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을 다 보내고서야 무엇을 했는지 돌아본다.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제대로 지내야 부활절을 부활절답게 맞는다고 평소 강조해왔기에 늘 자신의 사순절을 참견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해마다 사순절기에 십자가전시회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은 단골 프로그램인데, 고맙게도 대전에서 바통을 이어갔다. 뜻밖에 올해는 춘천과 관련한 십자가 작업이 사순절을 사순절답게 해 주었다.

  춘천의 어느 교회는 <십자가 순례>(도서출판 KMC)에 소개한 십자가 작가들의 대표작으로 세이레 새벽기도회 메시지를 준비한다고 하였다. 열 명 쯤 되는 설교자들이 두 편씩 나누어 준비한다면서 그 중 한 목회자가 색동교회로 찾아와 인터뷰하였다. 그는 전시회가 열리는 대전 유성까지 찾아가 십자가를 영상에 담았다. ‘느티나무 십자가’(이진근 작)와 ‘에큐메네 십자가’(이딸랴 작)는 그렇게 거듭났다.

  또 다른 춘천 어느 교회의 경우 사순절 다음날에 십자가 주문을 받아, 고난주간 목요일에 전달하였다. 두 교회 모두 큰 아픔을 지닌 교회들이어서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유난함을 느꼈다. 전자의 교회는 3년 전 대형 화재로 예배당이 전소하였다가 거뜬히 재건하였다. 다른 한 교회는 올 초 담임목사가 너무 일찍 소천하였는데, 그가 소원한대로 교회의 재건이 간절한 교회였다.
 
   사순절을 시작하며 찾아간 춘천의 그 교회는 넓은 주차장을 펜스로 두르고 있었다. 2018년 내내 전임 목회자 은퇴와 초빙을 둘러싼 갈등과 내홍 때문이다. 게다가 연회행정을 수용하지 못한 다수의 교인들이 더 이상 교단의 소속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분쟁은 법정으로 번졌다. 십자가의 거룩함과 무관한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참사인데, 그 비극은 십자가의 수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었다.

  내 마음을 재촉한 것은 ‘황용태’라는 이름 때문이다. 황 목사는 작년 10월 중순에 분쟁 중인 그 교회에 마치 십자가 용사처럼 부임하였고, 겨우 세 달 가량 만에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6년 전 위암의 발견과 이어진 관절 류머티즘, 공황장애 그리고 림프암(백혈병)이 겹치면서 죽음과 사투를 벌여왔다. 또한 이 모든 고통을 극복한 인간승리로 희망을 연출한 당사자로도 알려져 있다. 평소 활달한 사람인지라, 목소리만으로도 생기와 용기를 주는 인물이었다.
     
   황 목사가 분쟁의 한 복판에 있는 춘천에 온 것은 그를 필요로 한 교회의 간곡한 요청 때문이었다. 그는 30년 전 새내기 전도사로 이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였고, 아내를 이곳에서 만났으니 아마 친정교회의 사정을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서울 마포의 새누리교회를 즉각 사임하고, 몸을 겨우 추스르는 처지에서 제 몸보다 더 위중한 교회를 살려야겠다며 춘천 행을 자처한 것이다. 죽을 자리를 가리지 말라고 배운 감리교 목사다운 행동이었다.

  실은 그가 춘천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게 십자가를 의논해 왔다. 교회의 정면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 때문에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와서 보라”며, 십자가를 살릴 방법을 찾자고 제안해 온 것인데, 지금 산적한 교회의 위기부터 우선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미루어 두었다. 그리고 올해 1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3월 초, 황용태 목사의 이름으로 교회에서 연락을 받았다. 부랴사랴 춘천에 달려간 것이 재의 수요일 다음날이었다. 장로 한 분은 소천 이틀 전에 황 목사에게 온 전화내용을 일러주었다. “큰 고비를 넘겼어요, 정말로 감사해요”라고 안심시킨 후, “자꾸 십자가가 걸려요”라고 말했단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틀 후 서둘러 세상을 떴다. 그는 자신이 짐이 될 것을 염려해 교회를 사임한 상태였고, 공백을 피하기 위해 젊은 후임목사를 세우고, 병원에 입원하였다.

