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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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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5월 05일 (일) 13:40:29
최종편집 : 2019년 05월 06일 (월) 02:49:51 [조회수 : 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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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로 산다는 것
벧전1:1-2
(2019/05/05, 부활절 제3주, 교회 설립111주년 감사)

음성으로 듣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미리 아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 주셔서, 여러분은 순종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더욱 가득 차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교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빕니다. 교회설립기념주일인 오늘 우리는 감사의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오늘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교회는 일종의 출애굽 공동체입니다. 압제의 땅을 떠나 자유의 땅을 향하는 과정이 곧 교회의 형성과정입니다.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고, 홍해에 가로막히기도 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동나기도 하고, 내분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출애굽 공동체는 그런 모든 난관을 돌파하면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인간의 역사는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형제들,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이런 갈등 속에서 살았습니다. 갈등은 사람들을 갈라서게 만듭니다. 문제는 그것이 공간적인 거리만 만드는 게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를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갈등으로 인해 갈라지고 찢긴 우리 마음은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 때문일 겁니다.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어떤 일치를 향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이들을 만나면 우리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교회는 갈라진 세상에서 일치를 경험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는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3:11). 교회가 무엇인지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말씀이 없을 겁니다. 이런 일치의 바탕은 ‘서로에 대한 존중’입니다. 하나됨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드러내는 징표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17:21)라고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최근에 강남의 어느 대형교회에서 교인들이 물리적으로 충돌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원로 목사파와 담임 목사파로 나뉜 교인들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참 딱한 노릇입니다. 일치의 상징이어야 하는 교회가 이익 앞에서 갈라진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에 절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통계를 보면 감리교인도 지난 1년 사이에 2만 여명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시금 일치의 꿈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종종 정현종 선생의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이’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이 시는 “꿈을 버리다니, 요새의 내 꿈은/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이야”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부동산 재벌이 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의 떠돌이와 건달들을 먹이고 재우고,/이쁜 일탈자들과 이쁜 죄수들,/거꾸로 걸어다니는 사람과 서서 자는 사람,/눈감고 보는 사람과 온몸으로 듣는 사람,/발에 지평선을 감고 다니는 사람,/자동차 운전 못하는 사람,/원시주의자들,/말더듬이,/굼벵이,/우두커니,/하여간 그런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게 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을 꿈꿉니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곤 없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요? 무엇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가 꿈꾸는 것은 “무정부적인 감각들의 절묘한 균형으로/집 전체가 그냥 한 송이의 꽃인 그러한 곳”입니다. 이것을 교회의 꿈으로 삼으면 안 될까요?

∙흩어진 나그네
오늘 본문은 베드로전서의 인사말입니다. 이 인사말 속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교회의 존립 근거가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회람 서신인 이 편지의 발신인은 베드로이고 수신인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사는 신자들입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모든 지명은 지금의 터키에 속한 지역들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 ‘~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흩어져 사는’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번역어이고 ‘나그네’는 파레피데모이스(parepidemois)의 번역어입니다. 파레피데모이스의 문자적 의미는 ‘낯선 자‘입니다. 나그네라는 단어는 낯선 자보다 왠지 쓸쓸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고복수 선생이 부른 ‘타향살이’가 떠오릅니다.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어떤 막막함과 상실감이 물씬 묻어나는 가사입니다. 나그네는 정착민에 비해 취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살갗이 벗겨진 존재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가 어떤 일 때문에 무질서나 혼돈 상황에 빠지면 가장 먼저 공격의 타깃이 되는 것이 나그네의 운명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질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끼리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류 세계의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한 사회의 실상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합니다. 그 사회에 동화되어 있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나그네에게는 보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에 그들은 시대와 불화하기 쉽습니다. 한때 ‘가난한 이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힘겹고 고단한 자리에 서보아야 세상의 실상이 제대로 보인다는 말일 겁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당연의 세계에 도전하고, 가끔은 질서에 균열을 냅니다. 그리고 거기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예수님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디아스포라의 번역어인 ‘흩어져서’입니다. ‘흩어지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씨를 뿌린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의미심장합니다.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본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곳곳에 심으신 새로운 질서의 씨 혹은 생명의 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꽃을 피워내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역 혹은 일터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심으신 자리입니다. 심으신 뜻은 다른 것 없습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청파교회라는 공동체 속으로 우리를 부르신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나눔으로 서로를 풍성하게 하고, 공동체 속에서 경험한 기쁨을 세상에 흘려보내라는 것일 겁니다.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
믿음의 사람들은 또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택하심은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부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갈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은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기 때문에 모세가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출40:35). 그런데 레위기는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레1:1)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오로지 부르실 때에만 그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부르십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택하심은 특별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닙니다. 택하심은 출애굽 공동체가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벧전2:9). 우리가 택하심을 받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증언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아셨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습니다. 성령은 일으켜 세우는 힘이고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은 나뉜 이들을 하나로 모으십니다. 진정한 일치는 인간의 동지적 결합이나 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에 파고 들어오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신 까닭은 우리와 더불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피 뿌림을 받았다는 것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자기 좋을 대로 살면 안 됩니다. 어느 작가는 우리 시대에 드리운 어두움의 대부분은 ‘부르심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는 데서 빚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부름은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부르심에 귀를 기울일 때, 즉 더 큰 뜻 앞에 우리를 세울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를 넘어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기독교인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타락한 인간이란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 몸을 가진 인간의 버릇입니다. 그러나 인간답게 되는 것은 그런 버릇 혹은 욕망의 독재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때입니다. 그저 희생하라고 말하면 우리 속에 그늘이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접속된 이들은 자기 속에서 ‘자아’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아가 무너지면 우리는 한결 가뿐하게 다른 이들의 짐을 대신 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거룩해진 사람은 순종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뜻에 아멘하기 위해 나의 욕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순명 그 자체라 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신비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의 피 뿌림을 받았다는 말은 그분과 심정을 나눈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세계에서 늘 상처입고 사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장벽을 당신의 몸으로 철폐하셨습니다. 병 들고 귀신 들려 신음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당신의 몸으로 앓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천대받는 이들을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그 사랑에 접속된 사람들은 누구나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정녕 예수의 피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가르고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그렇게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짓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많습니다. 건물을 다 지은 후 빚을 갚느라 전전긍긍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것은 훌륭한 건물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깊은 일치와 하나님 나라의 징표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없는 한 교회는 세상의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욕망의 전장으로 변한 이 세상에 파종된 하나님 나라의 씨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해보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 교회가 환대의 공동체로,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 세워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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