로 이를 보답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앙의 아버지로 삼아 전국각지에 흩어져서 일생동안 지속될 축복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삶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미래의 한국교회의 역사가에 남겨둔다. 이것은 다른 교회의 역사의 내용들과 매우 긴밀하게 짜여 있기 때문에 다른 요소들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무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창조적인 인격의 사람으로 일생의 과업을 위한 계획은 매우 풍부했다. 선교본부에서 그에게는 선교사에게 맡겨지는 모든 가능한 사업들을 거의 모두 요청했다. 여러번 그는 감리사, 대학교 학장, 회계, 장로사, 편집자, 번역가의 일을 감당했다. 선교사로서 그는 가장 열심히 일하였으며, 매우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 H.G 아펜젤러 외 공동번역의 한글 신약전서(1900년)와 휴대용 성찬기(정동교회 아펜젤러 기념박물관 소장)

     1902년5월, 평양에서 열린 연회에서 그는 한국 남부 지방의 장로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 무어(Moore) 감독과 함께 자신의 관할지역 중 한 곳을 방문하던 중, 일본의 철도노동자 일당들에게 습격을 받아 부상당했다. 공격자들은 구속되었으며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거번역 위원회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재판의 증인으로 서기 위해서 얼마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머물러 있다가 오사까 상선회사인 구마가와 마루(the Kumagawa Maru)라는 증기선을 타게 되었다. 그는 한국인 조사와 부모에게 데려다주기로 한 어린 한국 소녀를 책임졌다. 6월11일 밤, 남쪽으로 항해하던 이 배는 같은 회사의 또 다른 증기선 기소가와 마루(the Kisogawa Maru) 호와 충돌하여 침몰했다. 그 사고는 매우 순식간에 일어났으므로 어떤 상황들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마지막 순간에 2등 선실로 향하는 승강구로 그가 가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과 죽음이 순간에서도 그는 자신이 맡은 한국인들만이 그의 관심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그의 마지막 노력은 한국인을 돌보고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는 불운한 배와 그가 사랑한 한국인들과 함께 사하졌다. 바닷물은 그를 삼켰고 그의 무덤을 간직하고자 하는 우리의 작은 소망도 앗아갔다. 우리는 다만 흰 거품이 출렁이는 짠 바닷물이 순식간에 사랑하는 형제의 모습을 삼켜버렸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그는 안식처를 나타내는 비석이나 장식도 없는 회색빛의 쓸쓸한 바다 속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다. 우리는 그가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은 뒤에 남겨진 우리의 마음속에 그가 결코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죽은 뒤에 웅장한 기억만을 남겨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형제는 더 큰 것을 남겼다. 그는 그가 도와주었던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그의 자신을 도덕적 선함(Moral Good)으로 투영시켰으며, 그는 영원히 우리 삶에 살아있다. 종소리는 그치고 조용해졌으나 그 달콤하고 은은한 소리는 아직도 그가 풍요롭게 해 주었던 사람들의 말과 행동 속에 울리고 있으며 많은 영혼들의 은밀한 마음 한구석에서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축복의 기도가 속삭이고 있다.

     이제 잠시 우리 형제의 사람됨과 인격에 관해서 살펴보자. 아펜젤러는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본질적으로 예의는 작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그의 일생은 타인을 위한 진심어린 신중한 이해로 일관되었다. 그의 동료를 향한 그의 태도는 언제나 인정이 넘쳤고 숙녀들에게는 의협심 낳은 기사였다. 그의 인사는 항상 아름다운 온화함이었고 친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의 우정은 존경하는 친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렇게 보답되었다. 그는 우애가 깊었다. 언제나 친구들을 변호해 주었다. 나침판의 바늘이 북쪽을 향하듯, 해시계가 해를 바라보듯 그는 친구들에게 그러했다. 어떤 특별한 일을 성취한 친구들에게 축하의 짧은 글을 보내는 것은 그의 즐거움이었고, 그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자그마한 칭찬의 말들이 오늘날까지 소중하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친구들을 사랑했다. 그는 모든 이들을 사랑했고 그의 형제애로 모든 나라의 사람들에게 존경 받았다. 그의 동정심은 매우 많아서 한국의 어떤 이보다 슬픔과 비탄에 잠겨있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는 언제나 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기쁨의 일에 함께 하였다. 그와 동시에 재난이나 슬픔에 잠겨있는 친구들에게 풍부한 동정을 베풀 수 있는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를 아는 모든 가정은 그가 오는 것을 기쁘게 반겼으며, 어린이들의 존경과 기쁨의 대상이 되었으며, 자기 집에서 훅은 친구의 집에서 어린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그의 팔로 안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 1903년, 제19회 연회에서 G.H. Jones선교사의 아펜젤러 1주기 추도문, pp70-71.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절대로 일터로부터 패배하여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호전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클라이언(Clarion) 처럼 우렁찬 목소리를 통해 나타났다. 이교도들이 외국인에 대한 거짓 소문에 의해 흥분하여 창과 칼로 위협하고, 외국인들을 도시와 시골로부터 몰아내려고 할 그날 밤에도 선교부의 재산과 소유지를 보호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다. 초기에 여러 번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면서도, 위험과 전쟁, 전쟁의 뜬소문이 발생하여도 그를 위축할 만한 위력이 되지는 못했다. 여러 번의 질병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한국인들이 매일 수백명씩 무서운 콜레라로 인해 죽어가고, 그의 주위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해도 그는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다.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는 그의 심념과 동일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죄를 미워했으며 죄와 타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이를 고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로부터 도망하지 않았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충성스러웠다. 그는 그가 선택한 교회에 충성을 다하였다. 그는 교리를 사랑했고 그 법칙을 지켰으며 교회의 역사를 소중히 여겼으며 그 기관들을 보호했으며 성인들과 지도자들을 존경했다. 찬송가는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그 자신의 영혼의 삶은 자신이 행한 수많은 경험들에 의해 풍성해졌고 교회의 신조는 그가 추구하는 영원한 희망의 확고한 기초가 되었다. 그는 교회의 발전을 위해 살았으며 교회봉사에 헌신했다. 그는 감리교(Methodism)가 추구하는 복음주의적 기독교(Evangelical Christianity)의 정신, 체제, 정책 등을 한국인에게 전해야 한다는 신성한 책무를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를 구속한 진리에 어제나 진실했다고 할 수 있으며, 사람하고 소중히 여긴, 쇠퇴하지 않고 오염되지 않는 믿음을 한국인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교회에 충성을 다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주님의 무한한 영광 속에서 살았으며 매순간 그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눈을 돌릴 때마다, 이렇게 외쳤다.

“주여 앞장 서 옵소서, 제가 따르겠나이다.
진리와 충성으로 최후의 순간까지 따르겠나이다.”

 

   
▲ 1903년, 제19회 연회에서 G.H. Jones선교사의 아펜젤러 1주기 추도문, p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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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3년, 제19회 연회에서 아펜젤러 1주기 추모식이 열린 정동제일교회(사진:1890년대, S.마펫 촬영)-이필주 담임목사 사택과 사무실로, 3.1독립선언서에 기독교측 민족대표16명의 서명 장소도 보인다.
   
▲ 아펜젤러 묘비(양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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