  “잘 지내지? 용태야.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소식 전한다. 지난 주일 갑자기 혈액암이 재발돼 서울대 응급실에 들어와 종합검진 결과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춘천교회에 사임표시하고 ... 지금은 교회에서 6개월간 치료시간을 배려해줘서 항암치료를 6개월간 6차례 하게 돼... 그래도 희망 잃지 않고 열심히 암과 싸울 테니 지켜봐주게. 고맙다. 동기들아. 친구들의 영발 있는 기도 부탁하며...”(2018년 12월 11일).

  비록 황용태 목사는 급히 떠났지만, 가족은 새 십자가 헌금을 했고, 앞으로 십자가와 함께 교회의 중심을 바로 재건할 것을 소망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내게 의뢰하였고,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다. 그날 만난 교인들은 ‘황 목사님이 교회에 화평을 가져왔다’고 했다.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황 목사님이 산적한 교회의 문제들을 다 품고 가셨다’며 고마워하였다. “그 분은 겨우 100일 함께 했지만 우리 교회를 위한 순교자와 같습니다.”

  황 목사가 병상에서 염려한 것은 목회자로서 당연한 고민이었다. 스크린에 대부분 가려진 십자가는 얼마나 볼썽사나운지, 교회를 에워싼 방어벽과 함께 지금 그 교회의 불안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황 목사가 염려한 것은 스크린으로 상징된 인간의 욕망이었고, 교회의 안팎에 스며든 부조리한 신앙권력의 모습이었다. 교회가 겪는 진통은 마땅하였고, 그 진통은 더 건강해지려는 산통이었다.

  사순절 내내 십자가와 씨름하였다. 그리고 성금요일 새벽에 교회 강단의 중심에 새로운 십자가를 세웠다. ‘담금질 십자가’이다. 사순절 내내 서울시가 정한 미래유산 대장간에서 제작하였는데, 불속에 달군 쇠를 수 만 번 두드리는 과정을 거쳤다. 불과 물의 고통을 거치고, 세 사람이 달라붙어 아픔을 새기며 망치질하였다. 창조의 여정은 마치 교회와 황 목사가 함께 겪어온 고난과 슬픔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십자가를 미송으로 만든 받침 대 위에 올려 두었다. 이 나무는 집의 대들보로 사용된 것을 재생한 것으로 100년 이상 건조한 것이니, 십자가와 함께 성물로 거듭났다.

  성금요일 전날, 십자가와 받침대를 교회 측에 인계하면서 뒤늦게 받침대 안쪽에 난 긴 상처를 보았다. 언 듯 무늬처럼 보여 별일 아니라며 얼버무렸으나, 계속 눈길이 갔다. 나중에 목수에게 듣자니 전기톱에 스친 자국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몹시 부아가 나서 사나운 말로 항변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내 딱한 심정과 달리 장인(匠人)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세요.” 소소한 실수였지만, 그 흠이 밤늦도록 마음에 걸렸다.

  애초에 주문을 받고 춘천에서 돌아오면서 십자가에 황 목사의 흔적을 새겨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그와 나만이 아는 그런 비밀을 남기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서둘러 디자인을 넘기면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인계한 다음날 성금요일 새벽에야 문득 처음 생각이 떠올랐다. ‘아차, 흔적을 남기는 일을 잊었구나.’

  돌아보니 그 흔적은 이미 남아있었다. 물론 십자가가 아닌 그 받침대 깊은 속에 존재하였다. 강하게 스치듯 지나간 톱자국은 마치 황 목사의 삶에 새겨진 생채기처럼 선연하게 느껴졌다. 남들이 볼 수 없는 십자가 이면에 그 흔적을 남겨주어야지 했는데,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길은 버젓이 보이는 그 정면, 깊숙한 그 곳에 상처처럼 흔적을 남겨 두셨구나’라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이 다 풀어졌다. 돌아보면 십자가는 항상 은총이었다.